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 은유, 기계, 미스터리의 역사
샌디프 자우하르 지음, 서정아 옮김 / 글항아리사이언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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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의사가 책이라는 문구로 소개되는 책들이 제법 된다의사가 책이라고 하면 흔히 건강서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책도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와 엮어서 심장에 관련된 의학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서술한 것이다심장이라는 몸의 기관은 예전부터 감정과 영혼등이 거하는 장소라 간주해왔다그러한 의미에서 심장을 비유하여. '~ ~ 심장'이라는 식으로 많이 지칭되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역할을 심장이 하지 않는 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생물학적 심장과 은유적 심장은 여전히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책의 초반에 소개 되는 다코쓰보심근증이라는 것은 '상심증후군'이라고도 불리며, 연인과의 이별, 배우자와의 사별과 같은 극도의 스트레스나 슬픔에 반응하여 심장이 급격히 약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증세는 심장마비와 유사하다. 정확한 원인은 없지만 정상적인 심장에 아드레날린 수용체가 분포하는 양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드레날린 수용체 분포의 밀도가 높은 곳일 수록 감정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심장은 사실상 정서적 삶의 기록지다.(p.36)'


이런 은유적 심장은 그것을 기계로 보는 관점이 서서히 확산되면사, 신비는 다소 사라지지만 여전히 심장이라는 곳은 신비스러운 기관이다책의 분량 대부분이 2부인 '기계' 할애 되어 있으며심장에 대한 의학적 접근 가능성의 발전을 보여준다 과정에서 다소 소름끼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많았다자기실험을 한다거나  사형수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다거나 하는... 그런 집요함이 기술의 진보를 이루었고, 인간에게 질환에 대한 해방을 다소간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측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재미있었지만, 이해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자의 에피소드가 중간중간 뒤섞이며 이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만 기술의 기본 원리나 의학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어느정도 선에서 있을 뿐이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현재는 답보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정체에 활로를 제공할 있는 것은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이며그것은 심장질환에 있어서 사회심리적 요인을 강조하여 보자는 것이다. 심장의 건강을 위하여는  여러 건강한 생활습관이 당연하게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은유로 말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상처받은 심장은 사람을 죽게 할수 있으며', '실존의 고통이 우리를 억누를 심장은 삶을 주도하고 방어하는 기관으로서 빠르고 인도적 죽음 선사하는 안전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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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에도 내가 책을 읽었나? 14년전 오늘은 호빗을 읽었네. 한번씩 이렇게 올라오면 깜짝한다. 야이..c 내가 저런 생각을 했구나 싶은 것이지.

그나저나 이 놈에 소심함은 너무 피곤하다. 하루 쉬는데 마음 편히 쉬지도 못했다. 분명 객관적으로 봤을때는 별거 아닌 게 분명하지만 너무 신경이 쓰이고 안 좋은 쪽으로 상상에 상상을 더하는 것.

안 좋은 습관인데. 역시 쉅게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다.

출근하기 싫다 증말. ㅠㅠ 걱정에 책도 제대로 못 읽었다.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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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준호 교수의 <조선사회사연구>를  읽고 있다. 족보와 씨족을 다룬 챕터만 읽었다. 


 지금 족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이전에는 가계전슬, 내외보, 팔고조도등이 작성되고 있었다. 족보라면 공통의 조상으로 시작하여 뻗어나가는 가지를 중요시 하는 반면에  가계전승, 내외보, 팔고조도 등은 나를 중심으로 올라가는 형태다. 그리고 15세기~17세기에 작성된 족보의 경우에는 17세기 이후의 족보와 달리 남여차별 없이 나이순으로만 기재순서가 정해졌고, 외손도 상세히 기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뼈대 있는 가문이라 떵떵 거리는 가문들의 구성원이 족보를 왜 그렇게 중요시 하였을까? 그것은 물론 유교적 이념의 문제, 그러니까 친척들이 남 보듯 하는 것에 대한 한탄도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그것 보다는 군역의 문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한 문제가 주요 했다. 족보가 군역면제의 주요한 증서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관에 대한 문제인데, 아직 이 부분은 다 읽지 않았지만 중국의 본관제와의 차이점이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본관이 조상이 거주했던 행정구역명이란 것은 동일하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후손이 더이상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음에도 계속 이전에 조상이 거주했떤 지역명이 본관으로 쓰이는 반면에, 중국은 조상이나 본인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핏줄이라도 달리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모호하다고 하였으나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은 뚜렷하다. 


지금 현재는 조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보학이 중요하지만, 당대 조선의 양반들도 제일 중요한 학문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신분변동에 따라 양반의 수가 급증했다고 보는 시선에 대하여 저자는 부정적이다. 보학에[ 밝은 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말고도 전국단위로도 양반의 가문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양반 행세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임란과 호란에도 신분제 등이 오히려 강고해졌다는 부분에서는 갸우뚱거리게 만들기는 하지만, 일단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더 고민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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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에 양반(지방양반)들의 존재양태와 신분제와 관련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고 있다. 오늘부터 <조선사회사연구>를 읽고 있다. 보아하니 조선시대 신분제와 관련하여 한영우, 이성무, 유승원, 송준호 이 4명의 연구자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다.  아직 <조선사회사연구>를 다 읽은 것은 아닌데 상당히 강한 성격이라는 느낌이 든다 논쟁을 주저하지 않는 듯 했다... 논문에서 이런 느낌을 받기 쉬운 건 아닌데 한창 연구활동을 했을때는 어떠했을지 잠깐 궁금증이 일었다. 사실 이런게 재미긴 하다.  책을 낸 것이 정년이후 인 것 같으니까 지금은 상당히 고령일 것이다. 요즘에는 다소 소강상태라 하는데 이런 현재 논쟁을 이끌어 나가는 학자가 있을까? 일단 많이 인용되고 있는 저자 기준으로 읽어보고 있다.


이성무 교수는 재작년에 작고한 것으로 안다.  아들이 이희진 교수(한국항공대에 있던가?...)다. 한국통사를 공저하여 낸 적도 있다.  <조선사회사연구> 읽고 나서는 <조선초기 양반연구>를 읽을까 싶다. 이 책은 정말 한자투성이라 논지를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 주제를 읽고 있으면서 참고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사전(http://waks.aks.ac.kr/rsh/?rshID=AKS-2013-CKD-1240001) 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과제사업으로 구축이 된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도 번역된 조선왕조실록을 참고 한다.  간혹 인용하는데 번역을 안하는 경우도 많아서 참고한다.   네이버 사전도 도움이 된다.  요즘에는 사진으로도 찍어서 찾아낸다.  공부하기 엄청 편해진 느낌이다.  물론 내가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논문에 접근하기도 아주 편해져서 학위논문의 경우에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www.riss.kr)를 이용할 수 있고, 여러 채널에서 발표하는 논문은 한국학술지인용색인(https://www.kci.go.kr/kciportal/main.kci)에서 무료료 열람할 수 있으며,  아니면  DBpia(https://www.dbpia.co.kr)를 이용하기도 한다.  학창시절에는 무료로 열람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유료로 결제해야 한다. 거기까지 갈 일은 잘 없긴 한데, 예전에 고대사 관련 궁금한게 있을때는 몇개 결제한 기억도 난다. 


 2.

 그런데, 좀 안좋은 버릇이 나온게 슬슬 다른 책들을 읽고 싶어진다. ㅋㅋ  너무 한정된 주제만 파니 그런 것 같다.  자꾸 당기는 것은 세계사 책들이나 브라이언 페이건의 책들이다. <고대문명의 이해>,<크로마뇽>,<피싱>,<인류의 대항해>등이고, <올모스트 휴먼>도 읽고 싶다. 흠흠. 이래서 내가 수준높은 독서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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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20-04-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마뇽 추천이요! 재밌어요. 전 이 책 읽으면서 종교심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살게 해 준 본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넷 2020-04-29 00:06   좋아요 0 | URL
일단 읽고 있는 주제에 대한 읽기 리스트을 대충 다 채우면 우선 읽어보려고 합니다. 브라이언 페이건 책은 사두고는 대부분 읽지 못했네요...ㅋ
 
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
최승희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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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관제와 같이 고문서를 통하여 조선후기 사회신분의 변동을 살펴보고 있다저자의 발표한 논문들을 집성한 것이나 제목과 맞는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대상 고문서는 아마 저자의 소장 고문서인 하다


2장에서 6장까지가 사회신분 구조와 관련한 글들로,  ‘유학’,’학생호의 시기에 따른 의미의 변천과  특정 향리가문의 호적을 통하여 신분변동의 추이를 살펴보고 있다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장적의 직역에 따른 단순한 통계적인 처리를 통하여는 신분변동의 정확한 모습을 포착할 없다는 것이다호적대장의  대표적인 연구자로 사카타 히로시가 있는데그는 호적대장의 분석을 통하여 양반호가 늘어나고 있음을 주장하였는데그러한 연구결과는 사실 직역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단순히. ‘유학호를 양반의 직역임을 전제하고 이러한유학 기재의 급증이 양반층의 증가라는 결론을 내버린 다소 안일한 연구였다 하겠다그러면서 2장에는 이런유학’’학생호등의 시대에 따른 신분사적 의미를 검토하고 있다


유학과 학생은 시대에 따라 범위와 신분적 지위가 변하였다고 하는데, 고려대에는 학생이 국자감, 향학, 사학등의 교육기관의 생도와 이력자들이 쓸수 있는 직역이었다벼슬없는 양반자제, 양인에게까지 있었고, 고려후기에는 양반 하층이나 양인 상층에서 학생이라는 직역을 주로 쓰고, 공민왕 이후에는 학생과 유학이 동시에 쓰였다고 한다조선초에는 고려와 비슷하게 성균관, 사학, 향교의 생도를 말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리고 양반상층등은 관직이나 산계등이 대가제나 음서제를 통하여 기재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냥 유학이나 학생으로 기재된 경우 양반 하층이나 양인 상층을 뜻한다고 하였다여기서 며칠전에도 들었던 의문인데, 양반 중에서, 양인 중에서 ,하층을 가르는 기준이 무얼까 싶었던 것이다사실 양반의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입사를 하는 자손이 나오는 경우그렇지 못한 경우를 기준으로 봐도 같다는 이해가 생겼지만, 양인들은 경제력그런데 그렇다고 양반 하층을 형성하는 이들과 양인 상층인 이들을 직역이 동일했다작은 의문은 있지만 당분간 해결할 없을 같으므로 잠시 뒤로 넘긴다


진년의 전쟁 이후에는 유학과 학생의 용례가 입사하지 못한 양반들을 살았을때유학’, 죽었을때는학생 쓴다고 하지만여러 고문서의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살아 있는 양반에게도학생이라는 직역에 기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용례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당대인의 지적도 있었던 모양이다가령,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이 나이가 이미 지긋해졌는데도 幼學을 쓰는 맞지 하는 지적들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보통학생유학이라는 직역이 기재된 것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들을 칭하는 것이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직역이 기재되는 수가 급증하고 있다저자가 사카타 히로시의 연구에 대하여 지적한 바와 같이,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이렇게 급증해서야 이들이 지배층이라 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그리고 대구부장적, 울산부장적,진해현장적등을 통하여 호주의 직역에서 유학이 후기로 수록 비중이 높아지며, 그에 따라 호주의 내외4조의 직역이 학생과 산계등을 쓰고 있는 경우가 늘고 있으나,  1대의 자료만 보면 안되고 이전과 이후를 살펴보면 호주의 직역은 향리의  직역을 기재되었으나 내외4조의 직역이 학생,유학호, 산계등을 기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질적인 신분변동이 있음을 입증한다고는 없을 같다


이러한 호적대장에서의 신분제 동요의 징후를 읽는 것과 겸하여, 임진년 전쟁 이후 빈번해진 공신 남발은 신분제 사회의 견고한 틀을 동요시켜버릴 있는 연유가 있다. 공신의 선정이 빈번해진 것은 그만큼 조선후기 접어 들면서 상황이 불안정하였다고도 있는 것이 여러차례 공신이 선정된 이유가전쟁때 왕이 피난에 공이 있다거나, 전쟁에 공이 있고반란, 역모등을 막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신 선정에는 신분의 고하가 없었음을 있는게  고관들의 이름 뒤에 천인까지 기재된 것을 보면 있다그리고 이러한 공신녹훈은 선조대에서 영조대까지 십여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중에서 39% 해당되는 이들이 중인이하의 신분층이다.(전체 37,230명에서 14,458) 그리고, 다시 중에서 23% 공사천이었다.(양인 5,959, 공사천 3,396) 공사천의 경우에 특전은 당연히 신분의 면천이었으며ㅡ, 서얼에 경우에는 한정된 품계 이내의 관직에만 제수하던 것을 풀어 주어 사실 양반 상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둔 셈이고, 이러한 사례는 이미 자체도 많았기도 하였지만, 중인이하의 하급신분층에게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와 희망을 촉직시켰고, 당시의 정치사회적 불안정 분위기와 맞물려동요-문란-붕괴' 옳기는데 주요하였다고 저자는 평했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1장이었다.  1장에서는 조선시대 음서제와 대가제를 다루며, 음서제는 공신이나 2품이상 대신들의 자제들에게 일정 이상의 관직에 제수하던 것이며, 대가제는 이런 음서제의 한계(모든 양반 자제에게 실직을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양반의 자제들의 불만을 충족하기 위한 제도였다대가제는 문무 현직자가. 자궁(3 당하산계)이상이 되면 자신에게 별가된 자급(자궁이상은 가자를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아들,사위,동생,조카등의 친족들 1명에게 있도록 것이다비록 산직이었지만 입사하였을 경우에는 그대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그런데 경국대전의 법전에 규정된 바는 아니었고, 관습적으로 행해 졌다고 한다시작은 세종대에 세자(문종) 치유를 기념하여 백관들에게 산직 1자를 가한 것이고, 이후 빈번 해졌다고 한다처음에는 대가제로 나아갈 있는 산계가 건공장군(3)까지였으나, 1623 이후에는 5품계(통덕랑, 과의교위)까지만 가능했다그런데, 참상(3품과 6품사이) 있는 자가 산계는 자중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여 실직과 산직의 격차가 크기도 했단다이렇듯 대가제가 가지는 폐단을 지적하면서도 결국 혁파되지 않았음을 보면 이러한 제도 자체는 양반의 존재양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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