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비처럼 훨훨


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문예출판사, 2018.


  도리스 알름이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못하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아흔 여섯의 할머니. 그럼에도 아흔 여섯이라면 죽음이 덜 억울할 거라 생각하기도 할 듯한 그런 나이. 눈물 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위로라고 건네고, 당장 죽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고 무심히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나이.

  간호사의 실수로 소변주머니가 터져 도리스 할머니의 온 몸에 소변이 묻는다. 하지만 간호사는 씻기지 않고 소변을 닦아 내기만 한다. 일정에 의하면 도리스 할머니가 ‘씻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티슈 몇 장을 더 뽑아 닦기만 할 뿐이다. 제니가 지적한 끝에 간호사는 실수를 인정하고 할머니를 씻기지만 보호자 없는 노인은 얼마나 무심하게 다뤄질까, 생각하게 한다. “혼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아무도 혼자 죽어서는 안 돼.” 제니의 이 말이 마음을 적신다.

  아흔여섯의 도리스 할머니가 마냥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어떠했었는지를. 그러나 도리스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이름들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고 그들의 삶이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으로 남은 조카 제니에게 남긴 빨간 수첩을 남긴다. 모든 이름 뒤에 사망이라 적힌 수첩. “살아온 삶 전체를 바라보고 싶어” 쓴 글에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담겼다.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이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제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니? 오고 가는 그 모든 이름에 대해 말이야.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또 어떤 이름은 사랑하는 이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고. 나는 이따금 내 수첩을 들춰본단다. 수첩은 내 삶의 지도 같은 것이 되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그것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싶어. 너, 날 기억해줄 유일한 사람일 네가 내 삶도 함께 기억해줄 수 있도록. 일종의 유언과 같은 거지. 네게 내 기억들을 줄게. 그 기억들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그 어떤 이름에 김복동 할머니가 있다. 28일 두 명의 위안부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참으로 죄송하게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한다. 다만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만은 또렷하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접한 후에 모든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느껴졌는데 현재는 스물 세분이 생존해 계신단다.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워 하셨다기에 마음이 무겁다. 위안부로 끌려간 때는 1940년, 14살이었고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세계 곳곳으로 끌려 다닌 끝에 돌아왔을 때는 22세였다.

  도리스 할머니 또한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 속에서 고향 스웨덴을 떠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생존을 오간다. 기억 속에는 그리운 이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과 끔찍하고 슬픈 일이 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벌어지는 일이 성폭력일진대 전쟁통이라면 더더욱 맹렬하게 일어났을 그 일. 그렇게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낳은 도리스는 그런 모든 기억들을 수첩에 기록한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삶이었기에. 도리스의 삶에 도움을 준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 그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모습들로 가득하다. 가족을 잃은 아픔, 가족과 화해하지 못하는 삶, 방황하고 우울하고, 숨어 살거나 성소수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리스는 만났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하는 헤어진 사랑하는 이의 이름 또한 수첩 속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엔 실존 인물이 있다. 실제로 작가를 돌봐 준 도리스 할머니가 수첩을 남겼고 그 수첩에 ‘사망’이라 적힌 줄이 그어진 이름들이 있었단다. 소설 속 제니는 도리스의 빨간 수첩을 보며 할머니의 삶과 조우했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약물중독자 엄마에게서 버림 받은 상처가득한 자신의 삶과 현재의 무기력한 삶까지도. 그러나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며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주고픈 제니의 마음은 살아 움직이고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찾아간다. 사랑과 용기를 북돋워 준 도리스 할머니의 힘이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우리에게 할머니의 수첩을 남기셨다. 끝까지 싸워달라고. 여전히 일본은 사과하지 않고 위안부 합의를 자랑스러운 치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권력의 핵심부에서 당당히 ‘일본편’이라 외치고 있는 현실에서 아프게 가신 할머니의 유언. 고통스런 자신의 삶의 기억을 펼쳐놓으며 일본의 만행과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인권활동가로 활동해 오신 김복동 할머니의 사랑과 용기에 감사하며 힘을 얻은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새삼 어느 나라이든 100세 즈음의 노인의 삶엔 전쟁의 기억이 가득하구나 싶다. 그들 삶이 곧 근현대사의 기록이다. 급격한 세상의 변화에서 힘겹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모두,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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