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016.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먼저 선출된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취임식이 있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기사와 더불어 영부인에 관한 기사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77년생 최연소 대통령의 24세 연상 53년생 부인이기에 브리짓 트로뉴에 대한 시선은 여느 영부인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넘어섰다. 마크롱 대통령이 15세일 때부터 서로 알아온 그들의 관계는 2007년 결혼으로 더욱 단단하게 묶여졌다. 마크롱 부인은 최근 조롱과 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이전의 대통령 역시도 부인과는 20세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 때엔 별말없던 언론들도 공격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도 부인과 나이차가 상당하지 않은가. 그런 부인을 둔 트럼프의 능력을 치하하던 이들은,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마크롱 부인을 공격한다. 하나는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고 또다른 하나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여성혐오의 행태가 소멸되는 의식수준은 언제쯤 오려나. 한편,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가정하면, 선거과정에서의 무차별적 공격의 소리들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프랑스 대통령 부부의 얘기가 길어졌다. 「대니」를 보면서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크롱 부인의 자녀들은 마크롱을 “대디”라 부른다니 호칭도 유사하다. 대니는  24세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다. 아기를 돌보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렇게 되어 있는 대니는 자신과 같이 아이를 돌보는 예순아홉살의 할머니를 만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마치 마크롱처럼 대니는 할머니를 향한 끊임없는 구애를 시작한다. 친절과 배려를 가득 담은 채. “아름다워요.”라고 말한 것은 시작이었다.  

  대니에겐 할머니의 손주를 돌보는 일은 “견디어 내는 것”으로 보였다. 슬개골연골연화증으로 늘 통증에 힘들어하는 할머니에게 딸과 사위는 떠맡기듯 제 아이를 보내며 할머니의 힘듦을 외면하고 있었다. 땀흘리며 힘들어 하며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할머니의 외침은보육이 특정한 누군가의 ‘희생’의 몫임을 보여준다. 그런 할머니를 향한 대니의 친절과 연민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까. 멈출 수 없는 감정들로 손을 뻗어가는 할머니의 마음 역시도.


나는 수도 없이 대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짓 단호한 척, 명령하는 어조를 골랐던 나를 후회하면서. 그때까지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는 내 늙음을 부끄러워하고, 내게는 없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덩굴손처럼 집요하게 마음을 휘감고 뻗어가는 것에 당황했으나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p45~46


  사십년이 지나도 할머니와 얘기한 것을 기억하길 원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 말하는 이 스물 네 살의 안드로이드에게 필요한 것은 할머니의 농담과 진담 섞인 말에서 튀어나온 ‘돈’. 끝을 짐작케 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단어가 둘 사이에 놓여 둘의 나이차보다, 안드로이드와 사람이라는 차이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사십년이 지나서도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갖겠다던 대니는 사라져갔고, 혼자만 안고 있는 사실에 기대어 할머니는 남은 나날을 견디어 간다.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p47


  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는 어릴적 “공상과학글짓기”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는 기분이다. 명징한 SF라 하기엔 부족한듯하면서도 딱히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색한 이 소설속 세계는 현실과 잘 버무려진 SF 세계다. 세련되고 풍족한 물질의 세계, 자동화 시스템이 펼치는 찬란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공상과학에서 기대한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이다. 여전히 그 세계는 비루하고 비참하다. 그럼에도, 그래서, 관계맺음은 이어지고 단절되고 기억된다.

 「쿤의 여행」과 「루카」처럼 문학상을 받은 대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제 몸을 지배하는 쿤을 떼어내고 새롭게 세상을 마주할 힘을 얻은 「쿤의 여행」속의 나처럼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자신의 그림자같은 힘을 지닌 또다른 존재나 기계를 짊어지고 있거나 마주하고 있다. 「러브 레플리카」의 경 역시도 그러하다 생각된다. 이 소설 속에서 공상과학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배경 속 인물이지만 경과 거식증 이연의 관계에서도 이 모습이 보인다. 결국 ‘경’은 타인의 경험을 제 것인양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실물을 얹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제게 붙은 이 복제품의 실물을 떨쳐내려 한다면, ‘경’만은 실물로서의 복제품이 아닌 타인의 삶을 복제하고 있을 뿐.

  작가가 그리는 이 소설의 세계. SF의 세계. 미지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도 결국은 현실세계의 복제품이다. 잠시 외형이 변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같을까 싶을 정도의 현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감정 역시도 다를 리 없다. 관계들에서 오는 슬프고 아릿한 이 감정의 흔적은, 기억은 그 어느 물적 토대 위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어떤 사람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신은 백 년 전의 어떤 사람들이 느끼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통을 느끼며 통속적인 삶에 매달려간다. 모멸감으로 말하자면 천 년도 더 전부터 이 땅을 흘러다니던 종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 자유로워지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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