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동조자 - 전2권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트라이앵글


동조자, 비엣 타인 응우옌, 민음사, 2018.


  베트남이 한국에 열광하고 있다. 가보지 않은 관계로 기사로 접하는 것일 뿐이지만 베트남 축구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했고 한국인 감독이 우승을 이끌었다며 감독의 나라에 대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고 있다 한다. 하긴 히딩크로 인해 네덜란드에 우호적인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 기사를 전적으로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축구가 뭐기에, 이 말은 항상 긍정의 의미를 띤 감탄사는 분명 아니다. 그냥 즐겨, 이 말도 있는데 굳이 따지는 것도 흥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감정의 어디쯤에 있을 뿐.

  한국인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난민 학살과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 아니 강간했던 역사로 베트남은 한국인에 대한 분노가 있다. 축구 우승-더구나 월드컵도 아닌-으로 상쇄될 감정은 분명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감정의 골이 깊지 않은 것인지, 축구가 대단한 것인지, 한순간의 기쁨을 언론이 과장한 것인지, 각 사안에 따라 이성과 감정의 반응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베트남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세상은 하나임을 자본은 국경이 없음을 진정 화합의 승리자는 자본인 것인지…. 이것들 하나하나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음만은 확실한.

  전지구인의 화합과 동맹을 강조하지만 이건 그냥 허울 가득한 슬로건이다. 세세하게 보면 결국 나라와 민족의 구별이 있고 개인의 이익에 따른 층계가 있다. 이토록 정교하게 세분화하며 화합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정체성과 이중성 어느 것이 살아가기 위한 말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둘 다 필요로 하면서 정체성은 가치있는 것으로 이중성은 고약한 것으로 치부한다. 단어에 이미 감정을 부여하고 있기에 이중성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이중성을 놀이에서 쓰는 ‘깍두기’라 얘기해도 될까. 게임에서 무척 부러운 자, 깍두기.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면 ‘잡종새끼’가 된다. 이 책은 그 잡종새끼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이 곧 절체절명의 이중성을 지닌 자로 고정되어 버리는 깍두기가 된 그의 이야기. 그의 양 옆에는 명확한 세계가 있고 그는 항상 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부모는 프랑스와 베트남을, 의형제 만과 본은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의 경계를 주었고 전쟁은 북베트남에서 자란 그를 남베트남에서 살게 했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로서 CIA 소속 비밀요원이기도 하고 베트콩 소속 고정간첩을 수행하고 있다.

  순간 순간의 선택으로 점철되었을 그의 운명을 그는 항상 부정한다. 자신이 가진 명확하지 않은 정체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오로지 하나, 잡종새끼로 태어나 그렇게 불린  대로 살아가는 운명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고 소모적인 일이 있을까.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선 어쩐지 끊임없는 모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가 ‘우리가’나 ‘우리에게’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셨습니다. 파견된 스파이로서 첩보 활동의 대상인 남쪽 군인들이나 철수자들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불렀던 겁니다. 그 사람들, 나의 적들을 ‘그들’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과 함께 거의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후에,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동조하는 내 약점은 ‘잡종 새끼’라는 내 존재와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잡종 새끼라 나면서부터 쉽게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잡종 새끼들이 잡종 새끼다운 행동을 합니다. 내가 내편과 다른 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배운 것은 상냥한 내 어머니의 공이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만약 어머니가 하녀와 사제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않았더라면, 혹은 경계가 허물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유로 힘든 시선 속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쪽에 있었다면 그가 선택한 것을 확고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삶이 되는 것의 아이러니와 혼란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선택임이 분명하지만 만과 본의 것과는 다른, 그 것조차도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닌가.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늘 그렇게 자신을 확연하게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이 선택을 그는 늘 자신이 잡종새끼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그의 삶의 결과는 정체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길 거부하고 있었음에 따른 것이다.


자네의 동양적인 본능을 견제하기 위해 자네는 미국인들이 나면서 배워 온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부단히 연마해야만 해.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주인공이 발끈하는 부분은 누군가가 그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몰아갈 때이지만 자신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해 무언가를 철저히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스스로를 옭아맨 것이다. 그리고 그 옭아맴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쩌면 확고한 정체성을 획득했다.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를.

  그의 존재는 양편에 의해 맥없이 희생과 착취를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시각을 보여주지 않는 존재가 된다.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시각에 의해 해석되어 왔다. 베트남인들이 그들의 목소리가 없었겠는가. 그 목소리를 제쳐두고 한국 역시 미국의 시선을 따랐다. 게임에 참여하는 깍두기처럼 이편, 저편이 되어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위선과 모순을 경험할 수 있었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 시선.

  인간은 항상 이중, 다중의 인격을 가지고 제 이익을 취하며 살아가면서도 ‘정체성’을 강요한다. 권력의 처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인이 취해야 할 정체성이란 결국 어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서 내가 누구인지, 취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삶의 태도와 방향을 설정하는데 힘겨워한 주인공의 간절하고 처절한 고민이 얼마나 허무하게 박탈되어 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 감정이 이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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