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예약주문



춤추는 슬픈 감정


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민승남 (옮긴이), 한겨레출판

 


   앤 카슨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읽은 책과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을 찾아보니 앤 카슨의 책을 처음 읽었던 때보다 더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었다. 고작 두 작품을 읽고도 아는 이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데 새로운 책들이 나올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싶다. 새롭게 이 책을 훑어보다가 예전에 이 책을 읽고 제법 ‘분노’에 차 있었구나란 생각에 웃음이 났다. 다시 보면서도 역시 '남편'을 똑같은 인물로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분노를 잠재우고자 그깟 (남편의) ‘아름다움’보다 ‘탱고’에 더 빠졌었던 것을. 세월이 흘렀는데도 안타깝게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여전히 같은 감정이 솟기도 하고, 달리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리뷰를 쓰고 나서야 예전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썼음을 알게 되었다. 세월은 내게 동일한 감정을 유지시키기도 하지만 이렇게 기억에 장애를 주기도 하다니......

  앤 카슨은 존 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이 글을 썼다.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이 책 29장마다 존 키츠의 시와 메모, 편지 등에서 인용한 글을 담아 헌정하고 있다. 난 ‘존 키츠’나 ‘T.S 엘리엇’보다도 ‘실비아 플라스’가 생각났고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남편’은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으로 치환되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스 항아리보다도, 그리스 항아리에 새겨진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운지 정말 모르겠는 ‘남편’인지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움 앞에 ‘남편’이 붙는 것조차도 탐탁지 않았다. 앤 카슨처럼 뭐,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내 남편. 그럼 나는 왜 소녀 시절부터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받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를 사랑했느냐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나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앤 카슨이 “그가 가까이 온다면/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라고 이어서 쓴다면 그건 다르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부끄러울 것이다! 내게 아름다움이란 그렇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울 때 아름답다고 하는 거라고.

  ‘아내’가 열다섯 소녀 시절부터 오랜 시간 사랑한 ‘남편’은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정부가 있다고 말하며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사진 한 장을 내밀“정도였으며 ”스스로 생각을 시작하는 건 싫어“하여 정부에게 보내는 글에도 아내의 글을 제 것인 양 사용하였으며,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이런 남편. 아니, 이런 정도의 성정과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두고 ‘아름답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 테니, ”아름다움“은 필시 외형적인 형태에 대한 것일 게다. ‘외형에 대한’ 기준도 결국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말로 ‘절대적 아름다움’이어야 할 테다. 누구라도 믿어 의심치 못할. 저러한 행태를 보이는 남편이라면 더더욱 그래야하지 않는가.

 

나는 많은 아내들처럼 남편을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

힘이란 어떤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의 반대는 그걸 더 강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남편을 신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는데. 이젠 달릴 수밖에 없다. 남편은, 남편이, 남편을, 아, 아름다움이라니.

  ‘아내’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결혼했고 결혼한 지 1년 남짓한 때 남편에게서 직접 외도 고백을 듣는다. 다행히 사랑하고 결혼하고 배신을 겪은 뒤 ‘별거’도 ‘이혼’도 한다. 다만,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을 추종한다. 아니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맞는가. 남편은 끊임없이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필요를 얘기하고 감정적 반응을 바란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 때문에 헷갈린다. 이토록 절절한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라니! 아니, 외도한 남편으로 인해 겪은 그 마음들을 단지 욕설과 분노로서가 아니라, 우아하게 비틀어 표출할 수 있는 아내의 아름다움이라니!

  존 키츠는 ”아름다움이 진리“라고 했다. 아름다움이 인간 구원이라고 했다. 존 키츠의 후예인 것 같은 아내라면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아름다움이 외형이 맞는가. 아름다움이 도덕적인 비난을 줄줄이 발사하게 만드는 그 순간마다 속속들이 있는가. ‘탱고’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춤이지만 ”춤추는 슬픈 감정*“이라 불린다. 이민자들의 애환-고독과 상실, 향수, 사랑의 아픔 등이 깊게 담겨 있다. 이 슬픔 감정을 파트너와 함께 표출한다. 수많은 감정을 상대와 함께 호흡하며 맞추어가는 춤. 이 춤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다면 탱고야말로 구원이다. 아름다움이란 결코 외형적인 것만이어서는 안된다. 모든 상실과 고통을 격렬한 탱고로 춰버리고 나면, 마침내 찾아오는 치유의 순간에 머뭇거림도 사라지고 ‘신의 위치’ 또한 바뀌어 가려졌던 인식도 뚜렷해지지 않을까.

 

모든 신화는 풍부해진 형태이자,

두 얼굴을 지닌 것으로,

그 주체로 하여금 겉과 속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이유로 고대에는 모든 시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아내’와 ‘남편’이란 관계에서 대놓고 무식하게 폭력적인 사람보다도 더 끔찍하고 역겨운 사람은 고급 언어를 휘두르며 우아하고 고매한 ‘척’하며 ‘선’을 넘는 사람이다. 거짓과 교묘한 언어로 사람을 휘두르려는 자, 자기 통제 속에 사람을 가두려는 자다. 정말로 자신이 ‘신’인 것처럼 구는 그런 인간.

  남편은 ‘신들의 방식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마음대로 의미를 바꾸어.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하는 존재. 비로소 아내가 남편을 직시하며 깨닫고야 마는 것은 ”남편“과 ”아름다움“을 동일시,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름다움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모순과 거짓과 문제가 많은 남편이 아름다웠다고 한 것처럼 아름다움이 곧 선함, 도덕성과도 일치하지 않음도. ”삶에는 몇 가지 위험들이 있고 사랑은 그중 하나이며 끔찍한 위험들.“이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아름다움을 붙잡아라“라고 외친다. 남편을 사랑했던 순간도 삶의 일부이며 생, 그 모든 순간 그건 결국 ‘아내의 아름다움’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 그것이 우선하게 될

것임을―내 심장 속에서,

이미 먹혀버린,

목적의식과 신전들과 신이 있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그곳에서 그는 이미 나였다.

나의 상태였다.

 

  내가 간과한 것은 이 책 속 그렇게 길게 등장하지 않는 '레이', '돌로르', '메르세드'는 이름이 있음에도 ‘아내’와 ‘남편’은  이름이 명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분노한 것이다. ‘특정인’에 매몰되어 인식할 때 나의 한계는 분명했다. 특정인에 대한 '분노'와 '비난'만이 합당한 것처럼 여기며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이름붙인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아내’와 ‘남편’으로 인식할 때, 언어는 보다 풍부해지고 세계 또한 확장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도 그것을 '진리'로 인식하는 마음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삶은, 스물아홉번의 탱고만으로는 부족할 얘기가 넘치기야 하지만 오로지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닌 '춤추는 슬픔 감정'을 출 때,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https://v.daum.net/v/2008053009551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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