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 사망과 사랑이 맴도네.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 작가 괴테에 대한 주절주절



나에게 혼자 파라다이스에서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이다

-괴테-


  <괴테와의 대화>의 저자 에커만에게 연민을 느낀 난, 성격 뭐 같고 제 자랑 심하고 말많은 할아범 괴테를 떠올린다. 괴테란 이름에 괴자 하나 들어간다고 괴상을 떠올리지를 않나, 파우스트에서 스크루지를 혼합한 노인 괴테까지를 막 그리고 있다. 대문호로 칭송받는 괴테를 이토록 곱지 않은 눈으로, 처음부터 완고한 그 모습의 노인으로 바라보는 건 앞서 말한 에커만에 대한 연민 때문이고 ‘노인’ 괴테를 먼저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에 대해 부족한 이해가 크게 한몫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괴테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먼저였지만 당시에 괴테에 대한 기억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다. 이십년도 더 되었으니까 그런가 싶다가도 어떻게 젊은 베르테르의 괴테를 잊어먹었을까. 아니, 그 베르테르가 어쩌다가 저런 파우스트 노인으로 변해버렸을까. 

  괴테는 평생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 덕분이기도 하다. 괴테의 아버지는 황실 고문관으로 법학을 공부한 부유한 인사였다 하고 그의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라 하니 그는 탄생에서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맞닥뜨린 적은 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황실고문관이라는 명예직을 돈 주고 샀다고 한다. 귀족 신분에 대한 갈망이 컸던 모양이고 그것을 얻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었으니, 뭐 다행인가.

 이러한 부유함과 지식에 대한 욕구를 가진 아버지는 괴테가 여러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해 주었다. 괴테의 부친은 괴테를 법률가로 만들기 위해, 라틴어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말과, 수학, 역사, 지리, 미술, 승마, 피아노 등 다방면의 교육을 하도록 해 주었다. 또한 부유한 부친은 집안에 서재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화랑을 꾸몄고 또한 여행에서 얻은 기념물로 집 안을 장식했다. 괴테의 수많은 저작 속에 나타난 다방면의 학문과 지식은 일찍부터 받은 이러한 교육과 집 안에 가득한 다양한 예술품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이러한 지식 외에 어머니로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 또한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치있고 발랄한 성격에 교양이 풍부하였고 어린 괴테에게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었기에 로마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고 어려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8세 때 쓴 조부모에게 보낸 신년시는 여전히 보관되어 있다. 13세에는 첫 시집을 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문학청년이기에 문학으로 기우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고 20대 초반 변호사로 개업을 했지만 그는 계속 문학과 관련된 독서와 공부를 지속하고 문인들과 교제한다.


  괴테의 연보를 보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사망’과 ‘사랑’이다. 이 두 가지 단어는 모두 사람과 연결되는 말이다. 그의 긴 생애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사랑하였고 그가 사랑하였기에 그들의 부재는 괴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먼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동생들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에겐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이 있었지만 여동생 크로넬리아 한명을 빼고는 모두 태어나 얼마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들의 부모가 받았을 충격이 무지 컸으리라. 그리고 또 어린 괴테 역시도 일찍부터 상실감을 겪었을 듯하다. 그것이 누가 괴테와 결혼할까? 괴테는 누구를 사랑했나?와 같은 생각을 들게 할 정도의 많은 여성들을 ‘사랑’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아무튼 적어도 13명 이상의 여인들을 사랑했다 하는데, 과연 사랑일까? 욕망일까?


 1) 파우스트 구원의 여인 그레트헨

 참, 조숙하기도 하지. 하긴 일찍부터 시를 짓는 감수성이 그렇게 이끈 것일까. 괴테의 첫사랑은 파우스트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과 같은 그레트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빠른 세의 이 사랑이 깨어진 후 그는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낸다.

  그녀는 술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고 괴테를 어린이처럼 취급했다하는데 괴테는 이 소녀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이라 예찬했다. 아마도 미화의 측면이 있었던 게 아닌가 사람들은 비판하기도 했다고. 왜냐하면 실제로 어린이 취급에 매우 분개해 잊을 때까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2) 안나카타리나 쇤코프

 첫사랑과 헤어지고 1765년 9월말 공부하러 떠난 도시에서 괴테는 식당 주인의 딸 쇤코프를 만나 사랑한다. 그녀에게 <아테네>라는 시집을 바쳤고 그녀와의 사랑과 연애경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와 희곡,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와 같은 글을 쓰게 된다.

 이 때 그리스 연구가 벵겔만이 살해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괴테는 벵겔만의 작품을 자주 읽어왔 터라 벵겔만의 살해 소식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내 폐결핵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3) 스산네 폰 클레텐베르크

1768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젊은 열정으로 또다시 사랑하고 그녀를 위해 시를 짓던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음에도 병을 얻었던 것이다. 요양생활을 하면서 파우스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비주의와 중세 연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어머니의 친구인 클레텐베르크 양과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신앙에 접근하게도 되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다 한다.


 4) 프리데리케 브리온

 죽을 때까지 참회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여성으로 지센하임의 목사 딸이라고 한다. 괴테가 21세 때 열렬히 사랑했다 하며 그녀 역시 결혼을 원했지만 괴테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파우스트에게 유혹당했다 버림 받고 자식을 죽여 사형에 처해지는 처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프리테리케의 일과 다른 여성들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 볼 수도 있다고.  ‘시골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별’과 같이 그녀를 예찬하는 말은 많이 하지만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헤어질 때 말 위에서 손을 내밀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의 슬픔을 알게 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한다. 프리데리케 브리온에 대한 사랑으로 민요풍의 소박한 서정시를 만힝 썼는데 슈베르트의 작곡으로 알려진 <들장미> <환영과 이별> 등이 있다.


 5) 짝사랑, 이상의 여인, 샤를로테 부프

  몸이 회복되고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이 무렵 괴테는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면서,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진다. 귀양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만 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지며 <괴츠(Gottz)>의 초고를 쓴다. 다름슈타트의 메르크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 실습을 위해 베츨라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의 오랜 사랑이자 이상인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사귄 요한 케스트너라는 친구의 약혼자인 샤를로테 부프이다. 괴테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된다. 그녀와는 이후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여인이다. 이 작품의 폭발적 인기로 괴테는 엄청난 유명 작가가 된다.


 5) 약혼녀, 릴리 쇠네만

  1775년 4월 프랑크푸르크 은행가의 딸인 릴리 쇠네만과 약혼을 하지만 가을에 파혼한다.  그는 많은 여인을 사랑했는데 갑작스런 결혼 결심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릴리 쇠네만과 약혼하기 전 그는 16세의 소녀 맥시밀리아네를 사랑했다는데 곧바로 프랑크푸르크로 돌아오자 약혼을 한 것이다. 이 약혼이 정착하고 싶었던 때문이라고 얘기되는 듯한데 그런 정착 결심이 계절 하나를 지나 사라져 버리다니.

 당시 18세였던 바이마르 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으로 11월 바이마르에 가게 되는데 가을 파혼한 괴테에게는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을까 한다. 이곳에서 지내는 10년의 기간 동안 괴테는 정무를 참당하여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의 정치적 활동을 하기도 하고 다양한 연구에도 매진한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을 갖춘 괴테가 보다 많은 사람과 교류했을 것은 당연하다. 아우구스트공의 모후 안나 아말리아, 시인 빌란트, 고전적 교양미가 풍부한 크네베르 소령, 궁정가수 코로나 슈레타 등 궁정 안의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해 배우며 이른바 질풍노도의 슈투름 운트 드랑의 격정을 지나 보다 평안하고 원숙한 변화를 이루었는데 거기엔 당연 샤를로테 부인의 영향 또한 있었다. 그녀 역시 시간의 변화와 함께 일곱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고 지적이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한다. 그러나 1786년 갑작스럽게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몰래 괴테가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샤를로테 부인과의 관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6) 괴테의 아내,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

 수많은 여성을 사랑한 괴테가 갑자기 결혼을 결심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자식의 어머니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결혼을 한 것이 아니었다. 1788년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그의 나이 38세에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난다. 그녀는 괴테보다 15세 어린 바이마르 조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다. 원래는 좋은 집안의 신학자이자 법률가 집안의 딸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다. 그녀는 23세에 바이마르 공국 추밀관인 괴테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러 갔다가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해 그들의 아들 아우구스트가 태어나는데 아들이 17세 성인이 된 것을 계기로 1806년 가을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크리스티아네가 병으로 사망하기까지 28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그가 그의 아내를 만나며 사랑도 보다 안정되던 1974년 실러와 만나게 된다. 괴테는 실러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파우스트의 집필에 실러의 지속적인 독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의 우정은 괴테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실러와의 교류 중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르만과 도로테아>와 같은 작품을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는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과 상실감을 극복하고 창작에 몰두하고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네의 죽음은 또다시 그를 쓸쓸한 인생을 보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 그의 아내가 죽은 후 쓸쓸했던 괴테는 시안 하피스의 작품을 읽고 자극을 받아 창작열을 불태웠고 또다시 빌레머 부인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때가 1819년이다. 사랑한 인생의 동반자가 죽은 지 3년도 안 되어 또다시 사랑, 정말 괴테는 사랑이었나. 하긴 그의 아내가 있고 그가 좋아하던 실러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던 그 시기에도 괴테는 또다른 사랑을 하고 있었다.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인데, <친화력>이 이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소설ㄹ은 1809년 출간되었다. 그러니...

 

7) 마지막 여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

 72세의 괴테는 자신이 잘 가는 휴양지 마리엔바트에서 17세의 이 소녀를 만나 구애한다. 구애의 과정이 웃긴다. 그는 72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면 몸에 독이 되는지 의사에게 물었고 의사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한다. 그러다 2년 후에 청혼을 하는데 울리케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후에 수녀가 되었다 한다.

 

 수많은 여인들을 사랑한 괴테의 특징이라면, 그녀들을 사랑하고 그녀들을 위해서인지 그녀들과 헤어져서인지 꼭 관련된 작품들을 남긴다. 마치 자신의 사랑을 꼭 기록해야 하는 것처럼 혹은 작품을 위해 여인이 뮤즈인 듯이 행동하는 괴테의 기질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아무튼 많은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괴테는 돌연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1786년부터 1788년까지의 3년 동안이었지만 이 여행이 괴테에게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일단, 여행부터가 갑작스런 떠남의 욕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떠난 여행, 이때 오랫동안 사랑하던 여인 샤를로테 부인과의 관계도 있었는데 이 여행으로 그녀와의 만남도 소원해지고 괴테의 문학적 성향도 고전주의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832년 3월 22일, 괴테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평생의 친구 실러의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하는데 괴테의 마지막까지 함께 한 에커만은 “평안한 기색이 고귀한 얼굴 전면에 깊이 어려 있었다. 시원한 그 이마는 여전히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라고 그의 작품에 기록하고 있다.



•이원용, 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을유문화사, 1996.

 

 이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12명의 천재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책이다. 딱 괴테에 대한 내 생각을 확정짓듯이 괴테의 천재성을 사랑, 괴테의 창작의 창조성은 사랑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피카소의  뮤즈와 같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천재 혹은 창작자들의 뮤즈는 '여성'인 것이 도식적이기도 하고 여성편력에 대한 자기변명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많은 여인들을 만나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하고 글을 썼다 하는데......다른 11명이어야 어떻든....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캐스트, 위키백과

•괴테, 파우스트, 민음사

•페터 요한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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