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내더라도 핀란드까지!
박정석,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동네 미장원도 일년 넘게 못 가고 있는데 핀란드에 간다니.“
게으른 자는 여행 또한 귀찮음으로 인식한다. 작가의 저 말이 와 닿는 속에 책 속의 사진은 나룻배가 놓인 호숫가를 보여준다. 냉큼 이런 나룻배가 있는 풍경은 창녕의 우포늪이랑 비슷하네라며 핀란드, 해외를 국내의 풍경과 일치시키는 기술을 구사한다. 하지만 점점 다른 나라의 모습을 국내의 지역으로 대치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게으른 자가 국내라고 발빠르게 움직이길 했겠는가. 사진 속 북유럽, 핀란드의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습기가 쫙 빠진 상쾌함이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난 뒤 따르는 알싸한 쾌감이 뒤따른다.
북유럽에 대한 동경, 핀란드에 대한 동경을 떠나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라는 제목이 맘에 들었다. 여행이란 들뜨는 일이기도 하고 야심차게 준비했다 한들 기력이 쇠해지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으며 정신이 뭉개지기도 하니까. 생각하고 기대했던 만큼 즐겁지 않다면 일정에 치이게 되면 어느덧 일상처럼 화가 차오를 터이니, 현실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여행이란 뒤돌아 그 기억을 감상하는 것이다 보니 좋은 것들을 취사선택하지만 막상 그날을 겪고 있는 중엔 짜증나는 요소도 곳곳에 발견하게 될테다. 그래서 작가는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갔나? 작가가 핀란드까지 가는 여정에 화가 나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작가는 “동물로 태어난 생명의, 소위 식물화 현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무기력과 게으름으로 퇴행하며 지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조언 중 여행을 떠나라는 충고를 새겨듣는다. 당장은 귀찮고 싫고 무서웠지만 결국 여행을 떠나게 된 작가는 핀란드를 선택한다. 끌리지 않음에도 핀란드를 선택한 건 안하던 것을 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두려움의 근원을 밝히는 여행, 편견을 극복하고 취향을 넓히고자, 그렇게 핀란드는 작가에게 선택되었다.
귀차니즘의 절정에 있었음에도 핀란드로 가기 위한 작가의 여정은 핀란드와 대척점에 있는 터키에서 시작한다.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발트3국을 지나 핀란드에 도달하는 2,300km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에서 작가가 결심하는 것. 절대, 화내지 말 것.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은 작가의 이 여행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무살 시절의 여행가였으니까. 그래서 이 여행기는 장소는 다르지만 지난 스무살 시절의 여행의 기억과 동반한다. 그 시절의 여행은 여행초보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힘찬 발걸음으로 달리는 여행이었다. 작가는 명소와 가이드북에 의지하며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안달하는 여행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기 때문인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핀란드를 향하는 이 여행에서 작가는 전과 다른 느낌들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영화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고 소설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이 여행기에서 나타나는 듯하다. 이 여행기는 조금은 수다스런 기분이 들기도 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여행을 떠나는 시작에서도 그렇듯이 사람들과의 대화가 자주 등장하면서 핀란드의 모습들을 전하는 것이 이 여행기의 특징인 듯하다.
어느 여행이 그렇듯이 여행기 속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전달받고 의미를 되새긴다. 여행의 모든 장소가 감탄할 곳은 아니다 보니 몸이 지쳐갈 때면 스피드하게 국경을 넣고 경유지를 지나치며 모든 것을 ‘핀란드’에 집중한 이 여행기의 절정은 역시 핀란드이다. 많은 이들이 북유럽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백야와 호숫가의 풍경들. 그것들과 마주하는 작가의 심정이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매우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여행은 핀란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와 다시 기억하는 순간을 맞는다. 사람들과 마주쳤던 기억과 황홀함에 빠졌던 장소에 대한 기억들은 작가가 맞닥뜨린 소중함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이 같은 여정을 떠난대 해도 내게 닥칠 기억은 아니다. 어디어디에서 누구는 이런 경험을 했다던데는 특정한 물건을 판매하는 이들의 서비스 자세에서나 똑같이 반복될 것이고. 작가가 말하듯 그 때 그 장소에서 스쳤던 바람소리, 사람들과의 만남은 온전히 작가의 것이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은 소소한 것들, 설명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것들,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몇 가지다.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눈과 귀, 피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들.
바싹 말라 보기보다 아주 쉽게 불이 붙고 놀랄 만큼 화력이 세던 자작나무 장작.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빛은 물론 잔잔한 정도 또한 하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던 호수와 물풀, 들꽃, 덤불. 하늘을 향해 똑바로 뻗은 채 가느다란 가지에 앙증맞은 초록 잎사귀를 가득 달고 있던 하얀 숲. 평화 속에 어쩐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도시의 인적 드문 거리. 언제 들어가도 붐비는 일이 절대 없던 슈퍼마켓. 한밤중에도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청색 하늘.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도 술술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젊은이들. p363~364
한 사람의 여행의 기억도 이토록 변화무쌍할진대 사람들마다마다의 여행의 경험은 얼마나 다채로울까. 이토록 여행기가 넘쳐나는 것 역시 그 경험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감흥이 발산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여행기를 보는 사람들도 같은 장소를 여행했다는 데 것뿐만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 경험치 못한 것에 대한 공유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경험을 내 피부로 느끼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서도 여행이란 쉽게 훅, 떠나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여행사를 통한 잠시의 관광이 아닌, 걷고 걷고 또 걸으며 몇 달에 걸친 여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