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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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항구의 사랑, 김세희, 민음사, 2019.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책을 읽으면서 이 노래가 생각났다. 바닷가 마을이 배경이라 항구의 사랑인 줄 알았다. 항구마을을 배경으로 한 또는 항구와 연관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인가 했는데… 예상을 빗나간, 항구.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단편집인 『가만한 나날』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내용도 스타일도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소설은 10대,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는 오래전부터 남녀공학보다는 남녀를 분리했고 여학교에선 이른바 보이시한 선배와 동기들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바 없이 그저 이곳저곳 썰로 전해 들었기에 그렇다, 그랬다, 라고는 못하겠다. 무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만.

  10대들의 세상은 쉬이 변하니 시간이 흘러 문화적인 변화가 많이도 달라졌겠지만 소설에 나오는 소녀들의 감성은 아직 여물지 않은 느낌이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소설조차도 여물지 않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동질의 감정을 지나왔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무엇에 기인하는 걸까. 어느 10대들에게나 세계에 추앙받는 존재들은 있었고 그들에 대한 모방은 있었다. 그 대상이 다름에 대한 것은 아니다. 본질은 같은 거니까. 그런데, 그런데 소설의 서사와 감정이 생각보다 깊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머물지 않았던 시대라서일까.

  팬픽이란 은연중 오래된 문화였을 거라 보지만 우리나라의 아이돌 산업이 중점적으로 육성되고 활성화되는 것과 맞물려 팬픽이 확산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집중적인 문화현상이었던 모양이다. 영화 트와일라잇 또한 팬픽이 원작이라고 들었다. 팬픽에 대해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기도 했지만 소설속에 나오는 ‘이반’이란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내가 아는 이반이란 그저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뿐인 것을. 내겐 레즈가 훨씬 익숙하다.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만드는 걸까. 이래저래 찾아보니 이반이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이라 한다. 이반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는데 동성애자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부르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타인에 의해서 불린 것인지 스스로를 부르는 말인지가 더 궁금해졌다.


저런 애들 때문에 진짜 동성애자인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규인은 말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해 편견을 만들고 이미지를 흐려 놓는다고.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진짜 동성애자’였다고 했다. 규인은 인희 같은 애들이 진짜 동성애자가 아니라 유행에 따라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남과 다른 걸 하고 싶고, 관심을 끌고 싶고, 우쭐해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이다. 칼머리, 힙합 바지, 그런 게 그 표시였다.


  이성적인 사귐이 제한된 한국 사회에서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르는 대상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토록 이성애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하던 어른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성애만을 받아들인다. 그 경계에서 사람의 감정이란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속 문장처럼 유행일지도, 우정의 강도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지도, 그리고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내가 너무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그녀들의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너무 가볍다. 그렇게 느껴진다. 정말로 ‘인희 같은 아이들’이 가득했던 것일까. 그리하여 ‘진짜 동성애자’들의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이었나. 그 시간이 지나면 이성애로 가득찬 이야기를 하는 그들. 십대의 사랑은 그런 형태였나. ‘나’의 주위엔 그런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간다. 이 이야기가 그 시절 ‘나’의 사랑 이야기라 한대도 ‘나’의 주위엔 동성애적 사랑에 몰입한 대상들이 많다는 건, 정말로 ‘진짜 동성애자’들이었을까. 유행이었을까.

  심리적인 안정감이 확고하지 않은 십대의 시기에 동성애는 정체성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을 텐데 그런 고민이란 보이지 않는 가짜의 동성애 놀음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겐 엄청난 충격이고 상처였을지 모르는데 많은 이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감정이었다면 그토록 심각한 고민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 시기를 벗어나면 잊어버리고 감추고 해야만 하는 그때의 감정과 행동들. 그런 시절을 그런 상황을 통과하여 비로소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게 되는 걸까. 소설 속에서 ‘나’는 민선 선배에게 사랑을 느꼈고 먼훗날에도 다시금 그 시절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누군가를 그렇게 원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원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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