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불운 - 2024 공쿠르 단편소설상 수상작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이세진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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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로 보면 파리 중심가에서 오른쪽 마른 주의 르페뢰쉬르마른에서 1972년에 태어난 편집자 겸 소설가. 2000년에 데뷔했다니 연륜이 짧지 않다. 문학상도 숱하게 받았고 특히 《한낮의 불운》으로 2024년 공쿠르 단편소설상을 받아 상금 10유로를 챙겼다.

  단편소설 여덟 개를 실은 책. 다 재미있게 읽었다. 공쿠르-단편소설상을 받을 만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치하고 치밀한 문장이나 특정한 주제를 던지는 무게감 있는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로 비극인데 그리 큰 비극도 아니고, 비극마저 경쾌하다.


  예를 들어 제일 앞에 실린 <오귀스트 바라카가 겪은 낭패들>을 보자. 원래 이름은 오귀스트 팔랑캥. 오귀스트의 아버지는 장거리 항해하는 선장, 스스로 자기를 선장이라고 말하는 대신 장기 노선 파일럿이라 한 걸로 봐서, 그리고 오귀스트야말로 훗날 장거리 노선의 선장이 되었으면 좋다고 한 걸로 봐서, 선장은 아니고 그나마 중요한 뱃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한 번 항해를 나갔다하면 몇 달씩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느라 집을 비웠고, 이런 남편을 견디고 사는 여자도 그리 많지 않은 법이라서, 오귀스트의 어머니는 아프리카에서 바다에 접하지 않은 나라 잠비아로 날라버렸다. 그러면서 오귀스트를 데려갔느냐? 아니다. 그래 오귀스트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세계만방의 많은 도시에 있는 숱한 학교를 1년 이상 머문 적 없이 하여간 뭉개고 다녔다. 그래서 사회성이라고는 1도 없는 우울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고착되어 오직 하나 큰 관심을 둔 건, 사물의 소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늘 작은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고 별의 별 것을 다 녹음하며 즐거움을 찾았던 것.

  장소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는데 오귀스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가 정말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았다. 단편소설이라 그게 어떤 식인지는 말해드리지 않는다. 하여간 그랬고, 성인이 되는 열여덟 번째 생일날 아버지를 장사 지냈으며, 이제, 여태 잠비아에서 산파학을 가르치는 어머니는 아들 오귀스트가 열여덟 살, 성인이 된 만큼, 다시는 잠비아에 와서 함께 살자는 말을 농담으로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중에 돈을 좀 보내주긴 했다. 조금이 아니라 적지 않은 현금을.

  아버지가 가히 우화 비슷한 죽음을 맞이한 다음에 음향기사 국가고시를 쳤다. 근데 떨어졌다. 우연히 오귀스트 팔랑캥이라는 동명이인이 있어 사실은 우리의 주인공이 합격했건만 합격처리가 이름 같은 작자한테 넘어가 이를 올바르게 돌려놓는 데만 반년이 걸렸다는 거 아닌가. 하여간 그렇게 기사 자격증을 땄다. 이때 우울증 비슷한 것이 도져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현지 등산객들과 술집에서 한 잔 하다, 불운의 여신은 결코 오귀스트를 배신하지 않아서, 잔뜩 술이 취해 오줌을 누기 위해 밖에 나가 묘지의 비석에다 몸을 기댄 순간, 묘석이 넘어지면서 오귀스트의 발가락을 짜부라뜨려 이 가운데 두 개를 절단해야 했다. 하여간 가지가지로 잘 안 되는 인간이다.

  아버지 역시 주식과 채권을 약간 남겨주었다. 근데 아버지가 게을러 팔지 않았던 것이 연일 상한가를 기록해 지금은 결코 작지 않은 돈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 돈과 어머니가 보내준 아프리카 돈을 합해 자신의 음향 스튜디오를 하나 꾸미려 마음먹었다. 이때 만난 사람이 부동산업체에서 가장 양심적인 중개인인 에바 코파. 딸과 살고 있는 돌아온 싱글이며 오귀스트보다 한 예닐곱 살 정도 많다. 에바가 오귀스트의 마음에 딱 맞아 떨어지는 파리 시내의 한 섬 같은, 그럴 정도로 조용한 사무실을 소개했다. 에바는 별로 돈이 많지 않다. 딸도 키워야 한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실적 부족으로 늘 쫑코를 먹기도 한다. 그러나 오귀스트를 탁 보니까 에바 눈에 짠하게 보인다. 오귀스트가 오히려 이렇게 좋은 집을 합리적으로 얻을 수 있다니 이렇게 운이 좋은 게 이상할 정도이다. 왜 에바 코파가 계약서 내밀기를 머뭇거릴까, 좀 의아할 정도.

  에바가 마침내 표준 계약서를 내밀고 내일 만나서 최종적으로 사인을 하자고 제안한다.

  우리의 오귀스트는 결국 계약을 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자마자, 자기가 집을 본 날이 하필이면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한 날이었음을, 원래대로라면 2분에 한 번씩 지하철이 지나가며 지축을 흔드는 진동과 소음에 진저리를 쳐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늘 그런 거라고 여기지 말자.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에바와 오귀스트도 장차 이 일을 그런 식으로 얘기할 것이다. 몇 년 후에, 둘이서 손을 꼭 잡고, 꽃가지 무늬가 있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웬일로 단편소설의 결말을 다 알려주느냐고? 이유가 있지. 다음 순서의 단편 <당신은 성공으로 빛나고 있네요>의 주인공이 이번에 에바 코파다. 운전면허 없이 사는 파리 여성. 그래 지하철 파업의 와중에, 지하철 파업인 줄 알았더니 이게 총파업이라서 버스 운전수들도 파업을 하는 바람에 극히 적은 인력의 대체근무자들이 평소에 비하면 아주, 아주 드문 운행 간격으로 운행하는 만원,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 타고 집에 가는 에바 코파. 아직 앞에 실린 단편의 결말부처럼 꽃가지 무늬의 거실 소파에 앉아 오귀스트와 손을 잡고 무드까지 잡을 시절은 아니라서,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다른 승객의 가슴팍에 코를 문대야 한다.

  어릴 적에는 포뮬러 원 경기장에서 깃발을 흔드는 레이싱 걸이나 풍선에 바람을 넣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결코 무대에 올리지 못할 희곡을 쓰는 덜 떨어진 극작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딸을 낳고, 그와 헤어진 다음에 한 푼도 딸의 양육비도 못 받아 부동산 중개일을 해야 하는 처지. 원래는 술을 마시지 않던 에바는 남자를 따라 저녁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좀 지나서는 낮에도 한 잔씩 했으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오전에도 마셨다. 신의 가호가 있어 남자와 헤어진 다음에 에바는 그 순간부터 술을 딱, 끊었다. 장하다, 에바.

  이렇게 시작해, 더 어린 과거에 고사리를 연구하던 아버지 이야기 등등 시시콜콜한 것이 나오다가 드디어 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 척, 알겠지? 다음 순서에 실릴 작품의 주인공이 에바의 딸이 되리라는 것을? 그건 그거고, 하여튼 딸이 공부는 애저녁에 글러먹었다는 것을 이미 유치원 다니던 시절부터 알아챘다. 그래도 다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 딸이 중학교 다닐 때, 갑자기 딸 스스로 자기가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고, 만들기만 하면 온갖 잡다하기만 했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을 섞어 만든 것이 제법 맛있다는 걸 알고,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요리 특성화 학교, 그것도 파리에서 제일 좋으니까 세계에서도 굴지의 요리학교라고 알려진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딸의 이름은 마르그리트. 근데 중학교 다닐 때 자기는 마르그리트가 싫다고 ‘보브’라는 남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에바는 싫은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싫지 않거나 관심 없는 눈치다. 하다못해 아이의 빌어먹을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마르그리트건 보브건 간에 딸이 실습실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던 중에 상급 남학생이 성추행 같은 쪽이 아니라, 도무지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는 버릇을 고친다는 핑계로 동선, 즉 보브의 길을 막기도 하고 뭐 그랬는데, 이 보브가 참다 못해 귀싸대기를 날려, 그만 학교에서 잘려 버렸다.

  허, 참. 오귀스트도 그렇고 에바도 그렇고 어떻게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대신 뇌진탕이냐는 말이지.

  이렇게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전부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재미있는 책. 크게 바라지 않을수록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주목할 것은 이야기 속 삶의 우중충함이 신록의 잎사귀에 떨어지는 봄 햇살처럼 파박거린다는 점. 다 제쳐두고 그것에만 관심을 두고 읽어도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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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오스의 가면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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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은 세계사가 한 번 휘까닥 뒤집힌 해이다. 원조 스파이물 작가 에릭 앰블러한테도 아직 전쟁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자기 인생에 획기적 일이 연달아 터졌으니 그중 하나가 이 작품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출간한 것이고, 둘째가 앞으로 19년을 부부로 살 여인과 첫번째 결혼을 했다는 것이며 마지막 세번째가 몇 주 전에 독후감을 쓴 <공포로의 여행>을 탈고했다는 거였다. 왜 첫째가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이냐 하면, 이 제목은 영국에서 출간한 책의 제목이고, 미국에서는 <디미트리오스의 관coffin>인데, 이게 5년 후, 앰블러의 작품 가운데 세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해 앰블러는 남은 세월동안 적어도 먹고사니즘에 관한 한은 걱정 1도 없이 그저 열나 스파이 소설만 쓰기만 하면 되게 해주었다는 거였다.

  우리나라에 앰블러의 작품 단행본이 네 권 나왔는데 <공포로의 여행>을 재미있게 읽어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읽은 지금, 이 정도면 앰블러는 그만 읽어도 괜찮겠다 싶다. 마침 내가 사는 도시의 모든 도서관에도 이 두 권 말고 다른 앰블러의 책이 없다.

  전에 읽은 <공포로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1939년 작품이니 아직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집필한 작품. 아직 독일이 그렇게 무지막지한 만행을 저지를 악마 같은 체제인 줄 모르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전쟁이 터지면 틀림없이 그 동네에서 먼저 화약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게 예상했을 터. 그래 <공포로의 여행>에선 독일에서 파견한 악당이 독일의 스파이였으나,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주인공 디미트리오스는 스파이라기 보다 한 시절 스파이에 고용되어 동유럽(유고슬라비아) 고급 정치가에 대한 테러 같은 일도 서슴지 않았던 그냥 악당이라고 봐야겠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에 출간했으면 작품은 1938년 정도에 쓰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이 책은 스파이 소설이라기보다 그냥 추리 소설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찰스 래티머. 영국의 작은 대학 정치경제학과 조교수이며 35세에 세 권의 전공 책을 출간한 나름대로 괜찮은 커리어를 쌓던 중에, 평소에 관심이 있던 추리소설을 한 번 써볼까 싶어 <피에 젖은 삽>을 탈고해 출판사에 보냈더니, 에그머니, 이게 대박, 이어서 쓴 세 권의 책이 연달아 히트를 치는 바람에, 아하, 이게 돈이 되네, 싶어 그길로 교수 및 학자의 길을 때려치우고 다섯 번째 책의 탈고를 위하여 아테네로 가 다음해에 탈고했다. 아테네의 물이 맞지 않았는지, 글을 쓰느라 과로를 해서 그랬는지, 무엇보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쓰기 위해서였을 것이 분명하게 좀 아팠던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증기선을 타고 더 남쪽에 있는 터키의 이스탄불로 갔다.

  이렇게 작품은 이스탄불에서 시작한다.

  작품 속에는 무수하게 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독자는 이 많고 많은 출연진에 과연 누가 끝까지 작품 속에 등장할까,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읽는 게 좀 피곤하다. 옛 왕족의 작은 궁전을 사 거기서 살며 시도때도 없이 파티를 즐기는 차베스 부인의 2박3일 파티에 초청받아 간 래티머. 그가 여기서 절대 정체를 알 수 없는 터키의 베후실력자이며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하키 대령을 만난다. 하키 대령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후속작 <공포로의 여행>에도 출연해 주인공이자 대포 엔지니어 그레이엄에게 정보를 주고 지원도 해주는 인물이어서 눈에 익다. <…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령은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심지어 직접 플롯을 짜둔 노트도 있어서 그걸 인기 추리소설가가 좀 봐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안고 래티머를 데리고 자기 사무실에 갔다가 디미트리오스 마크로풀로스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희대의 악당으로 ① 터키의 무화과 포장 인부로 일하던 중 살인강도, ②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스탐볼리스키 총리 암살미수, ③ 터키 아드리아노플(현 에디르네)에서 케말 암살 시도, ④ 파리에서 마약 판매조직 결성 및 운영, 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크로티아인 살해 등의 화려한 전력을 갖춘 자다.

  그런데, 날도 참 잘 맟추지. 이날을 딱 골라서 문제의 디미트리오스 마크로풀로스의 시신이 보스포루스 바다에 떠 있는 것을 지나던 어선이 발견해 신고했던 거다. 그러면 이미 디미트리오스의 상황은 끝난 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죽으면 그에 대한 모든 혐의와 수배와 기소 같은 건 종치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키 대령은 희대의 악당 얼굴을 아직 보지 못한 처지. 자기가 그를 담당하는 경찰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파일을 보관하던 막후 실력자로 그의 시신을 직접 한 번 봐야 하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 여기서 래티머가 하키 대령을 따라 디미트리오스의 시체 구경을 하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그걸 아는 래티머는 바득바득 대령을 좇아 시체공시소로 가 죽은 사람을 구경한다.

  누구도 시신의 눈을 감겨주지도 않았고, 입도 조금 벌리고 있는 시신은 두툼한 입술과 주름진 처진 뺨을 지녔으며 외관만 가지고는 얼굴 뒤의 영혼을 판단할 수 없었다. 칼로 옆구리를 심각하게 찔려 죽었으며 후줄근한 그리스제 양복 속에 디미트리오스의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훗. 슬쩍 흘러나오는 웃음.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하키 대령이 양복 속에서 그의 신분증이 나왔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 이 시체가 디미트리오스라고 단정하는 게 우습다. 대령이 래티머한테 보여준 파일에는 굉장히 흐려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사진 한 장만 들어 있을 뿐인데 신분증이라는 종이 한 장 보고 모든 사건을 종결한다고? 하긴 뭐 90여 년 전에 쓴 추리소설이니까. 

  그럼 문제의 디미트리오스는 언제 나오느냐고? 이 책이 모두 15장으로 되어 있는데 13장의 마지막 장면에 처음 등장한다. 당연히 전혀 다른 외모, 무화과 포장 인부하고는 완벽하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손에 모자를 들고, 세련된 검은색 프랑스 옷을 입고, 윤기 흐르는 흰 머리에 호리호리한 몸으로 꼿꼿이 서 있는 고결한 인간의 모습”(p.344)으로.


  물론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그럼 작가 찰스 래티머는 왜 이미 죽은, 죽었다고 완전하게 인식한 디미트리오스의 지나간 흔적을 찾게 되었을까? 그의 직업은 추리소설 작가. 하지만 소설은 완벽하게 작가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 실제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흉악범죄와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걸 번히 아는 래티머는 이번에 자신이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탐정이 되어, 이미 죽었으니까 위험이 별로 없는 악당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볼 생각을 한다.

  근데 이것도 좀 어이가 없는 것이, 래티머는 다섯번째 추리소설을 탈고하기 바로 직전, 이걸 가까운 시간 안에 완성하여 런던의 출판사로 보내야 한다. 유명 작가라도 웬만하면 출판사가 원한 마감 시한은 맞춰주어야 하는 법이라서. 다음으로,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이라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스미르나, 소피아, 아드리아노플 등을 증기선을 타고 다니려면, 그것도 1등실만 써야 가오가 올라가는 위대한 영국의 작가가 과연 얼마나 많은 지출을 해야 할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래티머가 가고 싶은 곳에는 자신이 직접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따라서 첫번째 방문지인 스미르나에 무턱대고 도착한 래티머는 현지에서 <공포로의 여행>처럼 러시아혁명 때문에 터키로 집단 망명한 백군 러시아인 코페이킨과 마찬가지로 백계 러시아인 출신 통역사 표도르 미시킨에 거의 완전히 의존한다. 다음 행선지인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는 프랑스 신문사 소속인 그리스 사람 마루카키스에게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건 그저 앞에서 만난 사람들의 추천장 한 장.

  여기에 한 명 추가. 스미르나에서 소피아까지 가는 야간 침대열차에서 만난, 아마도 폴란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국적불명인 50대 볼품없는 늙은이 피터스. 이이가 등장하자 나는 조금 긴장했다. 혹시 이 사람이 디미트리오스가 아닐까? 정답은 그의 모습과 연락처를 알고 있는 예전 디미트리오스의 수하. 디미트리오스가 파리에서 크게 마약 장사를 하고 있을 때, 터키에서 대량의 마약을 관에 실어 들여온 인간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미국판 제목이 <디미트리오스의 관>이 된 것.

  이제 할 말을 거의 다 했다. 조금 더 하면 틀림없이 스포일러가 될 것.

  등장인물이 많다. 그리고 숱하게 가명을 쓴다. 인물마다 하여간 무진장 스토리가 많다. 작품 전개에 별로 관계가 없을 듯해도 할 말은 다 하고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읽다가 막 신경질날 때가 많다. 그걸 참고 읽을 만하지도 않다. 왜 이 책이 영미 독자한테 인기를 끌었을까? 이게 다 의심스러울 정도.

  독자서평에 좋은 평가가 많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말이니 허접한 독후감 하나 달랑 읽고 이 책을 멀리할 필요는 1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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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로파 벨라돈나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박민수.김은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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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펜베크는 서늘하다. 한겨울 산길을 혼자 차를 운전해 간다. 이리저리 굽이길이 많아 속도를 내는 건 자살행위와 비슷하다. 짧은 오르막과 짧은 내리막이 연속되더니 이번에는 한참 올라간다. 경사가 완만해지는가 했더니 그 자리가 곧바로 내리막을 시작하는 곳이었다. 달이 훤했던 것 같지만 숲이 깊어 달빛이 닿지 않아 상향등을 켜도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갑작스러운 회전 길. 그나마 완만한 우회전이라 그저 가던 대로 간다. 그러다 도로 오른쪽에 허연 물체가, 흰 옷을 입은 여성이 있는 것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사납게 와락 달려들 것 같다. 얼른 속도를 내 지나치며 슬쩍 보니까, 비닐 하우스에서 찢어져 나온 비닐의 제법 큰 조각이었다. 급하게 물체를, 흰 옷 입은 여성(처럼 보였던 것)을 피하려다 하마터면 작지 않은 사고를 낼 뻔했다.

  이런 경험은 한 번씩 해봤을 터. 이 책을 읽은 감상하고 비슷하다. 그렇게 서늘하다.


  열 개의 단편소설을 실은 소설집. 짧은 해설까지 150쪽의 부담없는 분량이지만 절판이다. 도서관에도 없다. 지난 달에 에르펜베크의 장편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를 하도 인상 깊게 읽어 그날로 헌책방 뒤져 2년 만에 내돈내산했다.

  이이의 이름 Jenny Erpenbeck를 우리말로 “제니 에르펜베크”라고 썼으면 지금 절판된 구간이고, 신간은 “예니 에르펜베크”라 쓴다. 안 그러겠지만 혹시 헛갈릴까봐 짚고 간다.

  이 책으로 이제 예니 에르펜베크의 우리말 번역 단행본은 다 읽는다. 나머지 작품들도 빨리 번역해 나왔으면 좋겠다.


  표제작 <아트로파 벨라돈나>는 식물의 학명이다. 사람들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 벨라돈나belladonna라고 부른다. 가지과 식물이라 가지 비슷한 열매를 맺는다. 왜 “아름다운 여인”이냐 하면 열매에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독소가 있어서 열매를 먹으면 공동이 확장되어 눈이 크게 보여서 더 예뻐 보이는 것처럼 느낀다. 당연히 많이 먹으면 일시적인 시각장애를 일으키고 더 많이 먹으면 위험하고, 그래도 더 많이, 더 많이 꾸역꾸역 먹으면 다른 모든 음식물처럼 배 터져 죽는다.

  나는 오빠가 좋다. 오빠?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아줌마의 아들이다. 이른바 엄친아. 생일이 조금 빨라 편의상 오빠라 한다. 그냥 ‘형제’ 개념이다. Bruder. 어려서부터 서로 알고 살았다. 온갖 스토리가 다 있다. 한 싱크대에서 한 엄마(또는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두 아이를 목욕시킨 것부터 시작해 늘 같이 놀고, 밥 먹고,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아주, 아주 가끔 다투었고,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쳤다. 그러면서 오빠가 진짜 형제Bruder 같은 순간도 있었으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남매사이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야릇한 페로몬을 방사하기 시작했다. 엄마들은 모르는.

  아이들이 점점 커져 이제 하이틴이 되었을 때, 우연히 캠핑 이야기가 나왔고, 엄마와 엄마의 친구 아줌마는 나와 오빠, 단 둘이서 국경 넘어 캠핑 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제는 성접촉의 권리를 인정한 모양이다. 동네에서 가까운 국경 역에서 만나기로 한 둘. 가보니 오빠는 벌써 나와 있다. 둘은 국경을 넘었다. 캠핑장에 도착했고, 텐트를 치고, 숲에 밤이 와 잠을 잔다는 명목으로 텐트 안에 들어와 각자 자기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반 아이들의 경험담을 충분하게 들어서 구체적인 순서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두 사람이 그런 절차와 이상한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건 직접 해봐야 아는 걸까? 하여간 명목상 둘은 잠을 자는 상태를 시작했다. 결코 잠들지 않은 잠자는 상황. 시간이 갈수록 잠은 오히려 저 바깥 쪽으로 물러가기만 한다. 그러나 오빠와 나 사이의 아주 좁은 공간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두꺼운 장벽이 쌓이는 것 같다. 오빠 역시 숨소리만 간간히 낼 뿐 깨어 있다는 조금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빠도 내가 말짱한 정신으로 깨 있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흔히들 말하는대로 손만 잡고 잔 것도 아니고, 손도 안 잡고 그냥 잤다. 그런데 오빠가 이상하다. 탁, 보니 열이 펄펄 끓는다. 우리한테는 휴대전화도 없다. 그래 다른 캠프에 가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구조요청을 했고, 엄마의 친구 아줌마가 차를 몰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그렇게 잘 하면 딱지를 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 나는 여전히 오빠를 사랑한다.

  몇 주가 지나고, 엄마는 도무지 언짢은 소식을 들려준다. 오빠한테 애인이 생겼다는 거다. 말도 안 돼. 근데 말이 되는 것 같다. 들은 말로 찢어진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건만 그렇게도 예쁘단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속살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니 모르긴해도 포스가 남다른가 보다. 엄마 심부름으로 엄마 친구 아줌마 집에 갔을 때, 오빠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오빠 방에는 오빠 말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오빠의 애인도 있다고, 아줌마가 말해주었을 때는 속상했다.

  두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는데, 입구에 엄마 친구 아줌마와 오빠, 오빠의 애인이 서서 우리를 기다렸다. 오빠의 애인이 참 예뻤다. 나도 못난 축은 아니지만 오빠의 애인하고는 비교하기 민망하다. 엄마는 오빠네 가족을 집으로 불러 저녁 한 끼를 먹기로 했다. 당연히 오빠의 애인도 오겠지.

  그녀도 왔다. 우리집은 숲에 면했고, 일정 구간은 우리 땅이다. 그녀와 나는 저녁을 먹기 전에 숲으로 들어갔다. 야생 블랙베리와 사과를 따 먹어보라고 했다. 맛있게 잘 먹는다. 살구도 따 주었더니 역시 잘 먹고 씨앗만 툭 뱉는다. 나는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벨라돈나를 하나 따 주고 먹어보라 했다. 특별한 맛은 없지만 먹었다. 분명히 먹었다. 나는 벨라돈나를 따고, 따고, 또 따서 치마 가득 건네준다. 다 먹으라고. 다 처먹고 죽어버리라고.


  <아트로파 벨라돈나>가 제일 재미있지는 않다. 독일 여성 작가들이 단편소설을 참 매력적으로 쓴다. 일찍이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 유디트 헤르만도 있다. 예니 에르펜베크도 헤르만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전혀 다른 내용의 단편을 쓴다.

  근데 아쉬운 건, 이 책의 역자가 두 명이라는 거. 박민수와 김은정.

  누가 감히 이들의 독일어 실력을 입에 올리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작품이 다 균일하게, 즉 비슷한 품질로 읽히지 않는다. <A>는 원래 작가의 문장이 그런지 역자의 번역문, 즉 우리말이 그런지 여간해 읽히지 않아 나로 하여금 버벅거리게 만든다. <B>는 그렇지 않고 매끄럽다. 분명히 에르펜베크 또는 두 명의 역자, 아니면 독자, 이렇게 네 명 가운데 한 명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할까? 어쨌거나 참 맵씨있는 작품 모두를 즐기지 못한 것은 아쉽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내 탓이겠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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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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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생 네덜란드 작가의 데뷔작. 이이는 데뷔작으로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남부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독실한(것처럼 보이는) 개혁파 개신교 농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네덜란드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 했다가 시, 소설을 쓰는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해 중도에 때려 치웠다고 위키피디아-영어판에 나온다. 소년 같은 외모와 성격을 가져 논바이너리를 선언했단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 나는 이 책을 읽는 게 불편했다. 원래 네덜란드 사람이 좀 우울하다.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는 화가 고흐의 초기작품에 그의 조국인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게 많은데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이 좀 음울한 분위기의 색상과 피사체, 그게 사람이 됐든 물체가 됐든 간에 하여간 우울하다. 이 책은 화자인 주인공 ‘나’ 야스 뮐데르가 사춘기에 접어들기 바로 전 시기까지의 소년기의 한 시절, 2~3년 간을 시간적 공간으로 하고 있으나, 야스가 처절하게 앓고 있는 변비처럼 답답하고, 뭔가 마음에 걸려 묵지근하고, 간혹 콱콱 얹힌다. 그러니 데뷔작이면서 다른 문학상도 아니고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덥석 미끼 물지 마시고 잘 생각해보시라. 아하, 그러고보니 부커-인터내셔널은 이것처럼 좀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좋아하나비여? 고기 안 먹겠다는 딸 입을 억지로 벌리고 탕수육 한 조각을 쑤셔 넣는 아빠 같은 거.


  이야기의 시작은 화자 야스가 열 살 때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벌어진다. 야스는 좀 더딘 아이였다. 학교 담임도 이 아이에 대한 희망을 버린 듯했다. 하긴, 시계보는 법을 익히는 데만 1년이 걸렸으니 사실 야스 본인도 할 말이 별로 없기는 하다. 숫자만 나왔다 하면 정신 헷갈리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이 뮐데르가家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 레이네펠트네 가족보다 훨씬 더 진지한 개혁파 개신교 집안으로 부모, 특히 아버지가 권장하는 책은 딱 한 권, 성경 가운데서도 특정 파 판 성경이 유일했다. 당연히 일요일이면 가족 모두 잘 차려 입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했고, 거의 모든 일상에 성경”말씀”은 인용했다. 이건 가족 모두 마찬가지다.

  부모는 순서대로 아들-아들-딸-딸을 두었는데 각각 맛히스, 오버, 야스, 하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큰오빠 맛히스. 맛히스? 거 참 재미난 이름일세. 이렇게 휙 넘어갔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마티스”를 굳이 “맛히스”라고 우리말로 쓴 거 같다. 역자 ‘아밀’이 좀 재미난 사람이긴 하다. 맛히스. 맛히스. 그것 참.

  하여간 맛히스 오빠가 야스를 잘 돌보았던 모양이다. 야스가 제일 좋아하는 가족 구성원이 맛히스 오빠였으니. 큰 키에 힘도 보통이 아니라서 농사와 목축을 업으로 하는 집에서 벌써부터 제 몫을 단단히, 단단한 수준을 너머 대단히 단단하게 한 몫 하고 있었다. 언필칭 집안의 기둥감. 공부도 제법 하는 것 같고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스케이트에 관한 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이번에도 친구 두어 명과 함께 동네 스케이트 시합에 나갈 예정이다. 호수에서 벌어지는 20마일짜리 경주가 출전 종목. 우승자에게는 겨자를 넣은 소 젖통 스튜 한 그릇과 올해 연도인 ‘2000’이 박인 금도금 메달을 준다.

  맛히스가 야스한테 말한다. “오늘은 호수 건너편으로 갈 거야. 쉿, 이건 비밀이다.” 하고는 야스만 보면 늘 짓는 다정한 미소.

  “나도 가고 싶어.”

  맛히스가 말한다. “네가 더 크면 데려가줄게.”

  이 대화를 읽는 순간, 독자는 짐작한다. 뭔가 큼지막한 게 있겠군. 호수에서. 특히 호수 건너편 쪽에서. 어쨌든 오빠는 야스한테 손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호수로 가고, 이날 손인사의 기억은 두고두고 되풀이해 떠올릴 것이란다. 그것 봐, 내 뭐랬어.


  여기서 하나 더.

  야스는 토끼를 키운다. 이름도 있는데 뭐 소개할 정도는 아니고, 하여간 자기를 두고 혼자 스케이트를 타러 간 오빠가 좀 밉다. 나한테 허용되는 스케이트 얼음은 축사 뒤편의 좁은 두엄 배수로뿐. 열살 나이가 애매해서 그렇다. 호수로 가기엔 어리고, 두엄 배수로 가기엔 쪽팔리고.

  야스의 토끼가 클 만큼 컸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식탁에 오를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대신 올릴 칠면조도 없으니 야스는 불안하다. 내 토끼, 내 토끼. 그래서 하느님한테 기도한다.

  “하느님, 내 토끼 대신 맛히스 오빠를 데려가시면 안 될깝쇼?”

  그래, 소설에서 불길한 소원은 언제나 이루어지는 법. 맛히스 오빠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압도적인 속도로 추격집단과 까마득한 차이가 날 정도로 선두를 질주했으면, 평소 화물선이 다녀 빙질이 무른 호수 건너편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야스의 소원대로 된 거지만 야스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맛히스 오빠는 다음날 찬 시신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옆집 린 아주머니에게 우리집 크리스마스 트리를 좀 없애 달라고 부탁해 그렇게 했고, 대가로 시장에서 산 바삭바삭한 크리스마스 비스킷 전부와 라이스 푸딩, 아빠가 정육점에서 사온 고기, 그걸 묶은 80미터짜리 실뭉치까지 모두 옆집에 주어버렸다.

  야스는 말한다. 이때부터 공허가 시작되었다고. 맛히스 오빠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냄비와 텅 빈 샐러드 통 속에 담긴 채 떠나가버린 이틀 간의 크리스마스 때문에.

  오크 관에 담긴 오빠를 보며 동생 하나가 속으로 말한다.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자, 이만하면 됐어. 장난 그만 쳐, 오빠.”

  청바지와 평소에 제일 좋아했던 스웨터를 입은 채 오크 관 속에 담긴 오빠는 그렇게 묻혔다.


  가족의 상실은 남은 자에게 당연히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이 집도 그랬다. 특히 부모에게. 보통 자식을 잃은 부부는 자주 거칠게 싸우고 많은 부부는 이혼을 선택한다. 자식 상실 책임을 서로에게 지우려 손톱을 세우다가, 갑자기 자기 잘못인 것 같은 진짜 고통의 시간을 서로가 위안해줄 여유가 없어서.

  이 가정에는 남은 삼남매가 있어 부모가 갈라서진 못해도 이후 야스-하나가 보기에 일체의 피부 접촉도 없고 부모간 “짝짓기”도 없다. 엄마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것처럼 보여 날이 갈수록 여위기만 한다. 그리고 주인공 야스와 남은 오빠, 맛히스 오빠하고 비교하면 체격과 힘은 보잘것없지만 성격이 거친 오버 오빠의 주변에 자잘한 죽음이 생긴다. 야스가 열살 때부터 중학교 1학년 시절까지.

  오빠가 키우던 기니피그도 죽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여서 냄새가 나기 전까지 오빠 방에 숨겼다가 묻었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간 많은 동물이 죽는다. 이 죽음들에 오버 오빠와 야스가 개입되어 있다.

  야스는 지독한 변비로 고생한다. 아빠가 야스를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들라 하고, 야스의 항문에 초록색 비누 조각을 굵은 손가락으로 집어넣는다. 네덜란드의 민간요법인 모양이다. 그래도 여간해 똥은 나오지 않는다. 그건 여기까지만 하자.

  죽음과 배변, 사춘기를 앞둔 시기에 맞게 짝짓기와 2차 성징의 발현 등에 관한 관심. 이 모든 것이 맛히스 오빠를 상실한 가족을 덮치는데, 어쩌면 이보다 더 엄청난 시련까지 몰려온다.

  구제역.

  집에서 신경 써야 하는 가장 우선순위. 수백 두에 이르는 소들을 일시에 집단 살처분해야 하는 참담을 당해야 한다. 그렇게 당했다. 오버 오빠는 항의의 표시로 송아지 한 마리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버렸다. 그러나 방역원들은 모른 척 소의 머리에 충격총을 쏘고 죽었거나 덜 죽었거나를 가리지 않고 트럭에 싣고 떠났다. 세상이 무너진 거 같았겠지.

  죽음, 죽음, 죽음은 또다른 죽음을 부르고, 또다른 죽음은 대규모 살상을 불렀다.

  과하게 우울하다. 죽음과 변비라니.

  흠. 이렇게 써야 부커상을 받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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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상반기엔 몸이 한 번 훅 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술을 좀 줄였습니다. 술을 줄였더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너무 남아 돌아요. 덕분에 책을 더 읽게 되더군요. 

  틀림없이 권여선의 책은 오늘 다 읽을 것이니까, 올해 상반기 까지 모두 142권, 4만8천7백 페이지를 읽게 됩니다. 읽다보니 연초에 마음먹은 대로 두꺼운 책을 제법 많이 읽었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생업이 있잖습니까. 위 표는 생업이 끝나 이제 가진 거라고는 여유밖에 없는 사람의 취미생활 내력일 뿐입니다. 오늘은 또 반 년을 지운 기념으로 술 한 잔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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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6-30 0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기다렸어요.

Falstaff 2026-06-30 06:40   좋아요 1 | URL
에쿠... 이걸 기다리시는 분도 계셔요? ㅋㅋㅋ

페넬로페 2026-06-30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에겐 책이 있다네~~
눈과 허리 보호하시면서 책 읽으세요.
후반기도 기대하겠습니다.

Falstaff 2026-06-30 16:05   좋아요 1 | URL
아휴, 말씀 맞습니다. 요즘엔 눈도 눈이지만 허리가 이게 장난이 아니러다고요. 뭐 다들 이렇게 사는 거죠. ㅎㅎ

다락방 2026-06-30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어마어마하네요, 폴스타프 님!!

Falstaff 2026-06-30 16:05   좋아요 0 | URL
백수가 할 줄 아는 게 하나밖에 없어서 말입죠. ^^;;

꼬마요정 2026-06-30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져요!! ㅎㅎ

Falstaff 2026-06-30 16:05   좋아요 1 | URL
에휴, 안 멋있습니다. ㅎㅎ

닷슈 2026-06-30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대단합니다 저는 연간 100권 정도가 다입니다

Falstaff 2026-06-30 16:06   좋아요 1 | URL
아주 정상적으로 사시는 겁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백 권도 대단해요!!

자목련 2026-06-30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목록입니다!
술 한 잔, 그 곁에는 또 어떤 책이 있을까요?

Falstaff 2026-06-30 16:08   좋아요 1 | URL
음.. 지금 네미롭스키, 전욱진, 킨케이드, 그리고 제니퍼 이건이 있군요. ㅎㅎㅎ 오늘 얼른 집에 와서 돼지고기 고추장 찌개 끓이라는 마눌 연통이 와서 맛있게 쐬주 한 병 깠습니다. 얼큰하네요. 제가 마시는 쐬주는 25도짜리랍니다. ㅎㅎㅎ

blueyonder 2026-06-30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책을 어떻게 하루에 한 권씩 읽으시지요? 저는 시간이 많아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책, 거기에 가끔씩 술, 멋지시네요!

Falstaff 2026-06-30 16:09   좋아요 1 | URL
하는 일 없는 연금생활자는 가능하더라고요. 이런 거 결코 자랑 아니더라고요. ㅎㅎ

hnine 2026-06-3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던 책 다시 읽어보고 싶을 때는 없으신가요?

Falstaff 2026-06-30 16:13   좋아요 0 | URL
지난 반기에도 소포클레스 전집하고 황동규는 다시 읽은 책인데요.... 마음 속에 남은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시간이 많이 남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아직 못 읽은 책이 그렇게 많은데 왜 이미 읽은 책을 읽겠습니까. 그간 못 읽은 책 읽는 게 훨씬 좋을 듯해서 말입죠.

딸기홀릭 2026-06-30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부럽습니다

Falstaff 2026-06-30 16:1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부러울 것도 없고, 부러워도 하지 마세요. ^^

coolcat329 2026-06-30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일하실 때 독서량도 저 같은 사람에겐 완전 넘사벽이었어요. 살 빼신 것만 봐도 정말 한다면 하는 분! 대단하세요. 👍

Falstaff 2026-06-30 21:23   좋아요 1 | URL
고마우신 쿨캣님, 옛 일을 다 기억하시네요.
그냥 어떻게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뭐 별 거 없었습니다만... 운동화 몇 켤레만 가지고 살 빼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ㅋㅋㅋ 꼭 이렇게, 아직도 잘난 척을 해야 직성이 풀리니 이걸 어쩝니까. ㅋㅋㅋ

독서괭 2026-06-3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목록입니다!! 은퇴했다고 누가 다 이렇게 부지런히 살 수 있나요. 전 맨날 빈둥댈 것 같은데 ㅎㅎ

잠자냥 2026-06-30 23:44   좋아요 0 | URL
응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6-30 23: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머얏!!

잠자냥 2026-06-30 23:53   좋아요 1 | URL
빈둥괭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7-01 03:49   좋아요 1 | URL
안 그러실 겁니다. ㅎㅎㅎ

얄리얄리 2026-07-01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럽습니다. ㅎㅎ
저는 생계전선에서 물러나더라도 이렇게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만요. 그래도 상상만으로도 하루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6-07-01 18:21   좋아요 0 | URL
충분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일 안 하니까 새 세상이 열리는 것 같더라고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6-07-01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백작님 같은 삶이 워너비입니다...일 안 하고 책보고 독후감만 쓰고 싶음...멀었네요 흑흑

Falstaff 2026-07-01 21:12   좋아요 1 | URL
ㅎㅎ 은퇴하면 정말 좋아요. 그래도 집안 일은 좀 해야 합니다. 황태미역국, 돼지고기 고추장찌개, 간장 제육볶음, 들깨 머윗대 볶음 같은 것도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ㅋㅋㅋ 나머지는 걍 책 읽고, 술 마시고, 졸리면 아무때나 자고... 신선이 따로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