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쉽Blue Sheep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4편의 장편소설을 탈고하고 한국문학계에서 특히 장르소설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정유정은 열심히 달려온 만큼 탈진 상태에 이른다. 헛헛함과 허망함을 뛰어넘어 작가로서의 공포까지를 느낀다. 욕망이 결여된 상태에 놀란 작가의 처방은, 여행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여행도 아니고 돛단배 띄어진 풍경을 바라보는 휴양도 아니라, 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것.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외치며 작가는 안나 푸르나를 향해 마음을 굳힌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떠오른 생각인지 오래 내재한 꿈이었는지 모르지만 작가는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나푸르나를 가기 위해 돌입한다. 일단, 작가는 그곳을 혼자 가기는 주저한다. 여권도 없었던 해외여행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여행 일정을 알아보는 것도 여행 채비를 꾸리는 것도 모두가 낯선 경험인 작가는 동료 작가이자 어린 김혜나 작가를 파트너로 17일간의 안나푸르나 환상 종주를 떠난다.

   이 17일간의 안나푸르나의 여행은 장엄하고 낭만적일 듯 보이지만 정유정이 겪고 기록하는 이 여행의 기록은 서투른 여행자의 당혹스런 경험에 대한 일기이다. 글을 읽다 보면 작가로서의 느낌이 아니라 처음 가는 여행에서 난관에 부딪히며 힘겹게 안나푸르나 일정을 마친 이야기를 고생스럽게 늘어놓는 ‘아는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느껴진다. 문학적이고 진지한 느낌보다는 좀더 발랄하고 막상 첫 여행에서 내가 겪으며 어떡해야 할지 몰라 울상짓는 이야기를 보게 되는 것만 같다. 낯선 여행지에서 겪는 자잘한 병치레들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웃음터지는 일들이 엮인 이야기다. 뭔가 어리버리하면서도 결국엔 세계 최고의 히말라야 안나 푸르나의 봉우리를 넘는 이 트래킹 일정을 소화해내는 작가의 집념은 놀랍다. 작가는 자신의 용기는 늘 절박함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토록 작가에게 글을 쓰는 일이란 안나 푸르나, 그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는 일과 비견되는 것이었던가.

   네팔 히말라야 산맥의 안나 푸르나. 유명한 산악인들이 즐겨 이곳을 찾았고 힘겨운 트레킹 코스로 알려진 이 곳은 맞닥뜨리게 될 아름다운 풍경에 그 모든 힘겨움을 이겨내고 힘을 얻게 된다. 해발 5,416미터의 쏘롱라패스가 마의 지역이라 불리는 곳이고 많은 이들이 고산병에 힘들어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저 막연히 작가가 이 책을 내었을 땐, 이 곳을 통과해 코스를 마쳤으니 당당히 책을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긴 했지만, 작가가 이토록 어설픈 여행의 경험자이자 소소한 예민미를 가진 약체력인 줄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처음의 여행에 낯선 곳에서 맞닥뜨린 것은 자연에 대한 경이를 뒷전으로 하고 그 일정을 소화해내는 여정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사건’들이 경치에 대한 무한한 찬사와 감상보다 괜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같이 힘든 코스를 등반하며 그 경치를 감상하는 기분이 되었기 때문일까.

   작가는 17일간의 이 여정을 세세히 기록한다. 안나푸르나의 일반적인 트레킹 코스의 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같이 등반하는 기분이 된다. 힘들게 오르며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일들이란 마냥 힘들다, 죽겠다가 아니다. 그런 속에서도 머릿속으로는 하염없이 무언가를 미지의 어떤 것들, 과거의 일들, 그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그 여행을 떠나 그 속에 있는 작가는 작가대로, 글을 읽는 이는 읽는 그대로.

손 전체가 짙은 보랏빛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저체온증에서 온 말단청색증이었다. 그대로 두면 동상이 되고, 심화되면 절단해야 하는 위험한 징후였다. p175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작가의 육체적인 고통을 인지하면서 내가 저 상황이라면 끝가지 안나푸르나를 종주했을까를 질문하게 된다. 어떤 상황을 가정한다고 해서 막상 닥쳤을 때 그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생각을 해본다면 나 역시 놓치고 싶지 않은 일이란 생각을 하면서 꾸역꾸역 산을 올랐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상황에서 따라야 할 것들과 더 우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긴 하겠고 그것들을 잘 조율해야 하겠지만.

   또한 모든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긴 하고. 하지만 의지라도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며, 무엇을 할 게 있을까. 작가는 여행에서 "블루 쉽(Blue Sheep)"을 만난다. 4000미터 이상 고지대에만 산다는 야생 양으로 경계심이 많아 사람 눈에는 좀처럼 띄지 않는 신비로운 동물이라는데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의 앞길에 행운이 있을 거라는 안나푸르나의 계시라고. 작가의 의지와 계시가 서로 맞물려 아니 작가의 의지가 계시를 이끌어낸 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있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 어둠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인생과 싸우는 법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p133

 

   작가는 여행에서 확신을 얻었다 말한다. 자신을 지치게 한 것이 삶이 아니었다고. 자신의 본성은 싸움닭이었다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죽도록 덤벼들겠다는 다짐을 하며 새삼스럽게 처음 여행을 떠날 때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이다. 많은 이들이 놓는 것을 배우고 편안함을 배우고 삶의 여유를 여행에서 얻었노라 하던 것을 생각하면 작가의 결론은 의외다. 작가에 대해 잘 모르니 의외라고 할 것도 없긴 하다. 어쨌든 작가는 오히려 힘이 남아도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곳에서 병을 얻어왔다. 이름하여 네팔병. 누구나 여행에의 경험은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자신을 새로이 발견하고 온 이 여행을 그리워하고 생각할 것임을 의심치 않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앞으로 쓰게 될 작가의 이야기 속에는 이 여행에서의 경험과 감상들이 은은히 배어날 것이다.

 

‘네팔병’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한 번 히말라야에 다녀오면 반드시 또 가고야 만다는 불치병이란다. 여정의 험난함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로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만나는 특별한 순간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산병만큼이나 흔하게 걸린다는 이 지병에서 나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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