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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ㅣ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어머니는 어디에
뱀과 물, 배수아, 문학동네, 2017-11-10.
난 좀 정치적인가. 소설 속 여왕과 득실거리는 쥐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 이것은 그런 이야기인가 싶었다. 아니 그런 쪽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내가 있던가.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은 책이 되었다. 그럼에도 제법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한마디로 하자면 배수아의 책이란 말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의 이름 속으로 이야기가 종속된다.
7편의 단편은 이어진 이야기처럼 동일한 장소와 사건,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동일한 사람과 장소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충격의 떨림, 경악과 분노가 강렬한 이미지와 혼합된 『뱀과 물』을 읽어가는 것은 그렇기에 힘이 든다. 글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힘이 부친다.
어린 왕자 속 보아구렁이가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보면서 무섭고 징그럽다 생각한 적 없는데 밭일 하던 여성을 삼킨 비단뱀은 기사제목만 보고도 끔찍함에 몸이 떨린다. 동일한 뱀의 동일한 행위에 대한 내 반응이 다른 것이 실화에 대한 것이라면 단지 소설인 「뱀과 물」의 뱀에서 그려지는 이 자지러지는 끔찍함은 왜인가.
첫 단편 제목부터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라니. 눈 속에서 불타는 아이의 모습을 기어코 상상하게 만드는 작가는 시종일관 충격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음에도 톤이 한결같다. 화형대에 타버린 시신을 나무토막의 일부로 보는 것처럼 뭉툭하게 이야기를 날리고 있다.
단편들마다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라고 해야 할지 소년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니 그냥 아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아이들은 “일곱 살 생일까지는 남자애지만 이후에 여자애”가 된다. 생물학적인 변화는 아니다. 그저 여왕이 일곱 살 이전의 여자아이를 잡아가기 때문에 남자로 변장을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쫓아오는 여왕의 공포를 피해서 아이들은 부재하는 어머니를 찾아 낯선 곳을 향해 아버지와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부닥치는 고통의 현장들, 기억들이 존재하고 때로는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이 살고 있는 터전은 두려움과 막막함이 가득한 세계, 그러니 아이들의 시절 또한 아름다울 리 없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죽음과 시간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쫓으려는 시도는 버렸다. 잡았다 생각하는 순간 사라지고 강렬한 이미지에 압도될 뿐이다. 마냥 쓸쓸하고 적막한 국경지대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심정을 가득 안고서 기다리는 것이 희망인지 절망의 마감인지 모를 상태로 서 있는 기분이다.
“저기 미친년이 간다.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에 어머니는 부재하며 아이들은 여성임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 그곳. 그곳은 마치 ‘여성’이라는 운명이 본질적으로 슬프게 아프게 흘러갈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여성의 힘이 먹히지 않는 세상이라도 되듯이. 그곳에서 자라나야 하는 소녀들은 뱀과 물에 의해 폭력당하는 운명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처럼. ‘뱀’과 ‘물’이라는 이름을 획득한 알몸에 황소 마스크를 쓴 두 남자. 학대와 윤간과 살해와 낙태를 감행하는 ‘뱀’과 ‘물’의 이야기에 소녀들이 일곱 살 이후에도 영원히 남장을 하고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고 만다. 잔인한 폭력의 경험으로 결속되는 이 슬픈 소녀들의 이야기가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