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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세대
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약속의 8회는 있는가
약속의 세대, 백온유, 문학동네, 2026-03-20.
“약속의 8회가 왔습니다”
야구 경기 8회가 되면 늘 이런 코멘트가 나온다. ‘8회에 도대체 무엇을 약속했기에’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8회에는 꼭 무슨 일인가 벌어져야 한다는 강렬한 기원, 주술같은 이야기에 휩쓸리고 만다. 승리 굳힘일지 역전의 날림일지 모를 8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패배가 굳혀진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 ‘약속의 8회’는 항상 당연한 듯 이어지고 머문다. 아무것도 몰랐거나 아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한순간의 유흥으로 지나갔을 ‘8회’는 ‘약속의’라는 단어가 붙은 후엔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휘젓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후폭풍은 전신을 휘감는다. 『약속의 세대』에서 ‘약속의 8회’를 떠올리는 건 기시감일까.
이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약속의 세대’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은 없다. 「사망 권세 이기셨네」에 ‘5분위 약속 세대’가 등장할 뿐이다. 소설 속 ‘5분위 약속 세대’는 “역전교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일찍부터 통치자 교육을 받은 집단”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제목을 가져왔고 일곱 편 모두에 ‘약속’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곱 편의 소설을 아우르는 ‘약속의 세대’가 뜻하는 건 무언가, 어느 세대를 말하는 건가.
작가의 말과 인터뷰에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했다. “헌신하는 만큼 보상이 따를 거라는 기대, 인내하면 찬란한 미래가 당도할 것이라는 믿음”에 배반당한 “헐거운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라며 사는, 삶의 비애를 감내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약속’, ‘약속의 세대’라니 뭔가에 너무나 매여 있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책임감을 끌어안고 있는 특정한 세대가 있는 건가. 소설집을 읽기 전 수록된 소설 중 「반의반의 반」을 읽었기에 약속의 세대를 ‘노인 세대’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약속하는, 그러니까 내가 받은 것과는 상관없이 무언가 끊임없이 ‘주어야 하는’ 세대. 무언가를 준다는 건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것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줄 수밖에 없는’ 세대. 하지만 생각보다 노인들의 등장은 많지 않았고 난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던 거였다. ‘약속의’ 의미를. 약속이란 상호적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러니 약속하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약속‘하는’이 아닌 약속‘받는’ 것에 대한 것을. 그러니 이건, 약속의 8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의탁과 위탁 사이」에는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간병하는 이십대 손녀가 나온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잠시만 할머니를 돌봐달라고 딸 ‘연수’에게 부탁하는데 연수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길러졌기에 그에 대한 부채감과 더불어 이를 수락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지는 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돌봄’의 주체가 되는 ‘엄마’가 열외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 돌봄도 ‘노인’ 돌봄도 엄마는 비껴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손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봄 과정에서의 감정이 이야기를 차지하지만 이 감정의 영역에서 ‘엄마’는 배제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병원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친밀했고, 유독 살가웠고, 그만큼 각별했노라고” 손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그럴 리가. 손녀는 “할머니를 진정으로 측은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못했”고 그 이야기를 힘겹게 듣는다. ‘엄마’가 해야 할 역할이 ‘할머니’와 ‘연수’에게 각각 전이된 상황에서 연수는 자신을 돌봐 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보다 엄마에 대한 적개심을 더 갖는다. 또한 일상의 모든 것을 챙겨 준 할머니보다도 가끔 물질적인 것을 주었던 할아버지를 더 따르기도 했다.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애정은 약속받지 못하게 된 건가.
「광일」을 보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인력거꾼 김첨지는 택시 운전사 광일로 재탄생했다. 게다가 ‘광일’을 단순 이름 풀이하면 빛나는 하루가 아닌가. 광일에게도 계속 택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광일’에게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좋지 않은 쪽으로-예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 거듭 일찍 가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안락하고 평안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거듭 아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광일이다. 택시기사로서 자신을 “신”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광일이, 삶의 동반자인 아내를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따금 신이 택시 기사의 모습을 빌려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신의 안내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그 순간을 통과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건 기적적인 일이죠.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에요.” _「광일」
「사망 권세 이기셨네」속 ‘미리’는 “삶에 위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근원을 나와 내 어머니로 지목하는 세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작정하고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세주가 원하는대로 끌려다닌다. “종교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기 때문일까. 역전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치리(治理)하고 싶은” 마음에, “훌륭한 왕이자 좋은 백성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외면했던 것에 대한 반성일까. 어린 나이부터 역전교로부터 ‘배반’당한 위치는 같은데도 ‘미리’는 ‘세주’를 또다른 교주를 모시듯 종속되고 만다. 종교가 제시한 찬란한 미래가 파괴되고 세주가 미리를 착취하며 삶의 결핍과 좌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미리는 세주를 끊어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초연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망 권세”를 이기기라도 하고픈 심정인 건가. 사이비 종교에 대한 글을 읽으면 늘 드는 의문이다. 왜, 어떻게 계속 믿느냐. 열망뿐만이 아니라, ‘믿음의 배반’이 무서워 의문을 갖더라도 ‘회피’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미리’도 그런가.
믿음도 배반도 흔한 시대, 무엇을 믿는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진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내게 좋은 것, 이익되는 것’이 곧 ‘선’이라는. 사회가 외치는 ‘약속’이 함께 만들어가는 ‘약속’이 그 자체가 ‘문제’를 담고 있어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명확한 대안없이 그저 주술처럼 외치는, 일단 질러버리는 ‘약속의 8회’도.
*https://v.daum.net/v/20260328130128275/
https://v.daum.net/v/202604010432363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