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 체한 여자


  

   이 책은 대표적인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페미니즘 테제’에 대해 다룬다. 이들을 페미니스트라 불러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이들 여덟 명의 작가이자 사상가들이 당대 사회에서 펼친 페미니즘 논쟁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외쳤던 시몬 드 보부아르, 남녀의 성적 차이를 주목한 뤼스 이리가레, 페미니즘에 관해 과학적 시선을 도입한 샌드라 하딩, 페미니즘적 도덕심리 이론을 주장한 캐롤 길리건, 여성적 글쓰기를 제기한 엘렌 식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로서 페미니즘적 차이의 정치를 옹호한 아이리스 영, 급진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며 ‘퀴어’이론으로까지 확장시킨 주디스 버틀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정치경제학 담론을 제기한 줄리 그레이엄과 캐서린 깁슨.

  우리나라 여덟명의 학자와 교수들이 이들 페미니스트이자 사상가들 주장의 핵심과 문제, 비판, 대안을 이들 생애와 더불어 기술한 책이다. 이론이란 어떻게든 쉽게 이해하려 해도 지끈거리는데 각 사상가들의 사상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고 이들 사상의 문제점과 다른 이들의 비판, 그리고 대안을 잘 설명하고 여러 생각거리를 잘 짚어주고 있다.

  결국 이 모든 핵심 테제들은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이다. 이들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치열한 논쟁으로 젠더 논쟁이 더 활발하게 확산되고는 있지만 그들 시대에 고민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주요한 논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뛰어넘어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노력, 성적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음과 생각들이 이들이 이러한 테제를 생각하게끔 했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논쟁.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도 없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어 논의가 전개되고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의 존재’만한 것이 또 있을까.

  당혹, 분노, 좌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항해케 하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중구난방 확장되는 이야기 중에 제법 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린다. 쉽게 건너뛰지 못하고 시선이 머무름은 일차적으로 내 탓이긴 하지만 본질과는 다른 접근에 내 분노의 수위가 분산된다. 더 힘을 쏟고 모으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난제 앞에서 누군가 자꾸 문제를 희석시키는지. 이와중에도 어의없는 편가르기와 ‘어그로짓’에 재미들려 걸신들린 듯 하는 이들의 행태가 여당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저질러 놓은 일이 하루하루 흘러 넘쳐 폭발할 지경에 이른 2016년 현재, 분명 지금 한국인의 관심은 대통령과 최순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사건이 폭발한 시점부터 여러 날이 지나 감각에 무뎌질 때도 됐을지 모른다. 어디까지 해쳐 먹었니라고 할 건들은 반복적으로 종류만 다르게 해서 나타날 것이고 불통, 악랄함, 공감능력 결여를 넘어 무능과 멍청이, 칠푼이, 꼭두각시 대통령의 이야기는 더욱 축적되어 가고 알면서도 모른체한 인간들에게 또 속아 저런 것들에게 정권을 맡겨 아름답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 한 반푼이 국민이 된 상처가 결코 아물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을 이 판국에.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이 설쳐서라니! 그래서 앞으로는 여자 대통령은 뽑아서는 안된다라니! 역시 여자는 안된다라니! 정권에 아부하고 또는 조종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이권에 매달린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수두룩하게 많은데, 왜 유독 특정한 ‘여성’ 정치인들만을 골라 잡아 여자라서 저 모양이고 여성가족부가 문제라는 말이 기승전-결로 이어질까. 대단하게도 이 세계를 뒤흔들고 말아먹는 역할을 담당한 건 남자들이었음에도 특정한 몇몇의 ‘악녀’들을 선정해 잘 굴러가는 나라와 남자를 망하게 했다는 오물은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명백히 남성과 여성의 성차이는 있다.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이 고정된 이미지와 성차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되어왔으며 차별이 아닌 차이, 다름으로 인정하자고 흘러 왔다. 이 차이는 다름이지 능력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에.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힘’의 사회에서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공감’의 사회변화에 따라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는 분야가 자본주의 사회에 더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서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였나? 애당초 ‘여성’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딸’에 더 방점을 둔 선택이었고 호도였다. 아마도 아들이었으면 추종세력들에겐 더 좋았을 것이다.

  지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는 그 자신이 가진 성별 특성의 능력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무성적 존재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혼이기에 여성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기대한 바 없었다. 만약 그녀가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미혼이라는 점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장애로 작용했을 것이다. 왜냐, 한국사회는 ‘미혼 여성’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더 정확한 말로 아직 ‘애’라고 생각하는 나라니까. 남자의 보살핌 속에서 그 역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니까. 그랬던 시절이 뻔한데 왜 새삼 ‘여자’란 탓을 하는가. 애당초 여자란 것을 알았음에도 ‘모른 체’ 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듯 ‘여성’임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여기다가 왜 ‘여성’이라고 화를 내는 것인지. 문제를 일으켰으면 잘못된 행태에 대해 비난하고 비판해야 하는데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일들이 설명된다는 듯한 말과 비아냥에 오히려 그동안 대통령이 저지른 짓이 묻힐까 안타까울 정도다.

  먼 나라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려는 시점이니까. 하지만 국정수행을 잘못했을 경우 나올 말은 여전히 ‘여자’라서 안 된다에서 ‘역시 여자라서 그것밖에’ ‘여자는 안돼’라는 말일 것이다. 국정수행을 잘못한 무수한 남성 대통령에게 ‘오, 남자라서 안 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여성 전체로 매도하는 이 습관적 여성 차별은 뼛속 깊이 DNA에 박혀 있는 것일까,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것일까.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지금의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똑같은 이야기가 몇백년, 몇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이란 주제 하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끔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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