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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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만 사건처럼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문학동네, 2019


  1964년은 어떤 일이 있었던 해일까. 여름, 8월에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이 있었다.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함으로써 두 차례 교전이 있었다. 훗날 기자가 입수한 기밀해제된 미국 안전국《펜타곤 페이퍼》에 의하면 이 사건은 조작이었다.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더 오래, 더 참혹하게 진행되었다. 저 멀리 베트남에서 이뤄진 일을 미국인들은 알기는 할까. 목적을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 시대와 조국을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일이다.

  적어도 아무 일이 없던 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느낄 수는 있다. 개인의 삶에서 거시적인 사건들은 나와 무관한 일로 되어 버리기 일쑤다. 어쩜 그러한 사건들이 개개인의 삶 속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그것보다는 내 삶을 몰아치는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다 여긴다. 하지만 저렇게 조작을 일삼는 국가에서, 그곳에서 한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적 삶의 원초이진 않을까, 내 삶을 몰아치는 테두리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1964년의 여름이 지나고 겨울. 24세의 아일린은 이런 사건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무수한 거짓말과 조작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삶을. 그렇다면 먼 훗날, 그 삶을 돌아보았을 때 아일린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삶들은 아일린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무엇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게 하는 걸까요?”

   나는 비슷한 의문을 품고 몇 년 동안이나 마음속으로 논쟁을 벌여왔다. “죽이는 게,” 나는 대답했다.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야겠죠.”

   “유일한 의지처, 맞아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마약과 알콜 중독인 부모 아래 학대받으며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아일린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하며 또한 패배적인 기운을 한가득 담고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총기사고로 경찰관을 은퇴한 뒤 알콜중독 상태에 있는 아버지를 벗어나고픈 아일린에겐 직장인 교정시설 역시 행복한 장소가 아니다. 사교적이지 못한 외톨이로서 자기혐오와 연민 속에 있는 아일린에게 행복한 장소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아일린은 아버지에게서 직장에게서 벗어나고파 한다. 교정시설 동료 랜디에게 품는 짝사랑으로 스토킹을 일삼기도 하고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아일린의 스물 네 살에 어떤 점화가 있어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비쩍 마르고 각진 몸매에 움직임은 모나고 쭈뼛쭈뼛했으며 자세는 경직되어 있었다. 말랑하고 부글거리는 여드름 자국이 가득한 내 얼굴의 지형은 차갑고 생기 없는 뉴잉글랜드적 외피 아래에 있을 수도 있는 기쁨 혹은 광기를 흐릿하게 지웠다. 안경을 썼다면 똑똑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로 똑똑하기엔 참을성이 너무 없었지만.


나는 정말이지 지루하고 생기 없고 무엇에든 면역된 가식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내달리는 생각과 살인자 같은 정신으로 살았다.


  74세가 된 아일린이 24세의 아일린의 삶을 회고하는 것임을 아는 지점에서도 아일린의 목소리는 어른의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시작부터 아이의 톤으로 느껴지는데 끝날 때까지 그렇다. 감정적이고 자기혐오와 연민, 파괴적이고 망상에 찬 목소리다. 하지만 그것은 아일린의 머릿속에서 존재할 뿐 실제 아일린의 ‘목소리’로 이뤄지진 않는다. 크리스마스가 속한 일주일, 그 기간 벌어진 일들은 아일린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벗어나 입 밖으로 밀어 내게 한다. 새로 부임한 교도국장 리베카의 등장. 우아하고 매력적인 리베카에게 반해버린 아일린의 랜디에 대한 짝사랑이 리베카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또한 리베카 역시도 아일린을 바라본다.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 더욱이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차라리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분개하는 편이 나았다. 어렸을 때도 말없는 아이였고, 앞니가 돌출될 정도로 오래 엄지손가락을 빠는 그런 유형이었다.


  아일린은 서두에서 이 글은 자신이 어떻게 ‘사라졌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사라진다는 건 말 그대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스턴 그 시골마을에서 아일린은 이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랑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한 아이가 갖는 자기혐오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다. 그런 이들은 타인에게서 사랑받게 될 때 언제든 맹목적이게 된다. 아일린은 리베카와 함께 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인생이 근사하다고 느낀다. 적어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꿈꿀 수 있는 때였다. 그때에는.


“하느님은 지어낸 이야기야.” 어머니는 우리에게 말했다. “산타클로스처럼 말이야. 아무도 너희가 혼자 있을 때 지켜보지 않아. 뭐가 옳은지 그런지는 직접 판단해라. 착한 소녀들을 위한 상이란 없단다. 뭔가 원하면 싸워서 얻어내. 바보가 되지 말고.”


  바보가 되는 일은 쉽다. 어딘가에 매몰되어 버리면, 누군가에 맹목적이게 되면 그렇게 된다. 끝없이 스스로에게 움츠려들면 그렇게 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층격적인 사건을 보고도 겪고도 그것이 충격인지 아닌지 모르면 그렇게 된다. 세상은 언제나 뒤통수 칠 준비를 마치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조작과 음모를 예비해 놓고 있다. 착할수록 조작과 음모에 휘말려들기 참으로 쉬운 세상이다. 진정 사라지고 싶다면 아일린은 더 이상 애같은 투정과 언어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스물넷 아일린이 갇혀 있는 내면의 아이는 사라져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이렇다. 아름다운 곳에서 산다. 아름다운 침대에서 잔다. 아름다운 음식을 먹는다. 아름다운 곳들을 따라 산책한다. 사람들을 마음 깊이 좋아한다. 밤에 내 침대는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 위에 나 혼자 누워 있으므로. 고통이나 기쁨으로 쉽게 울며 그걸로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가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런 삶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바보같이 맹목적이며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그런 아일린이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라지는’ 방법을 찾은 이야기, 아일린은 그런 이야기가 되려나. ‘거의 모든 것을 혐오하고 항상 너무나 불행하고 화가 나 있던’ 아일린의 오십년 후는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했던 한 사람의 생애가 온전히 안정을 찾으려면 그토록 많은 세월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 삶을 위하여 언제든 스스로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리베카는 아일린에게 전환점이 되어 준 사람이다. 리베카는 아일린을 자신이 엮어 놓은 사건에 휘말리게 이끌었지만 결국 아일린은 그 사건을 자기중심으로 가져온다. 시작부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하던 이야기는 사건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사건 이후로 아일린은 더 이상 아일린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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