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가고 싶네
안보윤, 알마의 숲
소년은 삶을 접으려 한다. 어느 숲 속 소나무에 밧줄을 매달고 소년은 머리를 넣는다.
힘겹게 발목이 빠지는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소년이 챙겨간 것은 밧줄과 이어폰. 이승에서의 마지막 교신처럼 소년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의 말은 이승을 떠나는 소년에게 전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그치고 비난하면 아이들은 더욱 과격해지죠. 화해와 용서의 움직임으로 먼저 손을 내밀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제자리에 멈춥니다.”
“웃기고 있네”
이승과의 교신을 거부하듯 이어폰을 눈 속으로 집어 던진 소년은, 그렇게 고리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그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왜 소년이 자살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유명 청소년 심리상담사, 아들 자살도 못 막아”라는 기사들이 실리도록. 소년이 고리 속으로 머리를 넣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목표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산장이었다.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호한 어느 지점, 소년은 숲 속 알마의 산장에서 알마라는 소녀와 소녀의 삼촌과 올빼미를 만난다.
나는 아침마다 반 뼘씩 자라난 감정의 가지들을 쳐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야만 이어나갈 수 있는 생이었다. 혹독하게 감정을 잘라낼수록 삶의 가능성이 커졌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증후군이라 이름붙이는 겁니다. 따님의 증상이 워낙 특이해서요. p38~39
알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알마는 감정을 키우지 않는다. 기쁨에서 슬픔에도 눈물은 나오니까.
늘 궁금했었다, 왜 하필 눈물일까. 분노로 뇌압이 상승하면 죽는다든가 웃음소리의 데시벨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죽는 방법도 있는데 왜 하필. 그런데 알았다.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은 거세되었다. 나는 누구도 애틋해하지 않고, 무엇도 아쉽지 않다.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무엇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텅 비었다. 나를 지키는 엄마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엄마의 병을 눈치채고도 놀라지 않고, 엄마와 헤어질 때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윽고 엄마가 가래떡이 되어 나타났을 때조차,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이 병이 내게서 빼앗아간 건 인간의 영역이었다. 나로 하여금 짐승의 영역에서 살도록, 이기심과 본능 외에는 필요치 않은 황폐한 영역에서 살도록 했던 것이다. 비겁하다, 비겁하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눈밭을 뛰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p123~124
이런 알마이기에 소년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을 두려워하는 소년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지탱하는 알마 사이에 유대는 형성이 될까. 같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될까.
죽음이 왜 두려워? 무섭고 두려운 건 삶인데. 버티는 게 힘들지 끝은 무서울 거 없어, 사실은 알마도 그렇잖아,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봐, 그래서 죽어버릴까봐 조마조마하잖아, 맘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책 읽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잖아. p128
알마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박감으로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산다. 오히려 알마에겐 정열적으로 살아갈 수 없이 ‘적당히 시큰둥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소년은 그토록 청소년의 마음을 잘 아는 ‘엄마’가 자신의 아들 마음은 모른 채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힘겨워한다. 삶에 대한 생각을 달리 가지게 되는 것은 알마가 될까. 소년이 될까. 소년의 힘겨운 삶은 알마가 겪는 것에 비하면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어리석고 멍청하고 성급하게. 하지만 알마의 숲으로 가게 된 것은 소년의 힘겨운 마음과 상처 때문이다. ‘누구에 비해서 부족하기에’ 소년의 상처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소년의 상처는 소년에게는 그 상태 그대로 절대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네가 뭘 선택하든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어. 발 빠른 놈이거든.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 p132
알마의 삼촌은 소년에게 말한다. 그 숲에서 소년은 ‘노루’로 불렸고 다시 소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문’이 열려야 한다. 소년 자신도 모르는 새 통과해 온 그 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지만 소년은 언제 죽을 모르는 알마가 생을 절박하게 즐기는 것처럼, 그 숲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 아닐까. 새삼 알마가 삼촌이 존재하는 알마의 숲이 있기는 한 걸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을 순 있는 걸까. 어쩌면 소년의 환상에서 만들어 냈을지 모르는 몽환의 그 숲에서 소년은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