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일까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이 책의 글 하나하나를 써나간 자는 연암 박지원이다. 그러나 18세기 연암의 문체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책의 전체적인 뼈대를 정리한 것은 편역자이다. 물론 그에 앞서 연암의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은 연암의 자제들이다. 따라서 글,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연암에 대한 감상이겠지만 책이라는 틀에 대한 논의는 글들을 정리하고 뼈대를 세운 편역자들에 대한 당부이다. 

  열하일기는 6개월의 여행의 기록이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에 따라 글을 적고 있다. 가는 여정에 따라 제목을 붙여 총 7편으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기록에는 서장을 첨부하여 그에 대한 부언을 첨부하고 있다. 

  장소를 이동하는 여정 속에서 연암은 생활과 풍경에 대한 묘사와 감흥에서 나아가 그곳에서 만남 사람들과의 필담, 청나라 문물에 대한 묘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일기에 적은 것 이외에 따로 좀 더 자세한 글들을 정리하고 있으며 일기에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연암이 쓴 글들이 일기와 맞물려 읽고 싶은데 편역자들이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일기 속에 언급한 이야기들을 연결되도록 구성하여 흐름이 끊이지 않도록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내가 연암이라 6개월 간의 여정을 일기로 쓴다면 어떤 방식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날 그날 겪은 일들에 대한 감상을 나열할까. 아니면 뚜렷한 목적을 가진 내용을 다룰까. 연암의 일기는 비교적 연암처럼 그 당시 생경한 경험을 여행기 속에 기록하되 보다 청의 문물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주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좋은 방식으로 보인다. 사실, 감흥이란 그 장소에서 그 때에서야 느낀 감정일 수 있으나 되돌아 보면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기의 기록은 감상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그 나라와 생활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이뤄지는 형태가 와 닿는다.


  연암의 문체는 읽으면 읽을수록 빨려가는 듯하다. 그리하여 어느 한 구절만을 달랑 뽑아낼 수 없다. 그리하여 벽돌에 대한 묘사이든, 수레에 대한 의견이든, 그 논쟁적으로 접근하는 글귀에도 문장 전체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여행기로서 중국 문화와 습속에 대한 묘사 이외에도 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연암 자신의 마음들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여행기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감상적이 되기도 하여 호곡장에 대한 서술, 도와 경계 사이의 대화, 아홉 번 강을 건너며 보고 느끼는 감상이 기억에 남겨진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거니와 나 또한 어느 곳 어디에선가 깊은 깨달음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감정이라 쉬이 감정이입이 되어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몇 구절을 뽑아서 실어본다면 막북행정록에서의 이별에 대한 묘사와 다음의 묘사가 생각난다. 아마도 이 부분은 글보다는 분위기가 자아내는 느낌 탓에 기억이 더 날 터였다. 밤에 홀로 성 밑에 앉아, 별빛 아래서 먹을 갈아 글을 쓰고 보자니, 먹을 갈 물이 없어 술통의 물을 부어 글을 쓰는 그 상황에 눈 앞에 그려지면서 웃음과 또한 애잔함이 묻어난다.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은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막북행정록 -


 또한, 연암 스스로 도를 알았다고 서술한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편은 그 상황과 맞물려 글에서 자아내는 느낌과 글이 좋게 다가온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험을 직접 보며 벌벌 떠느라 그 눈이 근심을 불러온다. 그러니 어찌 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느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 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밝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열하일기를 읽는 순간부터 처음에 맞닥뜨린 건 이질감이었다. 현대적 언어에 익숙하다 할지라도 당연 18세기의 저서를 읽으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18세기의 그 느낌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나는 너무도 평탄하게 글을 읽고 있었다. 순간 지금 이 글이 연암의 문체가 맞는가, 얼마만큼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되었는가, 이런 것이 생각나면서 읽어보지도 못하겠지만 연암이 쓴 문장 자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 책의 대상이 청소년들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 필요해라는 어이없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낯선 시간의 기록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시대의 기록을 위한 사전 배경 설명이 있다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만화 속 캐릭터 같이 사행단 멤버들의 성격과 행동을 서두에서부터 명확하게 명시해 본문 속에서 그들의 관계와 특징을 찾아가는 묘미를 상쇄시키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굳이 친절한 안내로서 등장인물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이 부분은 삭제되어도 무방하다고 보지만) 하권에 연암의 일기가 끝난 뒤에 배치하였으면 한다.

  본문 중에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되게끔 삽화와 부연 설명을 통해 내용의 이해를 덧붙여 주고 있는 점은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한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의 많은 삽화와 부연 설명이 있는 것에 비해 전체적인 부연 설명,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부가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당시의 시대가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큼 당시 조선시대의 분위기와 더불어 국외, 서양의 상황은 어떠했는가라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박지원의 일기와 글들에 대한 이해도 전체적인 견지에서 어울려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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