마지막 목격자들 - 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연진희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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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명의 아이들


마지막 목격자들-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글항아리, 2016-11-25.

 

   전쟁의 승자라는 말만큼 서글픈 환희가 있을 수 있을까. 살아남았음에도 비애로 얼룩진 전쟁의 기억. 상처를 이겨낸다는 말이 글 한줄로 담아질 수 있을까.


언젠가 도스토옙스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평화와 행복, 심지어 영원한 화합을 위한 변명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죄없는 어린아이가 그것을 위해, 혹은 그 견고한 토대를 위해 한 방울이라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그 자신은 이렇게 답했다. “어떤 전보도, 어떤 혁명도, 어떤 전쟁도 그 눈물에 대한 명분은 될 수 없다. 언제나 눈물이 더 중요하다. 오직 그 작은 눈물 한 방울이……”

 

   작가는 서두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마지막 목격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벨라루스 아이들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벨라루스는 소련의 국경과 접하고 있어 여러 모로 극심한 피해를 입는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오로지 인접했던 이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땐 나치의 점령지로서 피해가 컸고 종전 후엔 그 이유로 소련으로부터 배신자라 낙인찍혔다. 지금은 성인이 된 이 ‘아이’들은 그때의 느낌과 기억을 되살리며 전쟁에 대한 ‘아이들만의 시선’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꾸준하게 전쟁의 참상을 경험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전쟁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성인들의 눈으로 들려준 다른 이야기와 달리 전쟁 당시 아이였던, 현재 성인들이 말하는 그 기억의 시간은 또다른 느낌을 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고아들 101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은 당시 14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분명 현재 말하는 이는 성인이지만, 그때의 상황이 전쟁이었음을 ‘지금은’ 알지만 마치 최면에 걸린 상태처럼 성인인 그들은 ‘아이’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쉽게 떨쳐 낼 수 없는 기억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냥 고통스럽게 상황을 묘사하던 성인의 시각과는 달리 사용하는 언어나 묘사가 오히려 전쟁이 무엇인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안타깝고 또다른 느낌이 들게 한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그 상황에서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 부모의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을 보아도 부모의 죽음을 보아도 그것이 “죽음”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왜 사람들이 길에서 잠을 자는지 의아해 하고, 왜 아빠가 움직이지 않고 누워만 있는지 의아해 한다. 부모가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는 부모를 직접 묻기도 했고, 왜 예쁜 엄마의 얼굴에 사람들이 총을 쏘는지 의아해 한다. 왜 레일 위에 사람들을 눕게 하고는 기차가 달리는지, 독일군 의사들이 다섯 살도 안된 아이들의 피를 마구 뽑아대는지, 사람들에게 마구 총을 쏴대면서 울지 못하게 하는지, 사람들을 총살하며 왜 마구 웃는지, 왜 갓난 아이에게 총을 쏘고 엄마를 쏘는지, 왜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내 불이며 우물에 던지는지 ‘눈’으로 보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줬던 부모는 존재하지 않고 춥고 배고픈 나날들이 이어졌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가 봉쇄되어 낡은 벽지로 아침 식사를 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고양이와 개를 잡아먹고 마침내 비둘기와 제비를, 또다른 동물들을 먹거나 기아로 죽어갔다.

 

난 침울하고 의심 많은 어른이 되었죠. 내 성격은 어두웠습니다. 누군가가 울면, 난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편안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난 울 줄 몰랐으니까요. 두 번 결혼했는데, 두 번 다 아내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오랫동안 날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죠. 압니다, 나도 안다고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그날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지만 그들의 내면의 이야기는 다르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어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공포와 충격이 끝없이 그들의 마음을 폐쇄해 놓았고 현재에서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일도 사랑받는 일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늘도, 자연도 그들에겐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교수형을 당한 동향인들을 처음 본 순간, 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 우리 마을 사람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어요.’ 처음으로 난 하늘이 무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하늘에 대한 내 태도가 변했지요. 난 경계심을 품은 채 하늘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1944년 말, 독일군 포로가 대규모로 이동할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빵을 주었다. 아이는 왜 독일군에게 빵을 주는지 궁금하고 쓰러져 죽은 독일 병사의 모습을 보면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지 불쌍히 여기는지 알 수 없어”한다. 11살 아이 에두아르트는 전쟁으로 엄마와 헤어졌지만 잃었지만 폭력을 당하면서도 독일군의 구두를 닦아주거나 썰매끄는 일을 했다. 유대인 친구가 끌려가지 않도록 챙겼고, 발각되어 게토로 끌려갔을 때는 주변을 돌며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적을 피해 도망가라는 아군의 말에도 달아나지 않겠다, 군인답게 죽겠다 말한다. 병원에서 피묻은 시트와 붕대를 빨고, 부패한 병사들의 시신에서 신분증명서를 챙기고, 굶주림으로 쓰러진 선생님을 위해 제 몫의 빵을 남긴다.

   전쟁속에서 공포 속에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느끼는 아이들의 모습이 웃으며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들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된다. 아이였기에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였기에 더 무섭고 두려웠던 공포들. 그 시절을 살아남아 그들이 울음을 참아가며 들려주는 전쟁의 참상은, 아니 전쟁이란 큰 이름에 갇힌 ‘인간’의 참상을 보여준다. 전쟁은 총을 든 군인의 인간성도 그것을 목격하는 이의 영혼도 모두 ‘말살’해 버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목소리를 토해내게 하는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기억들을 쉽게 털어놓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수천명의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생각이, 실천이 찾지 못한 생생한 역사의 기록을 더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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