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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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회복력


레스, 앤드루 숀 그리어, 은행나무, 2019.


  “대체 아서 레스가 누구야?”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 본다. 삶의 마지막 순간 내 장례식장을 채울 사람의 숫자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와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때때로 실연이란 여러 가지로 자신을 재발견하게끔 한다. 실연 후의 가장 대표적인 반응이 여행이라는 점에서 실연은 현재 상황을 환기하고 변곡점이 되는 기회다. 실연과 여행은 한 덩어리로 끈적끈적하게 붙은 상실과 집착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하게 한다.

  레스 역시 9년 차 연인 프레디가 보낸 청첩장을 받고 여행을 채택한다. 지금껏 가보지 않은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 행사에 기꺼이 참석하기로 했다. 물론 레스가 작가였기에 합리적 결정이었다. 오십이 되었어도 여전히 무명작가이든 아니든 레스에게 “뜨뜻미지근한 평론이나 무심한 모욕은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지만 실연은, 진짜 진정한 실연은 그의 얇은 가죽을 뚫고 예전과 똑같은 색조의 피를 낼 수 있었기에” 가능하고 필연적이었다.


선생이나 저나, 우리는 천재들을 만나봤죠.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들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습니까? 계속해나가는 것,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계속 살아나간다는 건 어떤가요? 내 생각엔 그게 최악의 지옥인 것 같아요.


  레스는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모로코, 프랑스 등등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 참여하면서 인생과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고 정립한다. 그냥 ‘형편없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형편없는 게이’이기까지 하다는!

  오십년만 돌아보면 되는 아서의 인생은, 문학 기행이 펼쳐지는 장소에서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한다. 멕시코의 행사는 천재 시인 로버트에 대한 심포지엄이었고 레스는 무대에서 30년 전에 만난 로버트의 아내 메리언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당시 로버트의 아내 메리언은 레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로버트 좀 잘 챙겨줘.” 잘 챙겨주다 못해 로버트를 잘 챙겨간 레스는 로버트와 15년을 함께 살았다. 

  

우리 세계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주는 게 우리 의무거든요. 게이 세상의 아름다움 말이에요. 하지만 레스 씨는 책의 등장인물들이 아무 보상없이 고통받게 만들어요. 내가 뭘 잘 몰랐다면 레스 씨가 공화당 지지자인 줄 알았을걸요. <칼립소>는 아름다웠어요. 아주 슬픔으로 가득했지. 하지만 너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 증오에 차 있었어요. 한 남자가 어느 섬으로 휩쓸려 와서 몇 년 동안 게이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아내를 찾으러 돌아간다! 그것보다는 잘 쓸 수 있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달라고요, 아서. 더 높은 목표를 잡아. 이런 식으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어서 하는 거예요.


  아서는 실연의 상처에 더해 재능없음에 대한 한탄이 가득하다. 오십의 아서는 젊음마저도 없다는 사실을 더욱 자각한다. 그럴수록 아서의 인생은 과거도 미래도 형편없는 삶으로 점철되는 듯하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닫고 끝없는 슬픔과 상실에 깊이 빠진 아서의 이 여행은 그래서인지 일명 ‘웃픈’ 상황의 연속이다. 제 자신의 ‘형편없음’에 매몰된 아서, 짠내 나는 아서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럼에도 계속된 여행을 하는 아서가 놀라울 뿐이다.

  소설은 코믹한 상황 설정과 유머를 구사하며 형편없는 게이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그 설정에 비해 마냥 유쾌하게 느껴지거나 책장 넘기는 속도가 나진 않는다. 때론 누구에게나 자기연민이 필요하지만 지나친 자기연민은 독이 된다. 시작부터 일관된 아서 레스의 자기연민과 비하가 책장 넘김을 더디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더불어 레스와 마찬가지로 나만의 지난 시간을 회상하느라 더뎌지기도 했다. 젊음. 청춘. 내 인생에 있었던 지난 시간.

  지난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레스의 인생에서 이 실연의 아픔은 결국 로버트와 프레디, 그 연인들 자체에 대한 상실감보다 지나간 인생에 대한 회한인 것만 같다. 지난 그 시절의 레스, 젊은 시절의 레스. 그 시절이 만들어낸 지금의 레스. 


아서 레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인생을 누렸어.

돌아갈 수는 없어. 그게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니지. 이젠 사람들이 항상 너를 어른으로 생각할 거라는 뜻이니까. 널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시종일관 늙고 형편없음으로 자신을 무장한 아서 레스가 많은 사건과 사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마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하게끔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제 형편없음의 근거로 삼던 아서 레스가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에 대한 긍정적 기운을 생각하는 과정.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제 인생에서 ‘자기회복력’을 가질 시간이 필요하다. 레스는 그것을 잘 실천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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