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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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가만.


가만한 나날, 김세희, 민음사, 2019.


  가만한 당신, 가만한 생각, 가만한 나날…. ‘가만한’이 붙은 책이 많지 않은데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가만한’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이 단어는 슬픈 감정을 더욱 솟구치게 만든다. 쓸쓸하고 씁쓸하기까지 한. 격앙되지 않고 냉정할 정도로 차분하게 슬픈, 그런 기분이 오래 감돈다.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에서 감도는 전체적인 느낌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첫 단편 제목부터가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야」다.

   

네가 세상에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진아는 문득 생각했다. 눈길을 하는 연승의 얼굴,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 때면 입꼬리를 어색하게 씰룩이는 표정이 눈앞에 떠올랐다. 네가 일그러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거야」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처음의 순간이 있고 변화하는 지점이 있다. 소설을 흐르는 또다른 공통분모는 이것일 것이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사회에 첫 발을 들인 이들의 직장생활의 분투기와 지속되어 오던 연인관계에서 감정이든 상황이든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는 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참 안쓰럽고 애처로운 청춘들의 모습이 가득하다. 직장에선 마치 주위는 버려둔 채, 시야를 막은 채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매몰된 채 생존하고자 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연인관계에서의 주인공들은 자꾸만 발을 뒤로 뺀 채, 저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일그러져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지금이든 먼 훗날에 깨달은 바이든 분명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가만한 나날」의 나는 첫 직장에 대해 광고대행사에만 다녔다고 말한다. 사실은 블로그 마케팅을 했던 나는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였고 일을 잘 못하는 예린 씨를 보며 우월감을 가지기도 한다. 그때의 예린 씨는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어했고 자신감까지 잃어 갔지만 나는 아주 적성에 맞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가짜, 거짓 마케팅 일을 했던 내가 작성한 후기 중에 유해한 가습기 살균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심각한 질병을 얻고 생명이 위험함을 알게 된다. 그제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보게 되는데 이 소설은 실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연상된다. 이제 예린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다른 직장에 가서도 예린처럼 되고 있지 않을까.

  예린에게 우월감을 느낀 나처럼 「감정 연습」의 상미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당연한 듯 입사동기를 적대시한다. 직장의 상사들은 그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그 사람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그 누가라도 늘 상미에겐 적이 될 것이다. 또한 그 시스템에, 제도에 들어가 있지 못하면 「현기증」에서 보여주듯이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이 속에서 가지게 되는 감정이란 어떤 것이 될까.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현기증」


  현실이란 낭만은 허상임을 모르지 않지만 이 속에서 보여주는 직장 속에서의 버둥거림, 사회가 주는, 관계가 주는 상처 속에서 실망하고 힘겨워하며 다시, 나를 찾아가야만 하는 순간들. 그것은 또한번의 아찔함을 거쳐야 한다. 이런 슬픈 자각 뒤에 삶은 과연 평온해 질 수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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