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계속된다


  모험은 그의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운이 그의 의지와 병행하며 때론 뛰어넘어 그와 함께 했다. 이제 막 백세 생일을 맞이한 알란이 살아온 100년의 역사는, 그의 역사이자 세계사였다. 그런 과거를 지닌 노인이었기에 알란은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지 않는다. 다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기로 한다. 새로운 세기의 새 인생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알란은 양로원 창문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산책이라도 가는 마냥 슬리퍼를 신고서. 그렇다. 알란은 산책을 가듯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남은 생을 보내리라 다짐한다.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p271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 이미 겪었듯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진 않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알란은 새로운 상황에 휩쓸린다. 의도치 않은 상황에 당황할 법 한데도 알란의 행동들은 여유가 있다.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노인은 자기가 왜 트렁크를 훔칠 생각을 했을까 자문해 보았다. 그냥 기회가 왔기 때문에? 아니면 주인이 불한당 같은 녀석이라서? 아니면 트렁크 안에 신발 한 켤레와 심지어 모자까지 하나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 중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뭐, 인생이 연장전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따금 변덕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그가 좌석에 편안히 자리 잡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p15~16 


  현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까를 지켜보는 맛은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놈의 트렁크 속에 든 ‘돈’을 찾으려는 자들과의 추격전이다. 과연 이 거금을 가진 알란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그 무리들에게서. 하지만 이 대결은 코믹의 극대화처럼 알란에게 연승을 안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알란과 알란의 친구들은 이 무리들을 완벽하게 사고로 ‘처리’하니까. 하지만 이 황당한 전개보다 더 황당한 전개는 알란의 과거 행적이다. 그는 전세계의 역사적 현장에 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한 행동과 말들이 오늘날의 이 현대사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알란이 1905년생이니 그가 지나온 시대에는 이데올로기와 전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알란 때문이기도 하다. 알란은 폭탄 제조 기술을 터득했고 폭탄 터뜨리는 일을 잘 활용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이 폭탄 덕분에 프랑코 장군을 살리고, 미국 과학자들에게도 핵폭탄을 만드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냉전과 이데올로기 시대 각 나라의 지도자, 정치적 인물들과 엮이며 그들과의 친분 또는 미움으로 목숨을 유지하기도 하고 노역을 당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사건과 사고 속에 휘말리는 알란의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려서도 낙천적인 알란의 성격이 그의 생을 좌지우지하는 듯하다.


자기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힘든 분쟁은 대개 "네가 멍청해!" "아냐, 멍청한 건 너야!" " 아냐, 멍청한 건 너라고!"라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둘이서 보드카 한 병을 함께 비우고 나서 앞일을 생각하는 거란다. p256


  알란은 <우생학적이며 사회학적인> 이유로 거세당했다. 우생학적인 이유라면 알란은 약간 저능아라는 것이고, 사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사회학적인 이유일 것이다. 알란의 몸에 아비의 유전자가 너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칼손 집안이 번식하게 놔두면 안 된다는 국가의 진단. 알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알란 아버지의 신념은 흔들리고 있었고 조그만 땅을 소유하며 레닌에게 맞서다 사망했다. 어쩌면 알란이 옳았는지도 모르다. 정치는 복수와도 같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걸. 그래서 결국 최악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아이는 자라나 어른이 되었고, 부모의 의견에다 자신의 의견을 첨가했다. 그것이 공산주의자건 파시스트건 인종주의자건 자본주의자건 간에, 어떤 정치적 신념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았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과일 주스를 마시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에는 여전히 동감이었다. 또 사람이 가끔 술을 한잔할 수는 있지만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에도 공감했다. p178


  알란은 정치적 견해도 종교도 가지지 않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확고한 믿음과 신념보다 알란의 견해가 목숨을 유지하는데 더욱 필요한 처방이었을지도. 아니면 그것이 알란이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인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로 인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에겐 정치적 견해보다 그 당시의 상황과 인간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으니까.

  

사물을 폭파시키는 것과 사람을 폭파시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만일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면, 다이너마이트로 그걸 반으로 쪼개 버리면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거기 서 있는 게 사람이라면, 그냥 잠시 옆으로 비켜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p50


  그래, 거기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때로 정치는, 어떤 정치가는 거기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그들에게 부탁하는 일을 너무나 어려워한다. 아니 싫어한다. 그저 길을 막고 있는 바윗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알란이 지나온 그 시간들 속에, 사람을 바위로 인식하는 인지장애의 정치인들 덕분에 여전히 이 역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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