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방인영


 이재찬, 펀치


  자칫 오해가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여서도 아니고 오로지 ‘펀치’라는 제목을 보고, 드라마 ‘펀치’의 원작인 건가?

   여고생이 화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 고3 여고생 ‘방인영’은 여느 여고생과 다른가, 비슷한가를 생각했다. 결론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여고생,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불안정한 고교생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내렸다. 이에 대해 말도 안된다고, 방인영은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랑은 확연히 차이가 있는 독보적 존재라고 반대하는 이의 말도 그렇다고 수긍한다. 하지만, 후자보다 전자에 더 방점을 두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 땅의 고교생의 불안정한 상태와 정립되지 않은 가치, 여차하면 삐뚤어지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더 매몰되는 모습들을 ‘방인영’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면의 기사를 보면 ‘방인영’과 같은 어른들은 수두룩하고, ‘방인영’과 같은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굳이 놀랍다거나, 새롭다거나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가르치는 입장에서 ‘방인영’을 바라봤을까. 내 시선은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분명 ‘방인영’을 분리해냈는데, 그것이 어느 지점인지 모르겠다. 콕 찍어 특정한 사건과 시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점층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일탈이란, 사회에 부적응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 속에는 가정이 포함하고 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회화하도록 돕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정의 역할이라고 얘기한다. 늘 당연하듯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이므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든 ‘사건’ 발생 후의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가정환경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19세나 20세나, 1세나 22세나 생각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싶기도 하다. 개인차가 있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특정한 ‘틀’로 구분지어 해석하려는 이유 때문도 아닌가 싶다. 섣부른 틀을 끼워서 이야기하나 한다면, 청소년들의 일탈과 반항, 범죄 행동은 같아 보이지만 가정환경의 차이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형태의 사건을 두고서 빈곤가정 청소년들의 일탈과 범죄는 ‘잔인한’ ‘악랄한’이, 부유한 환경의 경우엔 ‘불화와 갈등’ ‘청소년기의 반항’ ‘부적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펀치의 주인공은 부유한 경제환경에 부모는 학벌이 높다. 방인영의 부적응은 국회의장의 폭생 사주 사건을 맡을 정도로 잘나가는 변호사 아버지와 자신을 달달 볶으며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엄마, 그리고 주말이면 가야 하는 구원교회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교회 역시 소위 ‘급’이 되는 이들의 끼리끼리 모임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지만 결국은 계급사회를 만들어 내는 사회, 이 모순의 구렁텅이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가지는 방인영은 이 구렁텅이를 탈출하기를 고대한다. 이 탈출이 가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어쨌든 과정인지 결말인지, 방인영이 내린 선택은 살인계획이다.

  철저하게 허위적이고 모순된 세계에 대해 냉소적이며 육두문자를 날리는 방인영은 허위적이고 모순된 세계의 방법을 따라 계획을 세운다. 절대 자기 손으로가 아닌, 청부의 방법을 ‘기획’하면서. 19세 여고생의 살인계획에 동참된 이는 40대의 계약직 공무원 ‘모래의 남자’다. 이 어린 소녀는 40대의 심리를 요리 조리 휘둘러가며 자신의 계획에 이용한다. 자신은 부모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며 소모품이 되기 싫었던 이 소녀는 자신도 이 ‘모래의 남자’를 자신이 휘두르는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방인영의 이 살인계획에는 어떠한 이해를 가할 부분도 아픔을 공유할 틈도 없다. 오로지 어쩌면 경제적으로는 풍부한 아이의 학업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일탈과 반항으로만 비춰지는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겪게 되는 낮은 자존감을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긴 하겠다. 어쩌면 철저하게 ‘안타깝지만 그럴 만도 했어’라고 방인영을 이해할 지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방인영’이 가진 특징이 되는 건가. 작가의 의도이겠지만,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펀치’를 강하게 맞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전혀 펀치가 없기도 하다.


모래의 남자는 작고 빼빼 말랐다.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후줄근하다. 파란색 남방에 쥐색 점퍼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싸구려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두 부류다. 자신감이 넘치거나 포기했거나. 모래의 남자는 분명 후자다. 언젠가는 자신감이 넘쳤던 적도 있었을 거다. 나는 언제 잃어버렸을까.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학교 성적과 비례하는 얕은 자신감 따위가 아닌, 깊은 곳에 저장된 자신감이 옛날 옛적에는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시선 속의 직유가 깊이 침범해 내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 냈다.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동영상에서 태아를 긁어낸 것처럼. 아이가 기계를 피해 도망가듯 내 자존감도 달아나려 안달했다. 이젠 더 이상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 자존감은 내 안에 있는 거지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게 아니란 걸,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깨달았다. p187


   자, 그럼 방인영의 계획에서 대상은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 내신도 외모도 모두 평범한 5등급 소녀의 평범하지 않은 ‘살인계획’의 대상은 부모다. 결국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부모들이라 소녀는 항변하지만, 그래서 반성도 후회도 슬픔도 아픔도 없지만 문제적인 시스템에 대해 비웃음을 날리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가 날리는 ‘펀치’인가? 분명 정의로운 펀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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