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를 구별해 내는 것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김근우 저, 나무옆의자, 2015.


   전 재산이 4,264원밖에 없는 경우라면 눈앞에 주어진 일자리를 거부할 배짱은 없다. 그것이 비록 이상할진대, 비윤리적인 것만 아니라면. 사는데 돈은 필요하니까.

  작가 지망생이라 하고 백수라 칭한다. 황당한 일이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을 못 잡지만 같이 일하게 된 여자의 도움과 조언으로 적극적으로 일에 뛰어 들게 된 주인공. 그렇다면 그 여자는? 주식으로 완전히 망한 여자.

  이 두 청춘이 구한 알바는 동네 불광천 오리가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잡아먹었다고 주장하는 할아버지의 의뢰에 따라, 이 망측한 ‘오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동네 하천에 떼지어 있는 그 무수히 닮은 얼굴의 오리 중에서 고양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판별하기 위한 사진을 찍어대고 일당 오만원을 챙기는 이 일은 찝찝한 면은 있지만 시급 만원도 안되는 이때에 괜찮은 알바자리다.

  이야기는 두 청춘남녀가 열과 성을 다해 오리 사진을 찍어대는 이야기만큼이나 왜 노인이 그 오리를 찾는지에 집중된다. 당연 이들은 엮일 수밖에 없다. 오리가 고양이를 먹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괴이하고 괴팍한 노인은 늘 넓은 아파트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아들과의 불화로 홀로 살지만 돈은 꽤 있어 뵈는 이 노인은 도통 제대로 먹는지 알 수 없게 집안은 오물로 난장판이고 노인의 행색 또한 늘 같은 옷만을 입고 있다. 이곳을 드나들며 두 청춘은 점점 할아버지의 이 모습에 개입한다. 쓰레기를 치우고, 먹을 것을 사서 나눠 먹고, 급기야 노인에게 ‘화’를 내기까지.

  노인은 이런 청춘을 ‘해고’하지 않고 그들과 점점 함께 한다. 게다가 물질만능주의가 되어 버린 노인의 손자까지 합세한 이 조합은 나름 가족인 것처럼 애정을 공유해 간다. 사람이 부대끼다 보면 결국 진심은 나눠지게 되는 것처럼. 가진 것이 없는 이들과 가진 것만 있는 이들의 삶이 엉키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는 결국 ‘우리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였다”라고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처럼.

  노인은 고독과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노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로움을 채워주는 것은 오로지 반려동물뿐인 삶을 사는 그들. 다만 그들에 비해 너무나 다른 점이라면, 노인이 가진 재력이다. 그것이 노인의 삶을 달라보이게 한다. 그러니, 피고용인으로서 두 명의 청춘이 노인의 ‘업무지시’를 따르는 것이고 돈이 필요한 손자까지 찾아와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정말로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있는 것인지 점점 궁금해지지만 불어난 불광천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데도 오리를 잡으려는 노인을 보면, 정말인가 싶기도 하다. 이 세명이 노인의 몽타쥬를 토대로 비슷한 가짜 오리를 동물병원과 오리 축사를 돌아다니며 구해와 노인에게 내밀었을 때는, 돈에 대한 욕심은 둘째치고 그런 노인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아, 피쿼드호……. 당신 말은 우리가 다 함께 피쿼드호를 타고 흰고래를 쫓고 있다는 거?

그래요. 그리고 노인은 에이해브 선장.

그 어르신이 에이해브 선장처럼 되게 놔둬선 안 되죠. 우리가 도와야죠.


 과연 오리가 노인의 유일한 가족, 호순이를 잡아먹은 게 맞는가. 맞다면 노인은 원수를 잡아 기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노인은 이제 그동안 자신에게 정을 나눠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것에 호순이를 잃었을 때보다 더한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 시대 외로운 노인의 이미지 외에 또다른 모습을 입힌다. 멜빌의 소설 <모비딕> 속 에이해브 선장이다. 그러니까 허상을 쫓아가던 에이해브 선장의 모습이라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 역시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고양이가 있다면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진짜와 가짜가 확실하게 구분된다면 여러모로 편하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을 판별하는 것을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럼으로써 또한 구렁에 빠지게 한다. 스스로를 작가라 부르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을 비롯하여….


나는 진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남들이 말하는 진짜가 아니라 나의 진짜를 쓰고 싶었다. 나의 진짜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문학 언저리에서 노니는 사람들일수록 장르소설 따위는 숫제 소설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는 잡문인지라 논할 가치도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당당하게 반박하고 싶었고, 실제로 여러 차례 반박 비슷한 것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글을 잘 쓰지 못하면 몽땅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란 말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p45


  이런 모종의 사건들을 겪으며 사람들은 관계맺음을 하고 또한 상처받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그렇게 성장해 간다.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전혀 성장 못하는 인간들도 있긴 하다만. 적어도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엔 그런 사람은 없다. 외로운 노인은 가족과 화해하고 삶의 자신감을 잃은 이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우리는 이미 우리였다. 우리가 너와 나로 분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지만 너와 나가 우리로 결합하는 건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일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그걸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설령 그게 쉽고 간단하다 하더라도 실행하기에는 저어되는 일이었다. p160


  정말 그런 날들이 있었나 싶게 한바탕 헤메이던 오리를 잡던 그 여름날의 시간들은 여기 등장하는 이들 모두에게 미래의 삶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힘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고양이를 잡아 먹은 오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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