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념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마음산책, 2016-06-30.
신문 속 단 몇 칸. 이름만 적힌 부고란을 보면서도 먹먹할 때가 있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것이 주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가. 그런데 이름 몇 글자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한 생애까지 알고 나면 그들이 보낸 한 생에 대한 연민이 더해진다. 이 책은 그렇게, 이 세상의 보다 나은 변화를 위해 한발짝 더 멀리, 깊이, 높이 움직인 이들의 ‘부고’와 함께 그들의 생을 담담히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
그래서 아쉽다. 타인의 생에 대한 서술에 드라마틱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송구하지만 ‘책’이라는 점으로 접근하면 담백함이 자칫 단순·지루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객관적인 생애에 대한 서술은 좋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들의 생애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지 구성과 서술은 아니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들 삶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는 걸 자제했다. 여러 자료들을 더해 ‘보여주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평전이 아니라 ‘부고’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뜨겁게 우리를 흔든” 그러나 “가만한” 서른 다섯에 대한 부고라는 점을.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 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저자는 “가만한 당신”이란 제목을 붙였다. 가만하다는 말은 조용하다는 말이다. 사전은 “(움직임이)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라고 정의한다. 이들의 삶은 결코 “가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경험을 “투쟁화”하며 불의와 억압에 맞서려던 그들의 정신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감싸안고 차분히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낯선 이의 행동 하나가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을 요약된 그들의 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변화는 필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그들이 시작점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로, 인권운동가로, 장애인운동가로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것에 자유를 누릴 권리에 대해 온 힘으로 외치고 외쳤다. 저자가 어떤 기준으로 서른 다섯 명의 부고를 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른 다섯 명 중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많았고 대체로 여성이기에 폭력과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기도 했다.
하요 마이어라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데 ‘시오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었다. ‘시오니즘’이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져 같은 지점의 생각을 만나서, 유대인의 시오니즘 비판이라 눈여겨봐졌다. 하요 마이어는 분명 강제수용소가 유대인을 비인간화하는 공간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시온주의자들의 행태에 비교하면서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적 야심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시오니스트들이 “아이들에게(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인 축출의) 편집증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홀로 코스트를 이용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언뜻 “사업수완”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델 월리엄스의 동기는 “여성의 주체성 성 의식의 자유와 권리”였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에 따라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러나 두 어린 동생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해 9주 동안 맨발로 1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고향으로 돌아온 원주민 몰리 캘리의 삶도 잊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끌려가고, 탈출하고, 아이들을 빼앗긴.
돌아보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가증스럽고 극악무도하게 등장한다. 결코 가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어 간 것은, 역사가 정의롭게 흘러가도록 이끈 것은 안타까이 부고를 전한 이들처럼, 끝끝내 ‘가만하게’ 미소를 짓고 손은 건넨 이들이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삶이란 이러한 이들을 만나는 희망에 의지해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들의 부고에 깊이 머리 숙여 묵념한다. 이들의 삶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