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자살은 자살일까 살인일까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05-15.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뉴스든, 기사든 항상 피해자 혹은 가해자의 평판에 대해 말한다.
“평소 A씨는 친구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가족에게 ……한 사람이었다.”
자신과의 관계의 일부를 전부라 생각하거나 나에게 행하는 행동이 내 이익을 기준으로 형성되기도 하는 상대에 대한 감정과 판단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특히 가해자의 경우, 가족은 그렇다치고 어떤 경우엔 ‘그럴 리가 없다’ ‘나한테 인사도 잘하고’ ‘나한테 먹을 것도 잘 사주고’라며 착한 사람이라는 이웃의 ‘증언(?)’이 덧붙으면 기막힌 현장에서 도대체 저런 인터뷰는 왜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한사람의 일부만을 보고 전체로 생각하는 그런 것을 심리학에서 무슨 오류로 부르던가.
내게 질문을 하면 난 뭐라고 대답을 할까, 생각해본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쓰시마 슈지에 대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에 대해서…. 어쩌면 연민을 느낄 법도 한데….
자전적 소설이라서인지 작가와 요조가 너무 동일시되었다. 어느 순간 소설의 주인공으로 아니라 요조를 실제 작가인양 여기며 바라보게 되었다. 다시, 생각할수록 연민을 느낄 법도 한데 다자이 요사무를 위한 연민은 허락되지 않았다. 시대적인 고뇌를 느낄법한 시기였음에도 시대적 고민과 인간존엄, 가치 등등에 대한 고뇌를 읽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자이 오사무에게 요조에게 냉정해졌다. 자살한, 특히 젊은 나이에 자살한 작가에게 느껴지는 연민조차도 흐릿했다. 이 소설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그토록 열렬한 환영(?)을 받은 이유도 작가의 영향을 받았다 하는 이유도, 감정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해를 배제하려는 노력이 가미된 것처럼 나의 감정과 사고는 이 책에 다가가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렸다.
우선, 일가족 동반자살이란 타이틀에 대한 거부감도 한몫한다. 명백히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을 왜, 동반자살이라 명명하는가. 이러한 프레임이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대화하고 삶의 피폐함을 보여주고 안타까움을 극대화할지 모르지만, 분노의 게이지도 높인다. 이러한 명명은 은연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경우 가장의 가족 살해를 정당시하는 인상을 갖게 한다. 가장(아버지든 어머니든)이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 생계파탄의 경우에도 개개인의 생명까지도 책임질, 살인할 권리까지 부여받은 것은 아님에도 이런 비극은 더없이 증가하고 있다. “안타까움”만을 부각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지 못하는 한 반복될 것이고 언론은 계속 동반자살이라 기사를 쓸 것이다.
여기, 작가와 요조 역시 동반자살을 거듭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과 운명이라 하기엔 너무 자주 작가만 요조만 살아남는다. 자살의 순간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한’ 다자이 오사무의 행태는 매우 이기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각인된다. 다섯 번의 자살 시도. 그의 궁극적인 자살의 동기가 종교적·이념적인 요인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기보다 지극히 자본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부르주아 청년의 방탕과 허세, 삶에 대한 진지함의 결여가 느껴졌다.
물론 작가에 대해 글 몇편 읽고 다 안다고 느끼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역자의 해설에 의지해 내가 느낀 느낌이 더욱 공고하게만 나아갔다. 다른 느낌이나 생각을 가져보려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 첫 느낌과 사고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자살 시도는 집안으로부터 비난을 사는 상황에 있거나 재정적 지원이 어려울 때 이루어졌다. 역자는 다자이 오사무의 첫 번째 자살 시도를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수재, 천재로 이름을 떨치고 집안에서 별 볼일 없는 여섯째 아들이라 홀대받고 자랐다는 그의 자전적 고백과는 달리, 장난꾸러기이면서도 공부를 잘해 귀염을 받던 다자이가 시험 공부를 전혀 못한 상태에서 시험을 치렀다가 집안 식구들의 신임을 상실할까봐 겁먹어 벌인 소동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따라서 첫 번째 자살 소동은 집안 식구들과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된 데 대한 회피책으로서의 자살극으로 간주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죽으려는 사람의 심정을 지나치게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 그렇게 보인다. 죽고자 갈망한 것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그의 짧은 생애 또한 그가 한 일이 나약함과 방종함의 표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량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또한 아내가 있으면서도, 그것도 두 번이나. 왜 그는 매번 다른 죽을 때면 다른 여자들을 곁에 두고 그들에게도 죽음을 건의, 권유, 강요했을까. 또한 그들은 모두 여급들인.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소설로 넘어가서, 요조의 생애 행동들 하나 하나가 광적인 행동들을 일삼아 마치 정신병자와 같이 보였는데 그는 ‘정신병동’이란 공간 자체에 갇힌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사실, 지금도 정신병원이 가지는 이미지는 격렬한 저항을 가지게 한다. 그러니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의 극심한 공포는 이해된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라고, 단한순간도 미치지 않았다고 외치는 요조를 보며 동정한다. 정신병원에 갇혀서야 갇히지 않은 자는 정상, 갇힌 자는 비정상. 인간실격을 실감하는 요조에게 인간실격의 의미를 되묻고 싶다. 단순히 정신병원에 갇히고 안 갇히고의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느냐.
작가는 1909년생이고 1948년 사망했다. 한참 제국주의가 극에 이를 때이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때. 지식인이라는 이름하에 부르주아지 특유의 나태와 방종을 일삼으며 말로써 인간고뇌의 모든 번민을 짊어진 듯 포장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듯이 그러나 세상이 자신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외치며 타인을 착취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갈구하면서 여성, 특히 창녀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런 의식들이 불쾌하게 다가왔던가. 개인의 내면의 우울을 이해하지 않으려 한 순간, 요조는 내게 이렇게 평가되고 말았고 이 소설도 많은 사람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으며 의미를 파악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엔 상당히 강렬한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느낌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감정의 강도에 내가 놀랍다.
어쩌면 후기에 덧붙인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라는 문장만 없었어도 요조를 연민했을 지 모른다 생각했다. 때론 누군가에게 연민하고 싶지 않을 때, 참 슬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