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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오스의 가면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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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은 세계사가 한 번 휘까닥 뒤집힌 해이다. 원조 스파이물 작가 에릭 앰블러한테도 아직 전쟁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자기 인생에 획기적 일이 연달아 터졌으니 그중 하나가 이 작품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출간한 것이고, 둘째가 앞으로 19년을 부부로 살 여인과 첫번째 결혼을 했다는 것이며 마지막 세번째가 몇 주 전에 독후감을 쓴 <공포로의 여행>을 탈고했다는 거였다. 왜 첫째가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이냐 하면, 이 제목은 영국에서 출간한 책의 제목이고, 미국에서는 <디미트리오스의 관coffin>인데, 이게 5년 후, 앰블러의 작품 가운데 세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해 앰블러는 남은 세월동안 적어도 먹고사니즘에 관한 한은 걱정 1도 없이 그저 열나 스파이 소설만 쓰기만 하면 되게 해주었다는 거였다.
우리나라에 앰블러의 작품 단행본이 네 권 나왔는데 <공포로의 여행>을 재미있게 읽어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읽은 지금, 이 정도면 앰블러는 그만 읽어도 괜찮겠다 싶다. 마침 내가 사는 도시의 모든 도서관에도 이 두 권 말고 다른 앰블러의 책이 없다.
전에 읽은 <공포로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1939년 작품이니 아직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집필한 작품. 아직 독일이 그렇게 무지막지한 만행을 저지를 악마 같은 체제인 줄 모르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전쟁이 터지면 틀림없이 그 동네에서 먼저 화약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리라는 건 거의 확실하게 예상했을 터. 그래 <공포로의 여행>에선 독일에서 파견한 악당이 독일의 스파이였으나,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주인공 디미트리오스는 스파이라기 보다 한 시절 스파이에 고용되어 동유럽(유고슬라비아) 고급 정치가에 대한 테러 같은 일도 서슴지 않았던 그냥 악당이라고 봐야겠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에 출간했으면 작품은 1938년 정도에 쓰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이 책은 스파이 소설이라기보다 그냥 추리 소설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찰스 래티머. 영국의 작은 대학 정치경제학과 조교수이며 35세에 세 권의 전공 책을 출간한 나름대로 괜찮은 커리어를 쌓던 중에, 평소에 관심이 있던 추리소설을 한 번 써볼까 싶어 <피에 젖은 삽>을 탈고해 출판사에 보냈더니, 에그머니, 이게 대박, 이어서 쓴 세 권의 책이 연달아 히트를 치는 바람에, 아하, 이게 돈이 되네, 싶어 그길로 교수 및 학자의 길을 때려치우고 다섯 번째 책의 탈고를 위하여 아테네로 가 다음해에 탈고했다. 아테네의 물이 맞지 않았는지, 글을 쓰느라 과로를 해서 그랬는지, 무엇보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을 쓰기 위해서였을 것이 분명하게 좀 아팠던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증기선을 타고 더 남쪽에 있는 터키의 이스탄불로 갔다.
이렇게 작품은 이스탄불에서 시작한다.
작품 속에는 무수하게 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독자는 이 많고 많은 출연진에 과연 누가 끝까지 작품 속에 등장할까,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읽는 게 좀 피곤하다. 옛 왕족의 작은 궁전을 사 거기서 살며 시도때도 없이 파티를 즐기는 차베스 부인의 2박3일 파티에 초청받아 간 래티머. 그가 여기서 절대 정체를 알 수 없는 터키의 베후실력자이며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하키 대령을 만난다. 하키 대령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후속작 <공포로의 여행>에도 출연해 주인공이자 대포 엔지니어 그레이엄에게 정보를 주고 지원도 해주는 인물이어서 눈에 익다. <… 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령은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심지어 직접 플롯을 짜둔 노트도 있어서 그걸 인기 추리소설가가 좀 봐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안고 래티머를 데리고 자기 사무실에 갔다가 디미트리오스 마크로풀로스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희대의 악당으로 ① 터키의 무화과 포장 인부로 일하던 중 살인강도, ②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스탐볼리스키 총리 암살미수, ③ 터키 아드리아노플(현 에디르네)에서 케말 암살 시도, ④ 파리에서 마약 판매조직 결성 및 운영, 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크로티아인 살해 등의 화려한 전력을 갖춘 자다.
그런데, 날도 참 잘 맟추지. 이날을 딱 골라서 문제의 디미트리오스 마크로풀로스의 시신이 보스포루스 바다에 떠 있는 것을 지나던 어선이 발견해 신고했던 거다. 그러면 이미 디미트리오스의 상황은 끝난 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죽으면 그에 대한 모든 혐의와 수배와 기소 같은 건 종치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키 대령은 희대의 악당 얼굴을 아직 보지 못한 처지. 자기가 그를 담당하는 경찰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파일을 보관하던 막후 실력자로 그의 시신을 직접 한 번 봐야 하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 여기서 래티머가 하키 대령을 따라 디미트리오스의 시체 구경을 하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그걸 아는 래티머는 바득바득 대령을 좇아 시체공시소로 가 죽은 사람을 구경한다.
누구도 시신의 눈을 감겨주지도 않았고, 입도 조금 벌리고 있는 시신은 두툼한 입술과 주름진 처진 뺨을 지녔으며 외관만 가지고는 얼굴 뒤의 영혼을 판단할 수 없었다. 칼로 옆구리를 심각하게 찔려 죽었으며 후줄근한 그리스제 양복 속에 디미트리오스의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훗. 슬쩍 흘러나오는 웃음.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하키 대령이 양복 속에서 그의 신분증이 나왔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 이 시체가 디미트리오스라고 단정하는 게 우습다. 대령이 래티머한테 보여준 파일에는 굉장히 흐려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사진 한 장만 들어 있을 뿐인데 신분증이라는 종이 한 장 보고 모든 사건을 종결한다고? 하긴 뭐 90여 년 전에 쓴 추리소설이니까.
그럼 문제의 디미트리오스는 언제 나오느냐고? 이 책이 모두 15장으로 되어 있는데 13장의 마지막 장면에 처음 등장한다. 당연히 전혀 다른 외모, 무화과 포장 인부하고는 완벽하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손에 모자를 들고, 세련된 검은색 프랑스 옷을 입고, 윤기 흐르는 흰 머리에 호리호리한 몸으로 꼿꼿이 서 있는 고결한 인간의 모습”(p.344)으로.
물론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그럼 작가 찰스 래티머는 왜 이미 죽은, 죽었다고 완전하게 인식한 디미트리오스의 지나간 흔적을 찾게 되었을까? 그의 직업은 추리소설 작가. 하지만 소설은 완벽하게 작가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 실제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흉악범죄와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걸 번히 아는 래티머는 이번에 자신이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탐정이 되어, 이미 죽었으니까 위험이 별로 없는 악당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볼 생각을 한다.
근데 이것도 좀 어이가 없는 것이, 래티머는 다섯번째 추리소설을 탈고하기 바로 직전, 이걸 가까운 시간 안에 완성하여 런던의 출판사로 보내야 한다. 유명 작가라도 웬만하면 출판사가 원한 마감 시한은 맞춰주어야 하는 법이라서. 다음으로,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이라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스미르나, 소피아, 아드리아노플 등을 증기선을 타고 다니려면, 그것도 1등실만 써야 가오가 올라가는 위대한 영국의 작가가 과연 얼마나 많은 지출을 해야 할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래티머가 가고 싶은 곳에는 자신이 직접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따라서 첫번째 방문지인 스미르나에 무턱대고 도착한 래티머는 현지에서 <공포로의 여행>처럼 러시아혁명 때문에 터키로 집단 망명한 백군 러시아인 코페이킨과 마찬가지로 백계 러시아인 출신 통역사 표도르 미시킨에 거의 완전히 의존한다. 다음 행선지인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는 프랑스 신문사 소속인 그리스 사람 마루카키스에게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건 그저 앞에서 만난 사람들의 추천장 한 장.
여기에 한 명 추가. 스미르나에서 소피아까지 가는 야간 침대열차에서 만난, 아마도 폴란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국적불명인 50대 볼품없는 늙은이 피터스. 이이가 등장하자 나는 조금 긴장했다. 혹시 이 사람이 디미트리오스가 아닐까? 정답은 그의 모습과 연락처를 알고 있는 예전 디미트리오스의 수하. 디미트리오스가 파리에서 크게 마약 장사를 하고 있을 때, 터키에서 대량의 마약을 관에 실어 들여온 인간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미국판 제목이 <디미트리오스의 관>이 된 것.
이제 할 말을 거의 다 했다. 조금 더 하면 틀림없이 스포일러가 될 것.
등장인물이 많다. 그리고 숱하게 가명을 쓴다. 인물마다 하여간 무진장 스토리가 많다. 작품 전개에 별로 관계가 없을 듯해도 할 말은 다 하고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읽다가 막 신경질날 때가 많다. 그걸 참고 읽을 만하지도 않다. 왜 이 책이 영미 독자한테 인기를 끌었을까? 이게 다 의심스러울 정도.
독자서평에 좋은 평가가 많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말이니 허접한 독후감 하나 달랑 읽고 이 책을 멀리할 필요는 1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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