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음의 여름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한은형, 문학동네, 2015.



   여름이 작가에게 선사한 것은 무엇이기에 작가는 ‘여름’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까. 장편 소설에서도 계절 느낌이 묻어났는데 단편 역시도 그렇다. 단편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참 이상하게도 여름과 너구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동물들에게 사계절은 존재함에도 너구리가 여름 속에 있는 동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지만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은 아니라 어떤 동물에게는 털이 있는데, 강아지도 고양이도 털이 있지만 여름이라고 특별히 잘 지내지 못한다거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구리가 그 털을 몸에 덮고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라는 하릴없는 걱정을 한다. 이거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쓸데없음의 헌신일까. 참, 그런데 너구리를 본 적은 있던가.

  작가의 등단작이자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인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은 여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미카엘을 만난 그 짧았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꼽추 미카엘을 만난 그 길었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여름은 그런 것인가. 짧게도 길~게도 느껴지는. 나 역시도 시작은 짧은 여름날의 이야기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올 땐 기인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단편집의 소설 하나하나가 짧은 여름을 겪으리라 생각하며 발을 들여놓았다가 푸욱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온 듯하다. 여름 속에서 잠기다 나왔다라… 그 느낌이 결코 맑고 경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여름의 더위에 무료함과 무력함이 겹쳐지는 절정에 있는 것 같다. 무엇에 눈을 돌리려고 하나 열정과는 다른 그 행동의 기저에는 권태가 잔뜩 자리잡아 있다 칙칙함을 한여름의 열기가 말려주는 듯 싶다가도 이내 습기로 흩트려 놓기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현실의 이야기인데 비몽사몽간에 겪은 일인 듯 이야기들이 먼 곳에 있다. 내 주위에서 이러한 이들을 만난다면, 그들과 함께 나는 어떻게 물들어 갈까.

  한낮인데도 작가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잠들어 있는 듯,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잠에 취한 것인가, 술에 취한 것인가.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고 여기서의 일상성을 일반적인 상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모두 사회에서 가늠하는 지위를 무겁게 걸치고서 그들의 언행은 그 무게에 걸맞지 않다. 아니,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래, 사회적 지위란, 사회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직업이란 나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외피일 뿐이고 온전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든 어쨌든 사력을 다해서 그것을 이루었을 것인데 사력을 다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인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그것이 권태와 고독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우스워진다. 하나같이 정형화된 것처럼 일탈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란 성인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어른을 보는 것 같다.


미카엘의 집을 뒤로하고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총소리 같은 게 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34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일들을 겪어서 힘이 들거나 겪을까봐 힘들어 한다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이러한 일들을 겪고 싶어서, 겪지 못해서 힘들어 한다. 그래서 총소리 같은 게 난다면 그들의 삶이 완전한 전환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총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총소리 같은 것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어야 하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누군가를 향해 총은 난사해댈 것만 같은 불길함이 스치기도 한다.

  여름은, 습기 가득 먹은 여름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의 글이 반짝반짝 햇빛을 쪼인 것이 아니라 습기 가득 먹은 여름 날씨 같다. 마냥 그리워하는 일상이 가득한 그들. 그것이 개이거나 로봇이어도, 아니 개와 로봇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커다란 꿈같다”(붉은 펠트 모자, 132)고 하지만, 작가의 소설 자체가 꿈같다. 현실이 아닌 꿈, 한여름밤에 꿀 꿈, 그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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