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에게 전하는 메시지
프레드릭 배크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소설 속 아이 엘사는 낯설지 않다. 이제 동화,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엘사와 같은 아이는 독창적이지 않고 전형적으로 느껴진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생각 있고, 생각 많고, 감수성 있는 아이. 그래서 또래 아이들에게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는 엘사의 할머니다. 사람들은 할머니더러 미쳤다고 하지만 엘사에겐 조금 엉뚱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엘사는 할머니를 천재라 말한다. 할머니의 과거를 보니 의사로 일하면서 상도 받았고 전세계 구조가 필요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살리고 악의 무리와 싸웠다. 그래서 또한 엘사에게 할머니는 슈퍼 히어로다. 그리고 항상 엘사의 편이다. 또한 엘사에게 세상에서 각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니까 엘사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럴듯한 이야기들은 전부 다 미아마스에서 생겨난다. 깰락말락나라의 나머지 다섯 개 왕국은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다. 미레바스 왕국에서는 꿈을 지키고, 미플로리스 왕국에서는 슬픔을 저장하며, 미모바스 왕국에서는 음악을 만들고, 미아우다카스 왕국에서는 용기를 만든다. 미바탈로스 왕국에서는 ‘끝없는 전쟁’에서 무시무시한 그림자들과 맞서 싸운 용맹한 전사들을 양성했다. p29~30
다만 지금은 문을 열고 볼 일을 보고, 말을 과격하게 하며, 전도하러 방문하는 이들에게 페인트 총을 쏘아대고, 경찰에게 똥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병원을 탈출하기도 한다. 기억해야 하는 일을 벽에다가 적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성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고장선생님을 향해 지구본을 던질 줄 아는(결국 던지지는 못했다) 성격이기도 하다.
교장선생님은 할머니의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의도로 엘사의 눈을 멍들게 한 남자아이에게 “겁쟁이들이나 여자를 때리는 거야”라고 얘기했지만,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조금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겁쟁이들이나 여자를 때리는 거라니 말이 됩니까!” 할머니는 교장선생님한테 고함을 질렀다. “여자를 때리면 쓰레기가 되는 게 아니라 아무나 때리면 쓰레기가 되는 거요!”p98
이런 전형적이지 않은 엘사의 할머니는 소설 속 주인공으론 익숙하지만 또래아이들과는 다른 엘사와 만나 시너지를 낸다. 이런 할머니가 한국에 있다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할 것이고 당장 정신병원이나 경찰서 행이 될 거다.
할머니는 정신병원과 경찰서가 아니라 하늘나라로 갔다. 엘사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지만 할머니가 보낸 편지를 발견하며 조금씩 마음을 치유해 간다. 할머니가 남긴 편지들은 엘사와 할머니가 살던 아파트 거주 주민들 모두에게 띄운 것이고 이 편지로 인해 할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얘기하던 판타지 동화의 세계처럼 아파트 사람들의 사연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감정적으로도 더 가까워진다. 그들은 모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고 여전히 그 아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p329
그런데, 할머니가 남긴 편지는 무슨 내용이었나. 그저, 할머니는 미안하다고 전해달랬다. 할머니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도 미안했던 것일까.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할머니와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래, 할머니는 엉뚱한 사람이고 슈퍼 히어로니까.
현실 세계 속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슬픔과 상실감과 심장 아리는 고통이 “시간이 지나면 차츰 가시겠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슬픔과 상실감은 변함이 없는데, 그걸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슬픔으로 마비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슬픔을 가방에 넣어서 두고 올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선다. p330
마침내 할머니의 ‘미안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도 할머니는 엘사와 마찬가지로 슈퍼 히어로니까. 할머니는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상처를 겪는 현장에 있었고 그곳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었고 이끌어 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할머니는 엘사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더 이상 그들을 돌보아 줄 수 없다. 그들의 아픔을 알아주는 이는 이제 없다. 어쩌면 할머니는 너무나도 그들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영원히 그들의 아픔을 공유할 수 없는 할머니인데. 그러니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할머니는 그들이 그들의 아픔을 어딘가 두고 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니까.
인간은 관심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거든, 엘사. 누가 뭐에든 신경 쓰기 시작하면 너희 할머니는 ‘잔소리’로 간주했지만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어. 그냥 존재하는 거지……. p493
또한 자신이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삶에서 할머니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말.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들도 이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브릿마리가 읊는다. ‘그게 안 되면 존경해주길. 그게 안 되면 두려워해주길. 그게 안 되면 미워하고 경멸해주길.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우리의 영혼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무엇에라도 접촉하길 갈망한다.’ p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