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계나’는 어디에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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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다고 외치는 주인공은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 여성의 호주 이민 성공기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왜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했는지를.
헌법에는 행복추구권이 있으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적’과 ‘인종’으로 소속감을 강조하는 시대도 지났다. 그래서 주인공 계나는 마침내 깨닫기를, 자신이 처음에야 그저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가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기 위해서’ 호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자신은 한국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부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이란 나라는 계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는 곳이다.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11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신이 지금까지 충분히 살았지만 한국과는 맞지 않다고 느끼는 이 감정은 행복감과 연결된다. 계나가 느끼기에 한국은 정글 같은 곳이다. 자신은 까다롭긴 해도 정글 속에서 사자와 맞짱을 뜨는 것보다는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그 결심으로 인해 계나가 부딪치는 것은 부모의 반대,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물론이거니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다. 그럼에도 호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별 일을 겪는다. 어찌 보면 호주로 떠날 때 역시 계나는 두려워하고 있었고 호주에서의 생활에서도 ‘두려움’ 없는 미래가 보장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계나는 호주에서 쭈욱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한국이 싫었던 처음의 감정보다 더 적극적인 마음, 보다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이고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보다 호주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보다 재미없다. 책을 덮고 난 후의 첫느낌은 그랬다. 아니, 지금까지도 재밌지는 않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확 끌어안고픈 문장도 없고 구조나 스토리에서 놀라움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은 그토록 인기가 많았을까.
제목. 이 책의 제목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이들 열에 아홉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달고 사는 말. 한국이 싫다! 이 말은 ‘일하기 싫어’, ‘직장 다니기 싫어’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준다. 포괄적이고 아주 아프고 슬픈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싫다니.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나도 다 그런다. 이런, 더욱 기분이 나빠진다. 정말, 정말 문제가 많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 암흑, 구렁텅이에 홀로 있지 않다는 안도감은 더욱 큰 절망감과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이 책이 재미없는 이유는 ‘생각보다’라는 데 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이 처절한 공감의 마음을 내용이 채워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이 싫은 이유보다 더욱 가볍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제목만큼이나 보다 강렬하고 보다 확고하게 어떤 사건을 보여주고 감정을 이끌어주길 바랬건만, 그냥 싱거운 간이 된 국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부분적으론 제목을 통해 사회비판을 국민들의 기분을 대변했다는 데 대해선 공감한다. 그러나 이 짧은 장편 소설을 순식간에 읽혀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통쾌하기보다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기서 통쾌라는 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말함이다. 스토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 보기에 왜 주인공은 지속적으로 어설픈 어퍼컷만을 날리는 느낌일까. 강력한 한방이 아니라.
마치 대화를 하듯 지속적으로 혼자 내뱉는 주인공의 말은 친한 친구가 내게 하는 이야기, 토로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 지점이 그래서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더욱 ‘불편하게’ ‘통쾌하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왜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했을까. 대화 형식으로 하기엔 여성이 훨씬 나을 듯해보였을 지 모르겠다. 대화, 혹은 수다는 ‘여성’에게 좀더 부각된 이미지이니까. 그래서 분위기는 읽히나 한국 사회에서의 20대 후반의 여성이 가지는 고민과 부딪치는 현실문제가 좀더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책 제목이 가지는 무게감에 비해서 내용이 조금 가벼이 여겨지는 탓에 된장녀의 이미지가 조금 드리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20대의 보편적 고민과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처절함이나 치열함이 덜 느껴지는 것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한국이 싫은 이유에 대한 보편적이고 문제 비판적인 흐름에서 계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격과 선택으로 이어져서일까. 한국이 싫다는 데 대한 생각은 비슷할 수 있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난 전자에 더해져 보다 비판적 시각을 원했나보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수많은 “한국의 계나”로 보이지 않고 특정한 “계나”만 보였던 탓이다. 그래서 내겐 제목만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계나를 지지하지 않는 건 아니다. 계나 이상의 계나를 생각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