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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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리처드 파커가 있다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얀 마텔,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작가정신, 2017.


  많은 소설들이 미스터리, 반전을 활용한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모험 소설을 띠며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매혹과 환상이 가득하다. 추리 장르가 아님에도 내게 놀라움을 안겨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을 준, 반전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다. 아마도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벵골 호랑이와 아이와 함께 하는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 이야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가 더해진 파이이야기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준다. 야수파의 그림을 보는 듯한 원시적 색채는 두려움과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모험이라 했지만 사실 치열한 생존기다. 열여섯 소년 파이, 피신 몰리토 파텔 가족이 일년 동안의 동물원 정리를 끝내고 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가던 중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가라앉는다. 살아남은 다섯이 구명보트에는 올랐지만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하이에나를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잡아먹으며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이 남는다. 파이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과 벵골 호랑이만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교감하는 동화같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리처드 파커는 말 그대로 맹수, 벵골 호랑이일 뿐이다.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야 했다. 그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문제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나의 문제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으로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터였다. 그가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고 자연사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동물의 끈질김은 사람의 연약함보다 오래 버티게 마련이니까. 내가 호랑이를 길들인다면, 필요할 경우 그를 속여서 먼저 죽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파이의 노력은 227일간 지속되었다. 공포와 허기와 갈증이 가득했고 지나는 배를 보며 희망을 가지는 만큼 절망 또한 몇배가 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권태 또한 가득하다. 파이이야기의 모험이 여느 이야기와 다른 것은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이루는 이 평행한 거리다. 혹은 적대적인 듯 적당히 가까운 거리. 어쩌면 파이에게 리처드 파커는 미꾸라지 어항 속에 넣은 메기와 같은 존재였다.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이 말이 슬프고도 처연하게 여겨지는 글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육지에 이르렀을 때 리처드 파커는 떠났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파이의 울음에 공명이 큰 건 파이가 한 227일의 날들이 가진 의미를 알기에…. 생존의 의지를 붙잡고 있던 날들에 품었던 그 모든 것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리처드 파커의 이별 장면은 떠올리자마자 아릿해진다.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바다 위에서 함께 대치하던 나날의 이야기만큼이나 소설은 파이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에 할애한다. 아니, 그것은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이었다. 힌두교도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그러나 어른들은, 종교인들은 파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어느 한 신만을 섬길 것을. 이 또한 종교가 가지는 궁극적 의미에 대해, 신의 존재에 대해 묻게 한다. 조난에서 구조된 파이가 들려주는 생존기에 반신반의하는 진상조사단처럼.

  내 마음에 리처드 파커가 있었다, 라고 정년을 일년 앞두고 퇴직을 권고받은 어느 분이 말했다. 술을 먹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그날은 술을 많이 들이킨 탓도 있겠지만 그 분은 정말로 꺼이꺼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상사가 리처드 파커이기도 했다고 했었나. 그때는 파이이야기를 읽지 않았던 이유로 호랑이가 나오는 아이들용 모험 이야기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때때로 그날 장면이 떠오르며 내 마음에도 리처드 파커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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