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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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재해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열린책들, 2018-04-15.


  얼핏 창밖을 보았을 때 주차된 차량 사이에 숨은 듯 서 있는 한 소년에게 시선이 갔다. 아무리 보아도 중1은 넘지 않은 듯한 소년의 손은 간격을 두고 입을 향했다. 내가 주시한 것은 소년의 손가락 사이에 든 ‘무언가’였을 게다. 절대 새우깡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 내가 본 것이 착각이리라 생각하는 사이 소년은 사라졌고 담배를 본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는 내가 이상하고 우습게 느껴졌다. 새벽 여섯시 즈음 발생한 교통사고, 무면허 고교생이 운전했고 탑승자 다섯은 중고생이며 이 중 네 명 사망, 음주 여부 확인하는 중이라는 기사를 보고서도 그랬다. 

  뭐랄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 지 몰라 생각을 정지시켜 놓은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 앙투안에게 딱 그랬다. 어떻게 앙투안을 바라봐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인생을 위로하지도 격려하지도 질타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있었다. 감정과 이성이 제각각 분리되어 서로의 의견을 내달리는데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았다. 최근의 잇따른 사건들, 촉법소년들이 벌인 무수한 사건들이 겹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뿔난 소년의 주먹 한방에 여섯 살 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무덤에 곱게 묻힐 기회도 없이 나무 구멍에 은폐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죽이게 된 앙투안이 제일 먼저 할 일은, 한번 더 아이를 후려치는 일이었다. 왜 죽어 버렸느냐는 울부짖음과 함께. 실종된 아이, 레미를 찾기 위해 작은 마을 보발 사람들이 수색을 벌인다. 곧 마을에는 엄청난 재해가 닥친다. 사흘이라는 시간, 운명은 누구의 편이었을까. 소설은 레미를 죽이고 시신을 은폐한 열두 살 앙투안의 불안과 공포, 혼란이 전반을 차지한다.

  

삶은 결국 승리해야 한다……. 이것은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삶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는 상태로 계속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실이란 것은 각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고, 쓸데없는 걱정들에 사로잡혀 봤자 아무 소용없으며, 그것들을 쫓아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앙투안의 어머니 쿠르탱 부인은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에서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타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에게는 완벽하게 전수되지 않은 듯하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닥친 재난은 어린 레미를 찾는 일을 이차적 관심사로 내려버리고 레미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그렇게 십이년, 앙투안은 레미의 일을 추억의 한 사건으로 인식하며 살았지만 순간순간 들이닥치는 공포와 고통, 불안으로 시달렸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으니 삶은 결국 승리했을지 모르나 그 일을 쉬이 ‘무시’해 버리지는 못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겼고 레미의 유골 또한 발견되었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의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성인’ 앙투안의 심리가 이어진다.


동이 텄을 때, 그는 자신이 에밀리와의 그 일을 통해 스스로를 심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은 교도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가 미리부터 혐오해 마지않던 삶을, 그가 끔찍이 여기는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보내는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가 증오하는 환경 속에서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의 형벌이었다. 그의 삶 전체를 내놓는 대가로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아침에 앙투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앙투안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때, 나도 인정했다. 애매하게 있는 내 마음에서 좀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른 앙투안에 대해서는 연민하지만 앙투안이 그 죄를 은폐하기로 한 ‘의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나름 앙투안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마을에 닥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까. 조금 양보해서 자연재해 탓이라고 하자. 자연재해에 따른 위약금이나 환불이 없기도 하니 사흘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 앙투안의 일이 덮인 건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하련다. 생각하는 바는 성인 못지않으나 ‘고작 열두살’일 뿐인 앙투안이니 이해를 가지기로 하자.

  하지만 ‘성인’ 앙투안에게서는 달라진다. 앙투안은 고작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뿐이다. 앙투안의 패배 선언에서 일순간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 레미를 죽게 했던 어린 앙투안처럼 내 마음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앙투안의 처벌이 십이년 동안 유예된 것이라 한다면 앙투안의 삶은 보다 성실하고 착한 형태였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순간의 실수도 없이 그는 모범적인 삶을 보여줘야 했다고. 그래서 어린 레미를 때리던 순간의 감정처럼 움직인 앙투안의, 아니 ‘성인’ 앙투안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연민하지 못하는 것이구나라고. 기본적으로 앙투안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레미를 죽임으로써 받는 형벌이라고 여기는 그 마음에 대한 반발인지도.

  어느 날엔가 또다시 레미를 죽인 범인을 파헤치는 일이 생긴다면 앙투안은 어떻게 할까. 또다른 은폐를 위해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이 명백한 자기합리화에 나는 떨고 말았다. 그러나 나또한 앙투안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떨림이다.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될 때면 무언가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이 깨달음의 불편함이 길게 갈 듯하다.

  소설은 흡입력 있게 읽혔다. 추리와 스릴러라기엔 애매하고 세밀한 심리묘사가 좀더 눈에 띄었다만 이 책 소개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비교하는 건 너무 심하게 나갔다 싶다. 다행히 책을 다 읽고나서야 그 문구를 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모든 것은 자연재해 탓이라 했지만, 요즘 자연재해의 대부분은 결국 ‘인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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