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한방은 없다
서른의 반격, 손원평, 은행나무, 2017-10-23.
1988년은 88올림픽으로 규정되는 해이다. 다른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은 채 올림픽이 그 해를 잡아먹었다. 언제부턴가 특정 해에 태어난 이들이 그들만의 하소연, 푸념, 체념, 분노들을 쏟고 있다. 그 해에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들로 인해 삶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그들에게 따라다니는 재난들이 있다고. 그래, 그래, 그 해에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힘들었겠구나 싶지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해 특정 세대만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기에 사건만이 다를 뿐 그들의 외침은 같다. 한줄로 줄여, 살기 힘들다는 외침이니까.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인 이 책 서른의 반격에선 88년에 태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 88년생이 서른인 2017년의 현재에 그들의 삶은 힘겹고 그렇기에 그들의 연대는 싹튼다. 서른의 그들은 가벼운 한탄에서 진중한 분노로 현재를 말한다.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현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엄마의 힘겨운 투쟁으로 ‘추봉’이 아니라 김지혜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린 김지혜의 현재 직업은 아카데미의 인턴이다. 인턴 역할이란 복사와 강의용 의자를 정리하는 일과 같은 잡무다. 엄마의 한방같은 강렬한 투쟁없이 김지혜는 언제나 속으로만 들끓는다. 업무를 지시하는 상관의 부당함에 대해. 작고 작은 일들 하나하나에서도 설움과 불편함, 부당함을 느끼는 일상을 견디고 있을 때 자신과는 다르게 항변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고, 보는 것은 충격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한사람의 시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카데미에서 만난 네명은 '을‘의 삶을 분개하며 점차 굴복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은 움직인다. 서른살 동갑 규옥의 힘찬 의지에 힘입은 네명의 행동은, 퍼포먼스 같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의 반격은
반기일까 반항일까. 놀이인가?
세상은 경직돼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이런 행동을 통해 그들은 재미와 통쾌함을 느낀다. 부당함에 속만 끓이며 무력하게 대꾸한번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함께 하기에 힘을 낼 수 있었고 반란을 행하는 하나하나에서 활력을 얻는다. 다만, 이런 그들을 지켜보는 난 활력을 얻지도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이런 행동들로 구치소에서 밤을 지세우고 난 후 “하찮아서 다행”이라 말하는 지혜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반란을 꿈꾸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세웠던 규옥의 목소리가, 그 목소리에 이끌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했던 지혜의 목소리가 헛웃음 짓게 했다. 반란의 방식이, 이렇게도 허무해져도 되는가 싶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재미처럼 반항을 하는 것과 부당함에 항의하는 것이 별개의 일인 것처럼 되는 것이 안타까이 느껴졌다. 또한 일상에서 겪는 작은 부당함에 정녕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서, ‘젊은’ 세대의 합리성이, 규율에 대한 거부가 젊은 세대를 규정하던 것이었음을 생각하면서 씁쓸했다.
부당함과 불합리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갑’과 ‘을’의 문제라고 하기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고 하기엔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는 자의 위치를 규옥으로 정했을 때 지혜가 느끼는 것처럼 일종의 배신감과 허탈함이 들 수밖에 없다. 마치 다른 존재인양 지혜와의 동일선상에 있던 규옥의 위치는 달라지게 되고 부당함에 대한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옥의 의견은 ‘합리성’ ‘올바름’의 승리가 아니라 태생적 갑의 위치가 있음을, 그것이 개인의 주장을 더욱 힘있게 낼 수 있는 위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기에다가 규옥의 의견을 동조했던 것에 ‘이성적 끌림’을 더할 때 사실상 그것이 가져올 결말에 대해 예상이 가능하게끔 여겨지게도 된다. 결국 지혜의 스스로의 통렬한 자아반성과 의식을 촉구하는 결말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결론도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지혜가 또다른 지혜에게 뒤늦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것은 규옥에게서 얻은 용기의 힘일까, 인턴에서 ‘정규직’이 된 힘일까.
반전과 반란이 있던가. 현실을 생각할 때 서른의 반격에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너무나 큰일들을 겪기에 소설속에 나온 이 정도를 너무 무심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걸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