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고의 죽음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축 저, 은행나무, 2019-01-25.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 김광균, 추일서중 中


  폴란드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환기되는 이미지다. 폴란드는 늘 그렇게 쓸쓸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폴란드의 역사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그렇게 폴란드는 새겨져 있다.

  이 소설 역시도 그런 느낌들을 새긴다. 1910년대~1989년의 폴란드의 역사, 1‧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부터 분할 점령지였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를 살아간 개개인의 세월이, 삶이 그려져 있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휘몰아치고 휘몰아치는 때였으니 맘먹고 걸어서 1시간도 되지 않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기엔 충분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든지.

  소설 속 태고는 제주와도 닮아 있다. 4월 3일, 관련 다큐들을 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미하우와 게노베가, 미시아와 이지도르, 크워스카와 루타의 삶이, 태고에서의 시간들이 제주의 시간과 닮아 있다. 태고가 제주였고 제주가 태고였던 듯이 한 나라의 역사가, 그 역사 속 권력이 국민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놓는지를 소설은 보여준다. 쓸쓸하지만 아픔에 더 가까운 기억을 남긴다.

  소설은 독특한 서사로 이끈다. 현실과 환상,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어 익숙한 마을 태고. 그곳은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천사들이 동서남북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곳이지만 삶이 어떻게 피폐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함과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살아 있는 마을이다. 어쩌면 태고의 사방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은 태고로부터 다른 곳을 지키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철저하게 태고를 막거나. 고립. 5‧18의 광주가 4‧3의 제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 마을의 철저한 고립. 외부와의 소통을 허하지 않는 완벽한 감금. 정말로 대천사들은 사방에서 모든 악들이 태고에서 날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가. 악을 그곳으로 몰아넣고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었던가. 그게, 신의 뜻이었던가.

  “파멸 그리고 혼돈, 파멸 그리고 혼돈.”


 《태고의 시간들》에서 이야기는 조각조각으로 읊조리며 전체의 서사를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보리수와 버섯균, 신과 천사, 집과 게임에게도 서사의 장을 할애한다. 그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이 맞물려 그들 시선에서 세상을 보게 하고 세상 속 그들을 보게 한다. 이야기는 촘촘하고 작게 그려지는 듯하지만 크고 깊다. 유대인 학살과 크워스카와 루카를 향한 성폭행과 집단 강간, 그 어떤 경악스러운 이야기도 마치 전설이나 신화인듯 그림을 설명하듯 담담하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어조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마을에서 기대하는 환상과 낭만에 의해 잔혹성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남자보다 여자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남편보다 아내가 더 빨리 죽는” 이야기가 담겼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릇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강할수록 더 많은 아이를 낳았고, 그로 인해 조금씩 약해진” 여자의 이야기가 담겼다.


“혹시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세요? 왜 우리는 바보같이 이런 전쟁통에 애를 낳을까 하는…….”

“분명 신께서……,”

“신,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과 ‘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서로 균형을 맞춰야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태고의 경계에는 위험이 있다. ‘여행에 대한 불안’과 ‘소유하고 싶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과 ‘자만에 빠져 우쭐되는 것’과 ‘지나치게 영리한 척하다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욕망은 태고를 흐르는 백강과 흑강의 합쳐짐처럼 유유히 섞이어 흘러간다. 어쩌면 당연히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하에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태어나고 죽음이 너무나도 당연한 듯하기에 탄생이 어떤 형태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죽음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일어나든지 상관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인 것인지도 모른다. 대천사들은 그 죽음을 지키는 자들인 것처럼도 여겨진다.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건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전쟁과 체제 변화의 시대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위해는 비슷하다. 때때로 이름들과 국명을 지워버리면 어디서 벌어진 것인지도 모를 살인과 강간과 집단광기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에 인류의 원형은 가감없이 잔혹하고 야만적이다. 하지만 온갖 지식을 습득하고 문명을 가졌다는 시대의 이야기 역시도 원형을 품고 품어 더할나위없이 야만적이고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태고의 시간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는 방식에서 다르다. 올가 토카르축이 전하는 이 원형적인 이야기 방식은 매혹적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인간이 창조한 신이랄지, 신이 창조한 인간이랄지… 뭐, 그런저런 생각들까지도.

  

신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신은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따금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벗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면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


  소설에 담겨진 ‘신’의 이야기가 중요한가. 태고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이 행한 역사이고 인간이 당한 역사의 이야기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겪는 끝나지 않는 어리석음과 욕망의 소용돌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