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우리


   

  애완의 시대라니. 뒤에 ‘동물’을 붙이는 것이 가장 널리 활용된 예라 이 ‘애완’이란 단어 속에 왜인지 ‘길들임’이라는 말이 내포된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무엇을, 왜, 애완의 시대라고 말하는 건가.

  두 명의 저자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녀들을 애완의 ‘자식들’이라 말한다. 그들은 부모들에 의해 돌봄과 배려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행복하게 이 돌봄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조금만 어려워도 힘들어하고 스스로 삶의 길을 나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제껏 부모들이 알려준 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안정된 삶을 길어 올리지 못하자 부모세대에 분노한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신들이 그 빈곤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해준 것’에 보상받지 못하고 외면당하자 분노한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씨름하는 것,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리인’의 삶이란 이런 질문을 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리인의 삶은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주인의 의도를 이뤄내는 것이니 말이다.

 대리인의 삶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주인의 의지대로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애완견과 다르지 않다. 애완견은 나이는 먹지만 성장하지 않는다. 애완견은 보살핌은 받지만 존엄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길러졌으며 그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서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미숙함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부모처럼. p72~73


  인류학자 진 리들로프는 “사회에 세대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신호”라고 보았다. “어린 세대가 그 사회의 어른처럼 되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삶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상실했으며 문화라고 부를 만한 문화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곱씹으면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이 상황에서 한국은 제대로 된 ‘문화’가, ‘가치’가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부모 세대는 ‘빈곤’으로 가로막혀 인권도 배려도 함께 살아가는 것도 잊은 채 살아왔다. 배불리 먹기 위해 ‘순응하는 국민’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일구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꺼이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자신들 또한 전쟁과 빈곤 속에서 보내면서 오로지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에 주시하였기에 궁핍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빈곤을 벗어난 삶에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한 채 제가 살아온 삶만을 고수하며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부모”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살아온 전쟁과 빈곤과 경제성장과 산업화 시대라는 ‘애환의 역사’에서 그들은 국가의 착취에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을 원한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원한 것은 더 많이 가진 삶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풍요로운 재산이었지 풍요로운 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은 배려심이나 삶의 기품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더 힘센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그런 사람을 숭배하고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보호받는다고 믿는다. p22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 부모 세대도 자식 세대도 서로에게 겨누는 날카로움만큼의 정신적인 성숙을 지녔다. 결국 모두가 애완의 세대 애완의 자식이 되었다. 애완이 애완을 되물림하며 풍요로운 정신적 문화를 물려주지 못함은 지난 대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 사상적 빈곤이, 과거의 길들여짐에 익숙한 정신이 미래까지 과거 속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고 저자들이 묻고자 하는 바다. 애완은 결코 의문을 갖지 것이므로.


우린 여전히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밖에서는 우리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린 여전히 ‘지배받지 않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개발이나 성장 말고는 미래를 말하는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손쉬운 대안이나 전망을 바란다. 결국 우린 낡은 시대의 한계를 모두 확인한 다음에야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p235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애완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그것은 애완과 애환의 과거를 끊어내는 일이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는가? 그 답은 명확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 이제, ‘길들여짐’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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