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은 땅에서 유래하지만, 두 번째 인간인 내적 인간은 ‘하늘에서’,

즉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유래한다.”

 - 융의 묘비에 씌어진 글(p209~211)-

 

 

카를 융 - 생애와 학문, 게르하르트 베어, 한미희 옮김, 까치,| 1998.

 

 

 ■ 기억할 수 있는 것

 

 심리학책뿐만 아니라 여타의 책에 부지기수로 등장하던 프로이트를 난 좋아하지 않았다. 강박적으로 그의 이론부터 시작되던 심리학의 많은 부분을 참아내야 했지만,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이론에 회의를 느꼈고 그의 이론과 더불어 사람 자체에 대해서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의 이론도 ‘이상’하다, 집착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융님이 나 홀로 탐탁치않게 여기던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고정화시켜 줘서 기쁘다(?).

 집단무의식과 원형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융을, 융의 입으로 만나면서 프로이트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융에게 더 이끌렸다. 그의 세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부러웠던 것 중에 그가 살고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그가 그 집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세계 속의 움직임이니 결국 마찬가지다. 그는 호숫가 옆에 탑을 짓고, 또 짓고, 또 짓는다. 그의 복잡한 심정은 계속 확장된 집이 되어 간다. 그리고 그는 미로같고 문명의 기구들을 들이지 않은 그 탑에서 미로같고 문명이 들어차지 않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간다.

 

 1) 공간

 

  융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구가 보덴호숫가에 성을 가지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의 호숫가에서 놀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 호소의 광활함을 즐거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고 했다. 그 어린 날의 기억이, 그를 호숫가로 이끈 것일까.

  호숫가에 지은 그의 탑은 단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머리속에서 구상하고 그의 몸으로 만들어낸 이 탑은 그가 처음 탑을 짓고 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보완된다. 이 공간에서 그는 어떤 문명의 기구도 외면한 채 원시적 삶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그의 내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장소가 주는 신성함, 장소가 주는 안정감, 장소가 주는 창조성.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 간 융의 볼링앤 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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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볼리엔 탑 / 85세 생일에 모인 융의 가족들>

 

 2) 시간, 기억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융이 놀랍고 부럽다. 과거의 사건들은 핵심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내면의 생각들은 언제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관심두지 않는다면 존재했는지도 까마득하다. 그 모든 것들을 융은 살려내었다. 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그의 기억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애를 가리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무의식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용이었던 것이다. 융은 죽기 전 인터뷰에서 기자의 신을 믿느냐고 물음에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답했다. 무의식을 통해 그 자신도 충분히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융은 스위스 주간지 「벨트보헤」와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다음처럼 평가했다.

 

 “나는 인간 및 시대의 질병을 다루고, 고통의 현실에 맞는 치료수단을 생각하는 의사입니다. 정신병리학적인 연구를 하며 나는 역사적인 상징과 형상들을 무덤의 먼지 속에 깨워 일으켰지요. 나는 환자들의 증상을 치료를 통해서 없애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이라기보다 약간의 현명함과 자기관찰과 무의식적 경험에 대한 신중한 종교적 고찰입니다.”

 

3) 그림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놀랐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조각품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는가. 그는 매우 손재주가 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다. 그는 이것들을 모두 단순하게 작업했고 무의식의 일련에서 행한 것이라 하지만 보고 있는 나에게는 경탄까지 일으키게 했다. 그가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예술가 쪽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가 의사였다는 점이 그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으니 분명 집안에 화가가 있었다면, 예술가가 있었다면 달랐을 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기질이 예술가적 기질보다는 학자풍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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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이 그린 그림, 1917년  좌, 필레몬을 비롯한 여러 인물과 지구 /우,  칼을 든 기사>


 융의 다양한 연구 속에 동양철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만다라를 그리기도 하고 만다라가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아갔다. 만다라는 그에게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 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융은 그것이 어떤 핵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고, 그 기간에 '자기'에 관한 생생한 개념을 더욱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융은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실제 그는 만다라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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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렸다는 융이 그린 최초의 만다라>

   

4) 관계

 

 융의 아버지는 개신교 개혁파 목사이며 박사학위를 가진 문헌학자이며 신학자였다. 어머니는 바젤의 유명한 목사 가문 프라이스베르크 출신이었고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는 바젤 대학 교수이자 의사였다. 할아버지는 대학교수와 의사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외할아버지 프라이스베르크 역시 그러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하듯 그의 뿌리는 그러했다

.

  “영혼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의 나이는 수백만 년을 헤아린다. 개인의 의식은 땅 속에 있는 다년생 뿌리로부터 자라나 계절에 따라 개화하고 결실을 맺는 꽃과 열매에 불과하다. 뿌리의 존재를 함께 고려하는 사람은 진리와 보다 더 일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는 모든 것의 모체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1902년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로서 취리히 대학 교수였던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프로이트와 교류하였고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까지 역임한다.

  하지만 무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활동영역을 구축해갔다. 특히 그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중점으로 연구하였고 문화사 및 종교사적 비교 작업을 함께 했다.

 그의 생애동안 융은 다양한 철학자들에게 매료되기도 했고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 대한 연구를 위해 다양한 독서의 세계에 있기도 했다.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은 그의 조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의학교과서를 처음 보고, 심리학 및 정신의학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가장 맞는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을 마친 후 보조의사로서 부르크휠츨리 병원에서 일하면서 이 병원의 엄격한 규칙을 묵묵히 따라고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융의 노력은 병원장의 신임을 얻게 되고 파리 유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이에 융은 1905년 취리히 대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고, 부르크휠츨리 병원의 수석의사가 되었다. 의사로 일하면서 1913년까지 취리히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공부만 하고, 책만 읽고, 비사교적이고 엄숙하였을 것만 같은 융은 대학시절 사교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학생단체 “초핑기아(Zofingia)"의 회원으로서 열정적인 춤꾼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상황이 그의 기질을 온전히 드러내기를 어렵게 한 듯하다. 그는 학비를 모으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내가 된 엠마에게도 의사 자격을 얻은 후에야 청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엠마의 부모가 결혼을 허락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융은 취리히 대학 강사를 하던 무렵 자신의 이후 생애와 창작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두 만남을 갖게 되는데 샤프하우젠 출신의 젊은 스위스 여성 엠마 라우셴바흐와 ‘스승’이자 한때 친구로 지내게 되는 비엔나의 지크문트 프로이트이다. 융은 아내 엠마와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융은 대학에 다닐 때 14세의 엠마를 그녀의 집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엠마를 보자마자 “깊은 충격을 받았고”, 곧 그녀가 미래의 아내라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1903년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엠마의 인간적인 성숙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고 게다가 엠마는 점차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노련한 심리치료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융은 자신의 아내 엠마가 죽은 뒤 너무나 큰 고통과 충격에 힘들다고 말하는데, 애정 깊고 사려 깊은 엠마라는 반려자가 없었더라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삶과 작품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대결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융에 대한 책을 쓴 게른하르타 베어는 적고 있다.

 여기서 결혼하고 곧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혔다는 것이 바로 샤비나 슈필라인과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놀랍게도 그토록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오랫동안 기다려 청혼한 아내와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융은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바로 자신의 환자 샤비나 슈필라인이다. 샤비나는 융의 정신과 환자로 융은 그녀에게 Talking cure(대화치료)를 적용하는데 이 치료 방법의 위험성이 환자가 의사에게 가지게 되는 애착 혹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지는 애착이라 한다. 어쨌든 샤비나는 단순한 정신과 환자가 아니었고 후에 자신의 이론을 구축한 심리학자가 된다. 이들의 관게에 프로이트가 가세하면서 당시에는 삼각 스캔들로싸지 퍼졌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엠마 덕분이 모양이다. 엠마의 생애도 더불어 궁금해진다. 

  그리고 융에게 영향을 미친 프로이트는 융보다 19세 연상이다. 프로이트 이론에 매료된 융은 당시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에도 프로이트에 대한 옹호와 지지를 표명했고 이것은 프로이트와의 서신교환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고 융 역시 프로이트를 따랐다. 그러나 곧 그들은 견해 차이를 보였고 융은 프로이트의 한쪽 면에만 치우친, 그리고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우는 태도에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편지를 통해 결별했다. 정신분석학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그동안의 친구와 친지들을 떠나가게 했고 사람들은 융의 책을 쓰레기라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는 학회도 탈퇴하며 그의 길을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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