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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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거다. 

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귤프레스, 2018-01-22.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수많은 감정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세상에 다행이라니.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 한밤중 닥친 소식에 망연하던 정신은 어디 가고 장례가 끝났다고 다행이라니.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장례식 내내 슬퍼하기 이전에 전투적이 되었던 나. 돌아보면 장례 전까지 매일을 긴장 상태에 있었다. 두 명의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이입된 모양이다. 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병원에 계신 엄마는 매일을 시어머니를 방문했다. 물론 아버지와 번갈아 가시긴 했지만 미음을 끓이는 일은 엄마의 몫이고 할머니 상태를 묻는 시누이들의 잦은 전화에 답하고 나면 ‘우리 엄마한테도 가야 되는데’라는 말을 읊조리셨다.

  “할머니랑 외할머니랑 같은 날 돌아가시면 어떡해?”

  아버지는 할머니 장례에 엄마는 외할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엄마는 시어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작은 어머니, 작은 며느리였다. 작은 며느리는 실제로 그런 집을 본 적이 있다며 그 집은 각자 자기 부모님 장례에 가기로 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런 집을 보았다는 얘기의 결말이 왜 우리 엄마는 자신의 엄마의 장례식이 아닌 할머니 장례식에 가야하는 것으로 귀결되나. 

  “큰며느리니까.”

  그 집은 다행히 ‘작은 며느리’라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작은 어머니는 말했다. 그 순간 또다시 더할 수 없는 경계를, 벽을 느끼고 말았다. 엄마는 아무말씀 하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런 거다”라고 말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고 무수한 돌멩이가 날아오는 기분이 들진대 울엄마는 어땠을까. 그러니, 우습게도 난 장례식 순간순간 외할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물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는 장례 기간에도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경계짓는 아들과 며느리, 며느리와 시누이의 역할, 관계들.

  웹툰작 『며느라기』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정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적나라한 이 가족의 모습이 ‘내 가족’의 모습이 아니라고 ‘내’가 겪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며느라기』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며느리”들은 모두가 힘겨워하면서도 ‘함께’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찜찜한 무언가를 느끼면서도 결코 문제를 보려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진다. 똑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공감은 없이 나 혼자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고 있다. 왜 이렇게 문제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서로 힘겹다 말한마디, 연대할 말조차 잃어버리고 있는가. 가족이라면서.

  며느라기. 우리 엄마는 기꺼이 “며느라기”가 받겠다고 말했을까. 큰며느리는 이 가정에 들어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의무와 책임이 크다면 큰며느리의 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큰며느리는 이제 다가올 시아버지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생일날 돌아가신 시아버지 덕분에, 생일날 제사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나날이 오래되었다. 어떤 시누이는 그렇게 말했다. “생일이라고 사람들 다 모이라고 시아버지가 그날 돌아가신 거야.”

  좋게 들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냥 곱게, 좋게 듣기엔 찜찜한 말들이 “며느리”들에게는 가해진다. 속상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그렇다고 듣지 않았다고 하기엔 한으로 쌓일 말들을 며느리는 담고 있다. 나또한 ‘며느리’ 입장으로 고모들을 보면서 ‘시누이’라는 역할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 가부장제 문화에 길들여져 이제는 대꾸하기도 싫어져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 되어버린 날도 적지 않다. 그러니 또, 그렇게 누군가를 무언가를 비판하려 할 때면 못한 일이 생각나 움츠러들고 만다. 결혼 전 민사린이 똑부러지게 무구영에게 효도에 대해 일침하다가도 결혼 후 예쁨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문화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모두가 힘겨워한지 오래되고 행복하지 않은 문화가, 지속되고야 마는 이유는 무언가.

  연애기간 처음 남자친구 집에 가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생각하는 김혜리에게 “가사도우미 면접 보느냐”는 물음이 이토록 명확한 물음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명절이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입장이 명확히 바뀌는 모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상의 모습이 드라마로 나타날 때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라며 흥분하면서도 “우리집은 안그래”, “나는 안그래”라고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제쯤은 변하겠거니 하면서도 아직은 먼 길. 수없이 이런 이야기들이 난무해도 늘, 내가 겪는 일은 아니라며 나는 아니라며 버티는 것일까.

  『며느라기』에서는 모두가 힘겨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쇼파에 앉은 ‘아버지’만이 그대로다. 그 어떤 불편한 표정도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 그 존재로 인해 이 사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을 『며느라기』그림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불편하고 속상하고 부당함을 느끼는 모두가 밖으로 나간 상황에서도 쇼파에 드러누운, ‘아버지’라는 존재. 늘 고부갈등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이런 문제의 중심은 ‘아버지’라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땅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 며느리들 서로간의 감정적인 소모전으로만 치닫고 있다. 무어 그리 큰 권력이라고 떡 버틴 ‘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삶들이 이어져야 된단 말인가.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딸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말해놓고 돌아서서 며느리에게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변화.

  “그런 거다”

  같은 며느리에게서 ‘며느리 역할론’이 나왔을 때 느껴야 했던 자조가 더 컸던 것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기에, 그 힘겨움을 가장 잘 알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대했던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도록 며느리의 힘겨움이 토로되면서도 변화가 없던 것이 그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픈 욕구가 강한 나머지 ‘나’에게만 집중해서일까. 각자가 살아남는 방법밖에 달리 없었기에. 같이 힘겨움을 나누고 방법을 고민하지만 그 전투력은 또한 실상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걸까.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겨운 큰며느리의 삶을 사는 엄마를 보면서 수년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슬프다.

  더 많은 가족이 모이면 모일수록 가족 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무너져 버리기도 하고. 가족들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가족만으로는 해결이 힘들다는 것을,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느낀다. 그런데 이 변화를 위해 가부장제의 확장된 틀인 사회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으면 희망보다 자조가 먼저 치솟는다. 미투나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법과 대안에 대한 얘기도 무수히 흘러왔겠지만 '하지마‘라는 것으로만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바꾼 일도 없는데 벌써부터 지치게 된다. 이런 얘기에는 감정이입도 많이 돼서 쉬이 지쳐버리게도 된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감정이입이 되다 보면 쇼파에 누운 아버지도 언젠가는 쇼파에서 내려오는 일이 많은 가족들이 쇼파에서 멀어져 집 밖을 배회하는 일이 소멸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 깨달음을 느끼도록 이런 책들이 나오는 것이고. 생각해보니 쇼퍼에서 책읽기만큼 편한 일이 어딨나 싶다. 더구나 그림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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