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향촌사회사 - 한국사회연구총서 8
정진영 지음 / 한길사 / 1998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재지양반의 향촌 지배의 확립과정과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양반, 특히 재지양반의 형성과정이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서울과 그 수도권에 있고, 관직에 나아간 이들을 조선왕조의 다른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지배층이라고 인식한 데는 어려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방의 양반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다른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지배층으로서 인식, 확고하게 형성하여 갔는지가 최근의 궁금증이었다. 이 책은 재지양반들의 향촌지배 확립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나, 양반이라는 사회지배층의 성립과정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이전의 왕조와는 다르게 신분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으나, 여러 가지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계급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 일군의 무리와는 달리 사회의 지배계급들은 그들 자신을 다른 이와 다른 무언가라 여기는 의식이 있는데, 재지양반의 향촌지배권 확립의 역사 역시 차이와 배제의 역사라 할 만했다. 일단 일차적으로 그들이 차별, 배제하려 했던 계층은 이족(향리)이었다. 자신들과 족적기반이 같았던 그들은 향안과 향규 등의 제정에 따라 구별해갔으며, 결국에는 통혼권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과는 타협, 길항적 관계를 통하여 자신들의 향촌지배를 확립, 한계지어 나갔다. 향안은 말 그대로 재지양반들의 리스트 인데, 이런 향안에 입록하기에는 어려웠고, 양반으로 인정되는 이들조차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인데, 타관에서 입관한 사족이라 인정되는 이들도 향안에 입록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16세기에 들어서는 15세기에 정착된 사회체제의 문제점이 노정되는 시기라고 하였다. 이런 16세기 접어들어 생긴 문제에 대한 재지사족의 대응을 퇴계의 <예안약조>로 살펴보고 있다. 16세기에 생긴 문제점이란 바로 민의 유망을 말했다. 그 이유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역 등의 문제였다. 민의 유망은 또 다른 민에게 역이 부가되어 그 고역이 가중되기도 하였고, 공물을 토산으로 하지 않아 방납에 따른 폐해도 존재하였다. 물론 재지사족의 수탈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당시(16세기) 자녀균분상속에 따라서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유산을 남길 즈음에는 재산이 몇 배를 상회하고는 했다. 그들의 재산증식의 방법의 하나는 주로 토지매매에 따른 것이었다. 주로 토지를 파는 이유는 세금, 이자(환자, 장리등)의 문제가 가장 컸고, 이러는 상황에서 토지를 사는 재지사족의 입장에 더 우세였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 일반 민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행정단위 개편에도 그들(재지사족)이 개입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얼마 전 읽다가 잠시 놓은 윤이후의 지암일기에도 이러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러한 재자사족과 수령등의 탐학과 수탈 등은 민의 유망을 유발하는 요인이었고, 그것은 당시 사회지배층이 본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에도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 해결이 모색되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예안약조>가 만들어진 것이고 그 주요 내용은 재지사족 스스로가 통제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거기에 더해서 민에 대한 통제의 내용 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강도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탓인지 이 향약은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향론의 불일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정도도 내어 주지 못할 기득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에 퇴계와 유향소가 중심이 되어 <금단규약>을 마련하였으나, 저자의 평에 따르면 이 또한 민의 유망이라는 향촌문제에 근본적인 대책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순점은 계속 축적되어 갔고, 향약에 더해서 동계,동약등이 생긴 연유도 하층민들의 통제가 쉽지 않았기에 주변 재지사족들과 함께 그들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성촌락이 생긴 이유도 이 이유가 컸다. 물론 상속의 형태가 자녀균분상속에서 장자상속으로 바뀌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래이거가 줄어들었고(그러니까 장자가 아버지와 그 조상이 살았던 지역에 계속 남게 된 경향이 생겼고) 그에 따라 형성된 측면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상기 적은 바와 같이 자신들이 재지사족으로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같이 모여 살며 자신들의 족적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 자신들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앙에의 진출도 어렵고, 더 이상 학문으로 이름을 드높인 이를 배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강구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심상치 않은 신분변동에 따라 흔들리는 신분질서를 부여잡으려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적지 않았으니, 대표적인 예로 적서차별이다. 당시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줄어든 바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적서차별이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이 아니라, 그 구분을 엄히 할 것을 이야기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서얼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질서의 경직성은 분동등의 향전, 농민항쟁기 시절에 생각보다 다기했던 향촌지배층의 동향의 이유가 될 것이다.

 

결국, 통하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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