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도 찾아가는 곳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8-2-20.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모두의 이상을 모아 만든 유토피아에 이 문구를 걸었다면 그것은 자만일까 경각일까. 아르카디아는 “순수한 것. 대지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대지와 더불어 사는 삶. 상업주의라는 악마에게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일구어나가는 삶. 우리의 사랑이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는 것”을 희망하며 일군 공동체다.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비트’의 일대기는 아르카디아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과도 같다.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트는 그곳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존재이며 그곳에 대한 애정을 지우지 않는다. 비트는 그 공간에서 꿈꾸고 희망하고 사랑했다.

  비트의 시선으로 보는 아르카디아는 흔히 이야기되는 유토피아의 모습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때의 유토피아는 환경적으로는 아름답고 깨끗하고 문명이 거치지 않은 듯한 자연풍광을 가진 섬으로 묘사된다. 또한 함께 토론하고 일하는 사회다. 희망을 안고 출발했던 공동체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1970년대 히피 문화가 그러하듯이 아르카디아는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맞는 규칙을 정했지만 히피문화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약물은 그들의 지향을 무너뜨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실제 히피문화가, 그들의 저항운동이 보여주었지만 자유의 상징이 왜 마약과 약물의 절정으로 치닫는지는 참 모를 일이다. 자유와 방종의 그 끈끈한 관계. “자유가 너무 많으면 공동체는 썩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빨리.”  

  아르카디아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난 후 최초로 태어난 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비트이기에 그가 아르카디아에 갖는 남다른 애정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인구과밀과 가난과 굶주림과 갈등이 이어지고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아르카디아의 변화되는 모습에도, 사람들은 흩어지고 아르카디아는 와해되었어도 비트는 아르카디아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행복했던 곳으로 기억되는 곳, 아르카디아.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정신에는 자기 고유의 공간이 있고  자기 안에서 지옥의 천국도, 천국의 지옥도 만들 수 있다”는 『실낙원』의 문장이 비트에게 일찌감치 각인되었을 지도 모른다. 비트는, 이미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을 이상적인 곳으로, 유토피아로 구현해 놓았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곳이 무너졌든 아픔과 상실을 겪었던 곳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아르카디아의 바깥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기억 속에 더 크게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실험이 모두 아름다웠던 건 그곳이 시골이어서가 아니란 걸 모르시겠어요? 중요한 건 사람이었어요. 서로와의 연결,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했던 그 친밀함, 그것 때문이었다고요. 지금 시골 마을들은 다 죽어가고 있어요. 미국적인 작은 타운이란 것은 죽어가고 있고, 지금 그때와 같은 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여기, 도시예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바로 여기라고요. 이곳, 여기. 지금이 유토피아보다 더 유토피아예요. 이웃이라고는 딱따구리밖에 없는 아버지의 숲속 작은 집보다 더 유토피아라고요. 모르시겠어요? 우리 아이들 전부가 여기에, 아르카디아 아이들 거의 전부가 여기 도시에 있잖아요. 우리는 모두 도시로 왔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요. 여기가 그것과 가장 가까운 유일한 곳이에요. 친밀함. 연결. 이해하시겠어요? 다른 곳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비트가 외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간적인 특성이 유토피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함께 했던 공동체의식, 그러한 것들이 유토피아를 규정한다는 것을. 그러나 현재 안전하게만 보이는 도시 공간 역시 지속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비트가 사진작가로, 교수로 살아가는 도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된다. 알 수 없는 병이 휘도는 세상을 떠나 비트가 찾아간 곳은 아르카디아다. 엄마가 없는 그의 딸 그레테와 루게릭 병을 앓는 그의 어머니 해나와 함께. 어쩌면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을 떠난 뒤의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한 이유일지 모르나 다시 돌아온 폐허가 된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에서 비트가 보는 것은 유토피아와도 같은 지상낙원의 아르카디아, 그때의 모습이다.

  소설의 분량은 제법 되는데도 아르카디아에서 벌어진 사건보다도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는 문장이 많다. 그렇기에 비트의 긴 인생의 시간은 너무나 쉽게 축소되어 이야기된다. 매력적이게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에 비해 아르카디아가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쉽게 아르카디아의 몰락이 서술되었다는 것도 크지만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공동체적인 질서를 갖추고 생활하는 모습이 매우 적게 서술되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르카디아가 시골이어서 유토피아가 아니라 서로간의 친밀함과 연결이 유토피아였다는 말,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아의 대표인 핸디는 공동체의 리더로서의 역할과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아르카디아의 환경을 제외하고 애당초 아르카디아라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었나 싶고 핸디가 왜 아르카디아의 리더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써 갖추려던 아르카디아의 공동체적 질서가 이상적인 지도자에 의해 잘 운영되고 곧 쇠락이 이어졌더라면 아르카디아의 실패를 더 안타까워했을지 모르나 아르카디아를 세우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던 비트의 부모, 에이브와 해나의 노력에 비해 턱없이 아르카디아는 무너졌다. 유토피아는 결국 신기루인가 싶을 정도로.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친밀감과 연결이 잘 형성되고 공동체적 질서가 잘 유지된 이상향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어느 휴양의 섬같은 이미지로만 작가가 아르카디아를 그려놓은 듯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화를 읊조리는 듯한 작가의 문장에 힘입어 나홀로 그렇게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등장인물 역시도 인과가 명확치 않은 채로 흘러 서사는 묘사에 숨겨진다. 그럼에도 아르카디아를 읽고 나면 길도록 쓸쓸함과 비트와 비트의 아버지, 에이브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아, 그건 서사의 힘이겠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으로 아르카디아를 그려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수많은 이야기들은 ‘문명’이 가해지지 않은 모습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문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음인가.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도 찾아가 머무는 곳. 유토피아. 비트의 생각처럼 유토피아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의 공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