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만남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계획없이 목적없이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 떠난 여행자들은 때가 되면 귀환한다. 삶에서 얻은 것들을 삶의 뒷전에 놓아두고, 검고 어두운 어머니의 계곡으로부터 잃어버렸던 자아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새로운 생각과 깨달음은 기존 사회의 ‘서릿발 같은 증오와 심문’과 맞서야 한다. p444


  개정판에선 윤광준 사진가의 사진이 더해진 떠남과 만남은 저자의 남도여행기이다. 초판은 2000년이니 그 무렵의 어느 즈음에 여행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 즈음 저자는 2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오랜 시간 직장인으로서 살아온 저자에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IMF 이후로 자발적 퇴사보다는 어떡하든 직장인으로 살아남으려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가. 그런 만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많은 고민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때의 여행은 마냥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는 여행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를 다지며 미래를 위한 결심을 다지는 여행, 저자는 오랜 직장인으로서의 관습과 결별하겠다는 의미로 여행을 시작했고 다시 보내게 될 새로운 인생은 일에 매달려 바쁘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단언하건대, 비효율적으로 한 달반을 보내게 될 것이다. 쓴 만큼 못 얻는다는 것이 비효율의 정의다. 일주일에 다섯 군데밖에 구경하지 못했다면, 같은 시간에 열 군데를 둘러본 사람에 비해 얼간이 같은 짓을 했다는 뜻이다. 나는 얼간이가 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인생이다. 산다는 것이 바로 목적이다. 인생이 전부 경제와 경영일 수는 없다. 사랑도 해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 한다. 순수한 배운 자체는 즐거운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다.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 가장 고독하지 않다. 이제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지리적 오지란 별로 없다. 마음속의 오지가 더 넓다. 나는 나와 함께 있을,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움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간다. 나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쓸 예정이다. 햇빛이 들과 밭에 내리듯이. 산과 강과 바다에 쾅쾅 쏟아지듯이. 거기에 무슨 효율이 있는가? p19


  찬기와 따스한 기가 공존하는 3, 4월의 남도. 봄꽃이 나와 흔드는 길 위의 여행, 아무 계획도, 행선지조차 없는 여행은 50일간 지속되었다. 그 50일은 저자가 자신에게 주는 휴가였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10년의 휴가, 한달. 그리고 20년 일한 뒤의 두 달의 휴가. 기차표는 구례까지였다. 그러나 순천이든 곡성이든 저자는 어디든 내려도 상관없었다. 저자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발길 닿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기억을 따라서 혹은 그저 기대를 따라서, 혹은 꽃을 따라서….” 어쨌든 구례역에서 내렸나 보다. 섬진강이 이 책의 첫 시작인 것을 보면.


  꽃잎이 날리는 길을 따라 취한 여행길은 어느덧 옛사람의 정취를 느끼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 해남 두륜산과 강진, 다산초당에서, 그리고 고금도 충무사에서 그는 옛사람들의 정취에 그리움 한가득 담아 온다. 그들이 남긴 발자취에서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며 반성과 다짐이 반복되는 진중한 여행. 역시 사람의 향취가 드리운 여행의 모습이다.  

  다시 바다와 바람이 이어진 길들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서 바다를 즐기는 법을 배운다.


바다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푸른빛을 음미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철썩거리며 들어오고 다시 빠져나갈 때 작은 갯돌들이 구르는 소리가 난다. 저쪽 구석에서 먼저 부서진 파도가 내는 소리를 듣고 이어 다시 이곳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좋은 음악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파도가 싣고 오는 바다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는 것이다. 바다의 채취는 바람에 실려 온다. 그 속에는 미역, 김, 파래, 톳 같은 것들의 싱싱함이 담겨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지금처럼 눈을 감고 누워 손가락을 조금씩 꼬물거려 갯돌들을 더듬어보는 것이다. 매끄럽기 한량없다. 조금 거친 것들도 있고, 완벽한 매끄러움으로 손가락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도 있다. 또 있다. 간혹 바다가 만들어주는 소리들에 가벼운 변주를 더해주는 것이다.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갯돌을 누운 상태에서 하늘로 던지는 것이다. 잠시 후 바다에 퐁 빠지는 그 소리는 연주회에서 간혹 들리는 탬버린 소리처럼 경쾌하다. p179


 장환의 일몰, 잊혀지지 않는 천관의 초야, 아름다움이 가득한 천관산을 여행하고 마치 바다와 바람에 몸을 맡긴 듯이 정말로 계획과 목적 없이 떠난다. 섬으로 섬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계획 없다 하여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목적이 없다 하여 허무를 품지 않는다. 보길도, 완도, 장도, 완도. 남도의 섬에서 그가 마냥 섬이라 고립과 외로움을 얻어 왔겠는가.


줄곧 혼자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독 속에 누군가 며칠 다녀가고 다시 혼자가 되면 그때는 허전해진다. p74


  여행이란 떠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의 귀환은 어떤 변화와 함께였을까. 그가 잃어버린 자아와 되찾은 자아는 이제 이어갈 삶에서 어떤 형태로 그를 다듬어 가게 될까. 여행은 떠남이고 만남이다. 그것은 장소와 사람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생각과 생각들도 포함된다. 익숙했던 관성에 따랐던 것들을 어떤 식으로 떠나보내었을지. 왜 그것들을 보내고 새로운 생각들에 나를 담그게 되었는지, 여행은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만든다.

 

한 달 반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버리고자 했던 다섯 가지를 버렸는가? 아침의 면도, 대낮에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 지위에 대한 압박, 월급이 주는 안심 그리고 인생에 대한 유한 책임.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닌지도 모른다.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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