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읽기의 자화상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서정주, 자화상 中 -


  누가 뭐라 한들 아는 것만 눈에 보이고 결국엔 관심 있는 것에 더 눈이 가고 아는 선에서 삐딱하게 봐진다. 결국 수없이 많은 말들을 듣고 많은 글들을 읽는대도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고 내가 아는 것을 더 알도록 보태는 것이지 낯설고 모르는 것에 관심을 옮겨가는 일은 즉각적이지도 쉽게 되지도 않는 일이다. 그래서 이 시가 떠올랐나. 어떤 이는 죄인을 어떤 이는 천치를 읽고 가는. 시인의 변절은 그 행동은 시에 맺힌 진정성까지 감하게 하는.

  책이 주는 것, 작가가 말하는 것을 습득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수용의 주체는 ‘나’인 것이다. 수많은 책읽기의 방식은 취향의 동류의식을 건들여 기본 베이스를 공고히 해주는 것에 얼마쯤 더 가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아니 책읽기를 이야기하는 책을 왜 읽는가를 새삼 생각해본다. ‘다른 방식’을 알기 위함인지 ‘같은 방식’을 찾기 위함인지.



   


  ‘왜’ 시리즈의 제목 때문에 한 명의 작가가 쓴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 권의 책의 작가가 다르고 출판사도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세 명이 같은,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출판 일시도 비슷하다.

  동화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는 네 권을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힘은 사실 상당히 제한적이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생각의 방법과 길은 다양하구나라는 모순된 생각을 같이 했다. 선택하는 동화가 너무 같다는 것이 전자의 이유고 각각의 해석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이 후자의 이유다. 같은 책을 보고도 누구는 인간 행동의 심리에 중점을, 누구는 역사적인 상황을, 또 누구는 사회구조를 세밀하게 보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관심을 두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잘 흘러가게 되는 것일 게다.


  


  널리 알려진 동화는 한정적이다. 고전 동화의 대표로 손꼽히는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교훈’과 ‘깨달음’의 전도사로 활약하다 어느 지점부터는 주인공을 바꾸는 역할극으로 교훈의 반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또 어느 지점에선 ‘삐딱’한 시선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각의 미묘한 시선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 다양성이 세상을 움직이는 한 축에 있음은 분명한데 그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 것은 그것이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이 분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 상태로 경직되어 얼마나 또 오래가게 될런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몰지각하고 비윤리적인 것은 제외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수많은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비윤리적이고 몰지각하고 타당하지 않은 ‘견해’를 알고 스킵할 수는 있게 되리라 본다. 생각해보니 책읽기는 결국은 돌고 돌아 내 취향을 공고히 하는 장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훅’ 들어오는 글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선호의 취향을 떠나 수많은 독서가, 독서법이 취향을 뭉치는 일이 되긴 하더라도 다른 것에 대한 고개 끄덕임과 몰상식과 비윤리적인 것을 선별해내는 힘이 되기를. 선별력이 워낙 강한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쓰잘데기 없는 걱정에 책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이 쓸데없는 걱정도 스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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