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설.
한강. 흰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한 책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아니고
책도 많이 팔리는 나라가 아니다.
심각한 독서율과 OECD 회원국 월평균 독서량에 대한
비교 기사를 읽다 보면 평균 독서량보다 많이 읽는구나라고 뿌듯해지는 게 아니라 서글프다.
책 판매율도 수험서, 영어책, 자기계발서이거나 TV를 비롯한 언론에
소개된 책만이 높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작가 마르케스의 소설이 널리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흰’과 같이 최근 분량이 적은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들 책에 비해 ‘흰’은 좀더 다르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소설책의 분량이 줄어든 것이 페이지가 많은 소설책은 독자들에게서 외면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서시장의 변화에 맞게 오래도록 장편소설의 적정 분량으로 인식되던 소설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 변화의 원인은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핵심은 ‘잘 안 읽는다’ ‘어쨌든 안 읽는다’니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책의 표지와 뒷면을 살폈다. 거듭 확인을 했지만 이 책은 분명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형식과 구성의 파괴, 변주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하게 되는 익숙한 전개가 아니라 에세이 느낌이 강했다. 함께 곁들여진 사진이 더욱 그 느낌을 강조했다. 최근에 읽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과 같은 느낌이었다. 구성도 문체도 분위기도.....마침 <멀고도 가까운>에서도 리베카 솔닛은 여행을 떠났고 북유럽이었고 어머니가 나왔고.......한강의 ‘흰’을 읽으면서도 북유럽의 느낌이 났는데 역시나 북유럽 쪽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 두 책이 유사하게 느껴졌는데 하나는 ‘에세이’로 하나는 ‘소설’로 불릴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일까.
문장으로 본다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도 참 좋았다. 한강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소설 ‘흰’은 정말이지 ‘희다’도 아니고 ‘흰’이라는 어감에 맞는 글이었다.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느낌으로 와 닿은 이야기. 하지만 소설이 인물과 사건과 배경으로 이루어진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임을 알기에 익숙한 형식에서 떨어져 있는 한강의 ‘흰’은 계속 멀찍이 떨어져서 봐지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말, 소설이란 무엇인가.
한강의 이름을 지운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 책을 소설이라고 생각할까. 수긍하며 놀라움과 경탄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을까. 덧붙여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의 신작이라는 글귀는 책 제목을 ‘흰’이 아니라 ‘맨부커상 수상작가 한강’으로 만든다. 우리나라의 문학시장에서, 출판계에서 어느 신인 작가가 이런 글을 들고 출판사를 찾았다면, 편집인들은 흔쾌히 출판을 해줄까? 아니, ‘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을 수긍을 할까?
궁금해졌을 뿐이다. 이 책이 독자의 마음에 닿기까지 분명 ‘출간’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할 텐데 어느 무명의 작가가 달려 나와 ‘나의 첫 소설을 출간하고 싶어요’라며 이 책을 내밀었을 때 출판사 관계자의 얼굴이, 표정이, 그들의 조언이.... 뛰어 넘어야 할 것은 여러 가지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름 하나로 ‘새로움’ ‘낯섦’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상당히 부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