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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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로 버티는 세상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문학동네, 2018.


  난 실격당하지 않았다. 공연을 끝까지 지켜보았고 결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않았으니 관객으로선 제대로 ‘실격’인가.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의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웃지 않았음을 빼고 나면 도발레와 나 사이에 감정의 공유라는 건 없다. 그럼에도 자리를 뜨지 않은 건, 뜨지 못한 건, 당혹과 불편함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들어오는 훅. 이야기, 이야기. 제 생애를 고백해 오는 이에게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감정적 폭력. 당신은 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가,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가, 왜 내 감정을 볼모로 잡는가. 나는 너를 모르기에 고개를 숙여 이야기를 듣기도, 몸을 뒤로 빼어 적당한 때 달아나기도 어정쩡한 몸놀림으로 있어야 한다. 자칫 동정하거나 판단하려 할 지 모르는 자세로 있는 나를,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편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마침을 알아야 하기에 그저 듣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속성이 조롱과 유머와 음담패설의 극대화라 해도 시작부터 시시때때로 그 대상이 되는 건 늘 여성이다. 158cm의 작고 마른 쉰일곱의 도발레가 그런 공연을 펼치는 동안 익숙한 사람들은 적당히 웃고 즐기고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순식간에 열네살의 도발레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폭력에서 폭력이 전이된 것처럼 시온주의자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또래들에게도 놀림받고 왕따당하는 어린 도발레가 등장한다.

  작고 마르고 안경을 낀 도발레는 무수한 이들의 발길질과 따귀를 피해 물구나무서서 걷고, 달린다. 그래서 또 아빠에게 폭력을 당하지만 물구나무서기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엄마를 위한 도발레의 공연이다. 도발레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인 엄마가 웃기를, 우울증으로 자살을 반복하는 엄마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를, 엄마가 다른 생각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는 도발레의 노력이다.

  군사캠프에 가기 전까지 도발레는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와의 유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열네 살 아이가 군사캠프에서 생활하는 이곳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끊임없는 공격은 이렇게 일찍부터 어린 아이들을 착실히 준비시킨 덕분으로  가능했다. 여전히 또래들에게 놀림의 대상인 도발레가 그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생애 처음으로 가야하는 장례식 때문이었다. 군용차를 타고 운전병과 집으로 오는 오랜 시간 동안 장례식이 무언지 모르는 도발레가 겪는 궁금증, 기시감, 불안감, 그리고 엄마와 아빠에 대한 기억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도발레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가는 동안 개그 경연대회 준비랍시고 마구잡이로 유머를 던지는 운전병이 있다.   

  도발레는 인생이야기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 말하며 그냥 말뿐이나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라고 말하지만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끝까지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지 않고 떠나간다. 하지만 40년 동안이나 만난 적 없는 옛 친구, 아비샤이 라자르를 찾아내어 공연을 봐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제 이야기를 쉬이 여기지 말라는 도발레의 당부가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에 빠져 있는 전직판사 아비샤이가 도발레의 초대에 응해 이야기를 듣는 반응은 마치 나의 반응과도 같아서 놀란다. 작가가, 도발레가 아비샤이가 되어 이야기를 듣도록 이끈다. 과거의 삶 속에 등장했던 아비샤이로 인해 도발레의 이야기는 허황된 코미디의 소재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가진 인간의 삶의 이야기가 된다.

  아비샤이는 도발레가 공연을 펼치는 동안 한때 그들이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임을 기억하며 또한 캠프에서 왕따당하는 도발레를 외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슬픔과 고통속에 살고 있던 도발레로부터 받은 성숙한 위로와 배려, 캠프를 떠나는 도발레에게 닥친 상황을 모른체하던 그 시절, 자신의 현재의 상황과 대비하며 내면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펼치는 아비샤이는 무대 위 도발레와 대비된다. 마침내 아비샤이는 깨닫는다. 도발레의 ‘광적인 수다와 신경질적인 개그’에서 자신이 잊어버렸던 것을 찾았음을. 누구도, 무엇에게도 받지 못한 위로를 도발레를 통해 받았음을.

  

개성의 광채, 나는 생각했다. 내적인 빛. 아니면 내적인 어둠. 비밀,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 오래전, 내가 판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순진하게도 피고인이건 증인이건 내 앞에 선 모든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했던 것. 절대 무관심하지 않겠다고, 나의 판결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 맹세했던 것.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비로소 도발레와 ‘나’ 사이에도 감정의 공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불편함과 당혹함은 그것보다 더 큰 감정으로 인해 구석으로 밀려난다. 역사의 흐름 속,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시스템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이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슬픔을 생각하지 않도록 유머를 건네는 이들로 인해서 버티어 올 수 있었구나 싶은.


저 사람한테 잘해줘, 엄마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만 살다 간다는 걸 기억하고, 그 사람들이 그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해.


  도발레의 직업 선택에 분명 엄마의 말과 운전병의 개그가 영향을 미쳤음엔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타인이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일은 잠시 멈추어도 좋지 않을까. 도발레가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 위해선 그가 마음속에 가두었던 감정의 토로가 필요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만든 도발레 자신이 기획한 아비샤이를 초대한 그 공연처럼. 도발레가 진정 슬픔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 기꺼이 슬퍼할 수 있는, 화를 낼 수 있는 길로 들어서기를. 존재로 인한 슬픔이 존재로 인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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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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