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친절


 정세랑, 은행나무, 2014-12-24


   삼남매는 곧 헤어질 시간을 앞두고, 여행을 떠난다. 각자의 인생을 위한 길이 있기에, 그 길이 서로 다르기에 떨어져 있어야 할 시간. 그 헤어짐의 시간을 앞두고 형제애를 다지고 싶었던 것이라 해두자. 유난스런 말과 행동도 없고, 왜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는 듯 뚱하게 혹은 무신경하게 한 차를 타고 가는 삼남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특별히 끈끈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는 사이. 그래서 유난스럽지 않은 그들의 여행은 ‘각자 해수욕을 하고, 모기에 시달리고, 해산물을 먹는’ 코스로 이루어진다. 돌아오는 길엔 배고픔에 서둘러 미묘한 형광색을 띠지만 표준적인 바지락 칼국수를 사먹으며 머릿속으로는 얼른 각자의 일상으로 빨리 복귀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이 재인, 재욱, 재훈이 함께 한 휴가다.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된다. 사실 가족이라 해도, 형제들이라 해도 같이 살고 있지 않다면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들 남매 역시 그렇다. 재인은 대전으로 재욱은 아랍의 공단에 파견을 갈 것이다. 재인과 열 세 살, 재인과는 열 살 차이가 나는 고등학생 재훈만이 서울에서 엄마와 산다. 작은 실수에도 폭언과 때론 극적인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와 함께. 사고가 난 적 있는 재훈은 그 이후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계속 신경을 쓰는 걸 어려워한다. 오죽하면 중요한 말이나 중요한 일에 다른 색깔로 표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재훈이었다. 그들이 알아챈 것은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다. 재훈은 자기 마음대로 엘리베이터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재인은 손톱이 부러지지 않았다. 재욱은 시야가 이상했다. 붉어지는 것이다. 아랍의 플랜트에서 일하는 그에게 설계와 설계 사이설계와 실제 사이 간극이 클수록, 잘못 시공되었을 때, 위험이 클수록 시야가 붉어진다. 마치 트러블 감지기가 내장된 것처럼. 그리고 그들에겐 이상한 소포가 배달되어 왔다. 누군가를 구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초능력이라기엔 미미한 이 증상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으며, 누구를 구하라는 말인가.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던 재인은 실험실 사고가 빈번하니 손톱을 배양한 판을 만들어 실험실 사람들의 옷에 넣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재인이 도움을 준 이는 자신의 룸메이트였다. 스토커로부터 공격당하던 친구에게 손톱을 활용하고, 강하고 단단해진 자신의 손톱으로 사고로 아파트에서 추락하던 엄마를 구조하기도 한다. 교환학생으로 조지아 염소농장에 간 재훈은 환각 버섯을 먹은 총을 든 이들로부터 친구 세 명을 구한다. 심지어 그들은 재훈을 괴롭히던 아이들이다. 재욱은 전쟁에 의해 고아가 되고 인신매매단으로 끌려갔을지 모를 두 아이를 구한다.

  이들 애틋하지 않은 세 명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각자의 경험을 떠벌이지 않는다. 그저 히어로 영화를 나누며 담소하며 각자의 생각에 빠질 뿐이다.


 “이 영화가 재미없는 건 맞는데,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욱이 말했을 때 재인과 재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p164


  세상에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이들 세 명처럼 그래도 ‘어떤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 일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 내게 ‘넌 누군가를 구해야 해’라는 사명감을 심어준다면 나도 모르게 언제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도대체 뭐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미미한 능력이나마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그래, 그런 것이 마음가짐 아닐까 싶다.


  그간 일어난 일에 대한 제 나름의 납득도 다 달랐다. 재인은 먼 미래에서 경아의 후손이 일을 도모했을 거라고 믿었고, 재욱은 사막에서 잘 보이는 별에 있는 다른 문명에서 온 신호라 여겼고, 재훈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바지락조개를 의심해서 해양과학 쪽으로 진학할까 고민 중이었다.

 여름에 시작되어서 겨울에 끝난 삼남매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삼남매는 가끔 동시에, 혹은 조금 어긋난 순서로 생각하곤 했다.

 이 모든 일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p166~167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무심한 듯한 이 삼남매의 짧은 여행의 경험은 그들이 떠벌이며 소란스럽게 하지 않아서 좋듯이, 그들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듯이 계속 그들의 작은 친절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잔잔한 다정함을 쏙쏙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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