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를 위하여


   김민웅, 동화독법


  동화의 재해석. 사회학자이며 목회자가 선택한 동화의 해석은 “유쾌하고도 섬세하게 삶을 통찰하는 법”이다. 김민웅 교수는 열 개의 동서양고전 동화에서 삶을 통찰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다. <미운 오리 새끼><신데렐라><솔로몬의 지혜>인어공주><토끼전><이솝우화><헨젤과 그레텔><바보 이반><바보들의 나라 켈름><심청전>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 속에서 자신만의 동화 읽기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이야기한다. 그런 지점에서 저자 김민웅의 동화이야기는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우선 열 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동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분석이 깊다. 동화의 주인공의 역할을 뒤집는 이야기도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전의 이야기가 증가하는 이유는 삶의 형태가 워낙 다양하고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들에게 우리의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모습이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들려준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를 꼼꼼히 읽는 일”이 독법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아는 이야기’라고 해서, 다르게 읽는 법 역시도 특별할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적당히 흘려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면 아는 것 중에서 새로움이 발견된다. 익숙하다고 넘긴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현실이 낙오자, 또는 열패자로 취급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들의 재능과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이라고 반격합니다. 또한 본래 백조인 존재를 몰라보고 괴롭히며 멸시하고 추방한 세상을 향한 보복과 과시이기도 하지요. p49


  미운 오리 새끼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다. 내면은 외면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역경 속에서도 재능을 펼치며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 같은 것을 미운 오리 새끼는 전한다. 결국엔 백조로 밝혀진 오리에 우리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이 차별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미운 오리 새끼를 통해 수없이 읽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이 얘기를 꼼꼼히 살핀다.


 이 이야기는 오리와 백조에게 신분차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보다 못한 오리일 뿐이고 백조는 그 성장과정에서 이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고귀한 백조입니다. 서로 다른 생명체로 어울려지는 존재들이 아니라 누구는 못나고 누구는 잘난 겁니다. p50


 엄마 오리가 세상을 처음 보여줄 때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나 끝끝내 이 미운 오리 새끼는 그런 세상과 마주하는 의지와 지식을 길러내지 못합니다. 그가 관심갖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못생긴 오리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일뿐입니다. 농장의 오리 집단에서 쫓겨나듯이 도망나올 때 그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이 피해의식은 나중에도 지속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극복되기보다는 사실상 더욱 예민해지고 말았습니다. p54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힘든 ‘미운’ 오리의 역경에 공감한 나머지, 같은 가족 안에서도 구박받는 그의 삶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백조와 오리를 차이 짓는 저 구분을.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결국 되돌아보면 오리는 ‘재능’과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정해져있던 ‘자격’을 타인들이 그제야 보았을 뿐인 것이다. 더 아름답게 자라난 오리일지라도 결국엔 백조에게는 비견되지 못할 ‘태초’에 '애초‘에라는 낙인. 언제부턴가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만들어낸 사회 속에서의 우리의 상황이 ’오리‘이다. ’미운‘오리가 아니라 그냥 오리. 백조인 ’미운 오리‘가 아니라 백조가 될 수 없는 오리. 그렇게 사회가 이 명명 속에서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라지만 그 부당함이 오히려 제 정체성이라는 듯 변함을 꾀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결코 피해가지 못할 피해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오리들의 역사.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종교와 연결짓는 것 또한 특이하여 눈여겨봐졌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있는 것인지 내가 보지 못한 이와 같은 인어 공주에 대한 해석들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인어공주의 질문은 성서 안의 종교적 질문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되고 싶은 언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나, 이는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모든 인간의 질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종교는 이에 대해 신을 믿고 그 구원의 손길에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할머니 인어의 이야기는 그런 가르침과 같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혼이 생겨나는 것을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가장 귀중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어는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147~148


  동화 속 많은 공주들이 자신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엔 ‘왕자’를 만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 이야기 중에 유독 인어공주만이 슬픈 결말을 맞았다.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왕자와 결혼하게 된 공주의 입장에선 다른 동화 속 공주들의 해피엔딩 결말이 성립한다. 같은 신분, 계급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까 인어공주는 결국 그들 사회 속에선 같은 신분이 아니니까. 아무리 육지보다 몇 배는 넓은 바닷속의 공주라 한들, 그것을 밝힐 수 없고 그래서 공주가 아닌 그저 말못하는 시녀일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 육지로 경계를 넘어선 인어 공주의 ‘변화’와 ‘변혁’을 결국 죽음으로 귀결지어졌다. 신분을 넘는 사랑, 국적을 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더군다나 성에 대한 적극적 표현을 하는 것은 음탕한 악녀의 짓거리로 지탄되었습니다. 그건 마녀의 가슴을 찔러 흘러나오는 검은 피를 먹은 여자들의 소행으로 받아들여졌지요. 성, 쾌락, 여자의 육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의 대상이었고 그걸 여성이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서구 중세의 종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여성의 성적 갈망과 성적 정체성의 성장을 억압했어요. p159~160


  그래, 동화라고 해도 인어공주는 적극적으로 왕자에게 다가간다. 바다가 생활터전이 인어공주에게 옷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은 옷을 입지 않는 것일 테지만 또 누군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게 곱게 보이지 않을 모습이다. 성스러운 공주와 비교해서 더욱 더.


인어공주의 비련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그 적극적 실현 그리고 사랑의 진실이 억눌리고 외면되는 현실의 슬픔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인어공주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계속 용납하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가, 라고 또한 묻고 있지요. 인어공주와 같은 아픈 이야기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어공주가 잃어버린 목소리는 바로 그 희생당한 이들의 존재를 일깨우고 있지 않나요? 그에 더하여 이 세상 도처에 생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운을 확산시켜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p186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는 만들어 질 것이고 읽힐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 속엔 여전히 꼼꼼히 읽어봐야 보일 억압된 민중과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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