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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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니까


남극 Antarctica. 클레어 키건 (지은이), 허진 (옮긴이), 다산책방, 2025-12-17.

 


  이 작품이 클레어 키건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출판사가 출간해 주는 순서대로 읽다보니 작가의 데뷔작을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에서 느낀 느낌을 안고 책을 펼치면, 움찔한다.

   ‘아일랜드’는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국가명만으로도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건조하며 서늘하지만 매섭진 않은, 묘하게 아득한. 또한 가본 적 없는 ‘남극’은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펭귄’ 하나가 대표적으로 떠올라 갑자기 동화같은 상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남극’을 사실주의 그림이 아니라 동화같은 판타지 세상으로 이미지화하여 책을 읽는 순간, 전례없는 폭풍을 경험한 듯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

  『남극』을 관통하는 단어는 아마도 ‘남자’가 아닐까. 다른 말로 하면 ‘남자’로 대변되는 폭력과 억압의 세계, 그에 동조하여 무력하거나 피폐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렇게만 적어놓고 보면 페미니즘 문학이다, 익숙하게 보아 온 서사다, 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다! 클레어 키건이 다루는 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도 그 내용도 다르다. 클레어 키건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덧대어져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는데, 감정은 극에 달한다.

 

그녀가 어렸을 때 수녀님이 지옥이란 사람마다 다르다고, 각자가 생각하는 최악의 장소라고 했었다. “난 지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반쯤 얼어 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차가운 태양과 당신을 지켜보는 악마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어요.” (…)

“그러면 나의 지옥은 황폐한 곳이겠네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말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악마도 없고. 지옥에 사람이 바글바글할 줄 알고 늘 마음 놓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전부 거기 있을 테니까요.”_「남극」

 

  「남극」의 강렬함은 표제작이라 첫 페이지에 배치되어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러니까 지금 ‘지옥’에 ‘영원’히 갇혀버린 여자를 본다. ‘남자’가 만든.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에 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다. “행복”한데 왜 여자는 “멀리 나갈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하는지, 그건 무료함일까. 어떤 결핍이 있다면 그걸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행복한 결혼 생활”에 갇혀 생각이 너무 빙빙 도느라, 뛰어넘어보기로 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의 일탈에 대한 의외성을. 극히 미미하게 묘사된 그 일상의 모습을 “행복한”이라 할 수 있는지를.

  어떤 일탈은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남극’에 대한 동경인 걸까. ‘남극’을 동경할 수는 있다. 가보지 않았던 곳, 그곳의 실체를 알 수 없으니. 그러나 남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 단지 춥다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곳이다. 자연의 극한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왜 남극이라 제목을 지었는지 알 듯하다. 너무나 행복한 일상과 대비되는 남극의 풍경이.

 「남극」속에서 주요한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로 본다면 자칫 여성이 이 ‘남극’에 있게 됨을 ‘불륜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 종교에서 간통한 여성에게 행하는 ‘마땅한’ 형벌로 ‘여성의 욕망’에 대한 형벌이라는 당연성으로 귀결될 수 있음이다. 불륜이 문제라고 한들 ‘여성의 욕망’은 어째서 ‘남성의 폭력과 통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인가. 여성이 자유롭고 탐험으로서의 성적 욕망을 희망한다고 할 때, 남성은 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대상, 소유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성을 위치시킨다. 결국 두 동등한 성적 욕망이 맞닥뜨렸지만, 여성은 자신의 몸과 정신의 주체성을 남성에게 폭력적으로 빼앗기는 존재가 될 뿐이다. 영원한 지옥에 갇힌, 남성이 만든 ‘남극’의 세계 속으로.

  그래, 어쨌든 「남극」을 성적 욕망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일탈한 여자가 당한 비극이라 치다. 그러면, 성적 욕망을 바라지도 않았던 그 많은 여성들은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폭력과 억압 속에 휘둘리는가. 소설 속 여성들, 삶은 왜 이다지도 힘든가. 그 ‘힘듦’을 준 것이 남성들이라는 점, 남성들의 세계라는 것을 키건은 잘 보여준다. 아, 결국 「남극」속 여자는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불렀던“ 건가.

 

방에서 친척 여자들이 차를 들고 내 주변으로 모여든다. 찬장 깊숙이에서 꺼낸 도자기 잔과 잔받침이 쟁반에서 쨍그랑거린다. 트위드 차림의 뼈대가 굵은 여자들로, 나에게 옳고 그름과 예의범절을, 또 힘든 노동의 가치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는, 배가 납작하고 변덕스러운 여자들. 우리는 남자를 위로하는 여자와 절대 거절하지 않는 남자의 후손이다._「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소설 속 아일랜드, 교외의 가정들은 한국을 닮았다. 이렇게 먼 이국의 가족풍경이 한국과 닮았다니. 그 속엔 아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남자가 있고, 자식에게 무관심하며 차별하는 남자가 있고, 아이와 아내를 여자를 두들겨 패는 남자가 있고, 불륜을 일삼는 남자가 있고, 강간하는 남자가 있고, 일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 그들은 왜 그럴까.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고 누가 부여한 것인마냥. 이 사회에서 언제나 그 하나면 족하다. ”남자니까.‘

 

아빠가 다트판을 직접 건 다음 다트를 던지고 분필로 점수를 적는 동안 엄마와 나는 모자 달린 방한 재킷을 입고 돼지와 소와 양에게 먹이를 주고 암탉을 밖으로 내보낸다.

“왜 아빠랑 오빠는 아무것도 안 해요?” 내가 엄마에게 묻는다.

나는 따뜻한 짚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더듬 달걀을 찾는다. (…)

“남자니까.” 엄마는 이 한마디면 전부 다 설명된다는 듯이 말한다.

_「남자와 여자」

 

  남자니까, 남자라서 그저 절대적인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들을 그 권력에 순응하도록 하고 서로를 싸우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이 어떻게 15년 동안 어머니를 멍들게 했는지” 말해주면서 “똑같이 잔인한 눈을 가졌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만큼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남자가 아닌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데 계속 이 ’위험하고 찌질한‘ 남자들로 인해 ’행복을 포기하고 말 것이냐‘는 생존과도 직결된다. 되물림되는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욕망”도 감추고 순응하고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 _「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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