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지방사족과 국가 경인한국학연구총서 53
최선혜 지음 / 경인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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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지방사족과 국가> 읽었다.


제목에서도  책의 의도를 있는 것처럼 저자는 조선전기의 사회구조를 재지사족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의 성립과정 중앙과의 길항관계를 통하여 사회적 구조를 해명하는데 있다그런데, 저자는 주로 사족이라는 명칭보다는 유향품관이라는 명칭을 자주 쓰고 있다유향품관은 중앙에 관직을 거치거나, 실제 중앙에서 관직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관품을 가진 자들이 지방에 정착해서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어차피 사족도 벼슬을 지내던 이와 그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바였으니, 동일하게 쓰는 것도 문제는 없을 같지만그래도 사족이라는 명칭을 쓰는 같은데, 유향품관을 쓰는 지는 모르겠다.특별히 저자의 의도가 있나 싶지만서도 책에서는 별다른 설명은 없다


책을 읽으며 되짚어 보게 부분이 향리과 재지사족의 연원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점인데, 사실은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알았다.(그런데 이게 정설로 굳어진 것인지 학자마다 견해가 다른 부분인지 역시 모르겠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일파는 파트너로 지방의 세력을 잡고 있던 향리가 아닌  사족, 유향품관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향리를 세력을 억제하며, 유향품관에게는 지방행정의 협조를 구하고 그만큼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대사헌 조준은 상소문에서 신분은 신분에 맞는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첨설직, 검교직, 동적직등의 산직[유향품관] 중에서도 실로 자신이 그럴만한 사람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직첩을 회수 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아마 향리들도 관품을 가진자가 있어 솎아 내는 지점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유향품관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동시에 통제를 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과거를 응시할만 자격을  신명색이 조사하여 응시 가능 여부를 결정하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렇게 시행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시행이 되었거나 되었거나 상관 없이 향리를 입사를 시키는 것에는 상당히 제한을 두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된다유향소가 생긴 이유 역시 지방 내의 다른 세력인 향리를 견제할 목적도 있었는데, 그런 응시여부를 결정할 직임을 유향품관에게 주었다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으로는 크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표현되지 못한 의문점이 있기는 같다


 

중앙은 향리를 억제하고 유향품관에게 권농관이나, 면리임, 신명색 지방행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였지만, 동시 통제를 위한 방법도 강구해야 했는데 그것이 관찰사의 파견이다관찰사는 2품인 중에 파견되었는데유향품관을 통제하는 것은 수령보다는 관찰사였고, 수령의 감찰 역할도 동시 수행하였다이전에는 2품의 관찰사보다 낮는 낮은 직급의 안렴사가 파견되고 있어서 높은 직급의 유향품관을 제어할 없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주로 우리의 기존 인식으로는 훈구/사림의 대립의 이미지 때문인지 중앙에 대한 지방의 저항이라는 구도가 순간 그려지게 되는데, 그렇기 보다는 조화를 이루었다고 저자는 본다물론 책에서 인용되는 바와 같이 참람되게 지방관에게 폭력행사하기도 하는등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방의 세력들이 순응하였다고 있다. 중앙의 권위에 금이 갈만큼 알랑 거렸다고 생각하면 될까?


그리고, 국가가 지방의 통치질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을 정당회시킬 있는 성리학의 이념을 안착시켜야 했는데우선적으로 국가는 유향품괌을 대상으로 삼강이념을 강조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우선 태조원년에서 부터 지방에 충신,효자,절부,의부 등을 가려 뽑아 문려정표를 내렸다. 이에 대한 혜택으로는 우선적으로 선정된 자를 발탁해서 기용한다고 하였다당시에 지방에서 발탁되어 벼슬에 갖게 기회가 있는 이들은 유향품관들이었다결국 삼강이념을 따르고 실천하도록 이끌고 싶은 대상은 유향품관이었다대두분 삼강이념의 실천자로 추천되어 상을 받은 이들은 유항품관과 그의 가족이었다. 물론 일반 백성도 있었으나, 저자의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극소수였던 같다여튼 이런 삼강이념의 정착와 안정화를 위해 노렸던 것은  군주권을 강조하고 가부장권을 옹호하는 새로운 통치제제의 구축이었다확실하게 잡더라도 지방의 세력들을 순치시킬 이유에서 였던 것이다. 물론 일반 백성들과 가장 접촉이 많은 유향품관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획했던 바와 같이 완전한 성리학적 나라를 만들기 위함도 있다 것이다


또한 그들을 순치시키기 위함으로 산천제등의 정비도 필요하였다산천에 제사를 지낼 있는 자는 왕이나 왕의 대리자인 지방관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전에 지내왔던 바여서 폐하는 것은 어려웠고, 국가에서 지정된 바를 지키면 인정하는 정도에서 끝냈던 같다흥미로운 점은 유교이념을 표방한 유학자들도 뒤로는 그들이 음사라 비난했던. , 야제등을 지내고 무격인들과도 자주 교류를 하였다는 점이다그리고 음사를 유학자들이 음란하다 하였는지 알게 점이그들이 음사라 칭하는 제사에는 격을 따르지 않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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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향촌사회사 - 한국사회연구총서 8
정진영 지음 / 한길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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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재지양반의 향촌 지배의 확립과정과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양반, 특히 재지양반의 형성과정이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서울과 그 수도권에 있고, 관직에 나아간 이들을 조선왕조의 다른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지배층이라고 인식한 데는 어려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방의 양반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다른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지배층으로서 인식, 확고하게 형성하여 갔는지가 최근의 궁금증이었다. 이 책은 재지양반들의 향촌지배 확립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나, 양반이라는 사회지배층의 성립과정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이전의 왕조와는 다르게 신분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으나, 여러 가지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계급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 일군의 무리와는 달리 사회의 지배계급들은 그들 자신을 다른 이와 다른 무언가라 여기는 의식이 있는데, 재지양반의 향촌지배권 확립의 역사 역시 차이와 배제의 역사라 할 만했다. 일단 일차적으로 그들이 차별, 배제하려 했던 계층은 이족(향리)이었다. 자신들과 족적기반이 같았던 그들은 향안과 향규 등의 제정에 따라 구별해갔으며, 결국에는 통혼권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과는 타협, 길항적 관계를 통하여 자신들의 향촌지배를 확립, 한계지어 나갔다. 향안은 말 그대로 재지양반들의 리스트 인데, 이런 향안에 입록하기에는 어려웠고, 양반으로 인정되는 이들조차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인데, 타관에서 입관한 사족이라 인정되는 이들도 향안에 입록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16세기에 들어서는 15세기에 정착된 사회체제의 문제점이 노정되는 시기라고 하였다. 이런 16세기 접어들어 생긴 문제에 대한 재지사족의 대응을 퇴계의 <예안약조>로 살펴보고 있다. 16세기에 생긴 문제점이란 바로 민의 유망을 말했다. 그 이유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역 등의 문제였다. 민의 유망은 또 다른 민에게 역이 부가되어 그 고역이 가중되기도 하였고, 공물을 토산으로 하지 않아 방납에 따른 폐해도 존재하였다. 물론 재지사족의 수탈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당시(16세기) 자녀균분상속에 따라서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유산을 남길 즈음에는 재산이 몇 배를 상회하고는 했다. 그들의 재산증식의 방법의 하나는 주로 토지매매에 따른 것이었다. 주로 토지를 파는 이유는 세금, 이자(환자, 장리등)의 문제가 가장 컸고, 이러는 상황에서 토지를 사는 재지사족의 입장에 더 우세였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 일반 민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행정단위 개편에도 그들(재지사족)이 개입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얼마 전 읽다가 잠시 놓은 윤이후의 지암일기에도 이러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러한 재자사족과 수령등의 탐학과 수탈 등은 민의 유망을 유발하는 요인이었고, 그것은 당시 사회지배층이 본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에도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 해결이 모색되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예안약조>가 만들어진 것이고 그 주요 내용은 재지사족 스스로가 통제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거기에 더해서 민에 대한 통제의 내용 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강도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탓인지 이 향약은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향론의 불일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정도도 내어 주지 못할 기득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에 퇴계와 유향소가 중심이 되어 <금단규약>을 마련하였으나, 저자의 평에 따르면 이 또한 민의 유망이라는 향촌문제에 근본적인 대책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순점은 계속 축적되어 갔고, 향약에 더해서 동계,동약등이 생긴 연유도 하층민들의 통제가 쉽지 않았기에 주변 재지사족들과 함께 그들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성촌락이 생긴 이유도 이 이유가 컸다. 물론 상속의 형태가 자녀균분상속에서 장자상속으로 바뀌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래이거가 줄어들었고(그러니까 장자가 아버지와 그 조상이 살았던 지역에 계속 남게 된 경향이 생겼고) 그에 따라 형성된 측면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상기 적은 바와 같이 자신들이 재지사족으로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같이 모여 살며 자신들의 족적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 자신들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앙에의 진출도 어렵고, 더 이상 학문으로 이름을 드높인 이를 배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강구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심상치 않은 신분변동에 따라 흔들리는 신분질서를 부여잡으려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적지 않았으니, 대표적인 예로 적서차별이다. 당시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줄어든 바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적서차별이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이 아니라, 그 구분을 엄히 할 것을 이야기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서얼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질서의 경직성은 분동등의 향전, 농민항쟁기 시절에 생각보다 다기했던 향촌지배층의 동향의 이유가 될 것이다.

 

결국, 통하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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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용어사전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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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제목 그대로 '사전'이니 다 읽고 글을 적는 것은 아니다.  일단 특징은 표제어는 한국사,동양사,서양사를 망라하여 선정되었고, 필진도 300여명에 이른다.  비싼 가격이 흠일 수도 있겠으나,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책 읽기를 즐길다면 본인과 같은 수준의 독자도 참고할만 하다.  사두고는 한참 묵혀두었다가 최근에 다시 꺼내서 열심히 참고하고 있다.  보관을 잘못한 탓인지 인조가죽이 뜯겨 나오고 있는게 좀 아쉽다. 


사실, 첫 페이지부터 그냥 읽고 넘기는 것도 재미다.  이 사전이 한 포털에서 서비스 중인듯 한데, 역시 책은 손에 잡히는 질감이 있어야 한다. 책 가격이 너무 부담되면 그렇게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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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 우리가 몰랐던 양반의 실체를 찾아서 조선 문명의 힘 1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노영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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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은 무엇일까? 역사적 용어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이었다.  하지만 양반은 법제적인 절차를 거쳐 정의된 이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형성된 계층이다. 그러면 양반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책에서 양반을 1차적으로 구분하는데 서울과 그 근처에 거주하는 재경양반, 경반이다. 이들은 과거합격자들도 많이 내고, 고위 관직에도 오른 이들도 있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양반 신분으로 사회적으로 쉽게 인식되었다. 문제는 지방에 거주는 재지양반, 즉 향반들이다. 이들의 존재양태는 재경양반들과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재지양반이 양반으로 인식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 있어야 했다:


 1. 과거합격자 내지는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둘 것. 그리고 그 조상과의 계보관계가 명확할 것.

 2. 여러대에 걸쳐 동일한 집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할 것.

 3.양반의 생활약식을 준수할 것(봉제사, 접빈객)

 4. 대대로 결혼상대도 1과3까지에 해당되는 집단에서 고를 것



 그런데 이러한 기준이 대략적으로 위와 같이 잡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위와 같은 네가지 기준 모두를 충족하는 경우는 많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예시를 간단히 해주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서 아리송하다.) 이렇게 양반이 순수하게 생득적인 신분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 자체도 모호 했기에 양반으로 상승코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후에 다른 책에서도 접할 수 있는 관점이다. 개인적으로 조선조 후기의 양반지향의 현상은 어느정도는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저자는 재지양반층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데, 일단은 저자는 고려시대 지방통치의 임무를 가진 재지 유력자들인 이족族에서 중앙관료를 배출하고 다시 세거지로 정착하는 과정으로 거쳐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고위관작까지 낸 뒤 그 인물은 입향조, 시조로 하여 족보가 생겨나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족보는  정말로 모든 가계를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속한 이 가문이 뼈대 있는 가문이며, 그렇기에 이러한 특권을 누릴 만 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계급의식을 필연적으로 나와 남을 구분하는데, 자신들의 모체인 향리와도 구분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혼인 대상으로서의 차별에서 나타난다. 초반에는 향리층과도 혼맥을 이었으나 이후로 재지양반으로 신분이 공고화 되는 과정에서 혼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특권층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위세도 필요하지만, 절대적으로 무시할수 없는 겻은 경제적 기반일 것이다.  양반이라 함은 전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계층으로 알고 있지만, 조선 전반기에는 농업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관리감독 하고 사적으로 농서도 하는 등 농업, 농지개발등에 적극적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역시 양반이 땀흘리고 농사를 짓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채신머리가 있지 어찌 양반이?  여기에 필요한 것은 노비다.  이들 노비들이 농사는 물론이고 농지를 개척하는데 최전선에 섰다.  그렇기에 양반의 입장에서 노비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고,  양반의 상속문서인 분재기에도 상세히 기록을 해두었다(도망간 노비들도 향후 그들의 자손이 발견된 것을 대바하여 적었다) 여기서 조선의 노비의 비율이 전 시대에 비교해서도 많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로 법제적인 이유로 늘어 났다고 보았다.  일천즉천, 종모법등. 이것을 보면 마치 가축을 교배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역겨웠다.  그들의 혼인과 출산은 소유주인 양반들의 입장에서는 재산 증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경제발전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들의 경제적 저하는 상속문서인 분재기에서도 경향이 뚜렷해진다.


  경제력이 저하 됨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가문의 몰락, 제사를 지낼 수 없음을 예방하기위하여 남녀균분의 경향에서 남자, 거기다 장남을 위주로 상속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아들, 딸 구분없이 상속되었고, 사위에게도 상속하기도 하였지만, 18세기 들어서는 거의 완벽하게 정착이 되었고, 비로소 성리학자들의 기획은 완성된다.  저자는 이 주자학의 주장이 종국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이런 경향이 뚜렷해지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된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그쪽보다는 역시 조선 사회 전체를 성리학화 하려는 성리학자들의 프로젝트의 종국적인 성공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건 사견이고. 


문중의 발생 역시 이러한 경제력의 저하에서 발생하는 동족결합의 강화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물론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아래에서> 읽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승종인에 집중 되어 있는 것에 본인의 어려움과 다른 형제, 친족등의 불만을 봉합하기 위한 것도 있을 것이다. 



'양반'을 읽으면서 노비의 존재양태 역시 상당히 궁금해졌다. 일전에 역사획에서 나온 '노비, 농노, 노예'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뒤져봤는데 아직 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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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 - 신화로 읽는 고구려의 건국 서사시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21
이규보 지음, 조현설 해설 / 아카넷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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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보 하면 고려의 문인으로 동명왕의. 이야기를 이야기 한 문인으로 알고 있다.  아마 교과서에서 살짝 언급한 것을 보고 지나간 것을 기억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야 근래에 역사연구서를 보면서 익숙한 것이라, 크게 새로울 건 없지만 제일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책의 해체 부분에서 저자인 이규보의 창작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였다. 


동명왕편을 지은 해에는 첫째 딸이 태어난 해였고, 그는 아버지와 자기가 급제하였던 과거를 주관했던 이의 죽음으로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한때 백운거사라 호를 짓고 은거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구직의 필요성과 함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마침 예부시랑 장자목이 자신을 천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장자목에 바치는 장편시를 지어 바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러한 설명에 더욱더 심증이 간다.  소재 역시 동명왕의 건국 이야기로 정한 것도 당시 무신정권 하에서 무신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사실 교과서에서 제대로 짚어주는 편은 아니였던 지라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면 한 구절을 뜯어서 여러 신화소들과의 비교로 분석해주는데 그 또한 흥미롭다.  예전에 신화에 대한 흥미가 제일 높았을때 읽었다면 더 즐거웠음직하다.  동명왕편과 삼국사기의 찬자가 보여주는 인식의 대비도 흥미로웠다. 얼마전에 구입한 <한국고대의 경험과 사유 방식>도 어서 다시 들어야 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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