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느 메디치의 딸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박미경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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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제목은 La Reine Margo, <마르고 왕비>이지만, 흔히 ‘카트린 드 메디시스’라 불리는 작품 속에서 가장 강렬한 여성 악역을 강조하기 위해,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이라 붙인 거 같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세계적인 명저를 16세기 초 피렌체의 통치자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했는데, 이이의 증손녀가 이탈리아 발음으로 하면 카트린 메디치, 프랑스식으로 표기해 카트린 드 메디시스다. 프랑스의 왕 앙리 2세와 혼인해서 남편이 스페인 잔칫집에 가 마상 창 시합을 하다 사고로 죽은 이후 첫아들 프랑수아 2세 재위 기간, 둘째 아들 샤를 9세 재위 중 상당한 기간 동안 섭정으로 프랑스 전역을 들었다 놨다 한 인물. 이탈리아 여자가 프랑스에 와서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을 행사한 것에 좀 불만이 있을 수 있을 터. 알렉상드르 뒤마는 보편적 프랑스인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 그랬는지 카틀린 드 메디시스를 필요 이상 악녀화 했다. 읽어보시면 안다.

  책은 1572년 나바라 왕국의 신교도 통치자 앙리와, 프랑스 왕(이었던) 앙리 2세의 딸이자 샤를 9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식이 있던 8월 18일에서 시작한다. 나바라의 왕 앙리 부르봉은 프랑스 남서쪽의 위그노, 샤를 발루아는 중앙과 북동쪽을 지배하는 가톨릭. 이 두 집안의 화해로 작게는 앙리의 모후 잔 달브레 3세를 독살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직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당한 근거가 있는 사실처럼 보인다)와의 화해, 크게는 오랜 세월을 끌어왔던 신구교간의 화해를 의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기의 결혼 바로 8일 후에 닥쳐온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기억한다. 축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당마다 경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군인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남성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눈에 띄는 개신교도, 즉 위그노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것을. 이미 시대는 중세에서 벗어났다. 중세 시대엔 비록 이교도를 화형에 처하기는 했지만, 집행하기 전에 심문을 통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권고한 후 그것을 거절할 때만 불을 질렀던 것이, 이젠 이교도들의 씨를 말릴 목적으로 무조건 학살을 감행하게 된다.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략 2만 명가량이 학살당한 후 수도 파리에서 거의 모든 신교도들과 신교도 귀족들을 잃은 나바라의 왕 앙리는 루브르궁에 감금 비슷하게 잡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해야만 했다. 개종 후에도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카틀린 드 메디시스의 숱한 암살 기도를 기적적으로 모면한다. 작품은 앙리가 모든 환란을 겪어내고 결국 다시 나바라의 왕으로 ‘도망할’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여기에 있을 법하지 않은, 앙리의 손자인 루이 14세 시절 삼총사 비슷한 의리남 두 명을 등장시켜 총과 칼이 난무하는 무협지를 그리기도 하고, 의리에 죽고 사는 남성들의 우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섹스리스 커플인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공인된 애인들은 물론이고 여인들의 무기라고 일컫는 각종 독약과 어둠의 마법 같은 것도 적절하게 구비 해놓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진짜로 책 한 권을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뚝딱 해치울 수 있을 정도의 속도감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웬만하면 읽지 마시라. 난 돈이 아까웠다. 토마스 만의 친형 하인리히 만이 쓴 <앙리 4세>가 더 났다. 같은 앙리 4세를 그린 작품이지만 하인리히 만은 앙리가 부르봉 왕가의 초대 왕인 앙리 4세로 등극하기 바로 전의 파리 공성전攻城戰까지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했으나, 뒤마는 철저하게 19세기 초중반의 프랑스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읽힐 수 있을까를 공략 포인트로 설정했다. 내가 읽은 뒤마 중에서도, 이렇게 말하면 출판사가 싫어하겠지만, 제일 처진다. 하긴 뒤마가 가장 저명한 대중문학가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절판인 공산주의자 하인리히 만의 <앙리 4세>를 읽기 위해 헌책방을 뒤지라는 것도 아니다. 그 책은, 세 권짜리인데, 하인리히 만의 문장이 그런지, 역자가 번역한 우리말 문장이 그런지, 하여튼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다른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만 감상하시려면, 차라리 쟈코모 마이어베어가 작곡한 오페라 <위그노교도>를 대본 읽어가며 듣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

  근데 더 좋은 건, 그냥 부르봉 왕가에 관한 역사책 한 권을 선택하시는 것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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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04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뒤마의 책이라 혹해서 읽었는데 축약본이라는 말에 어찌나 씁쓸하던지요...
아, 책은 읽고 나서 바로 팔아 먹었습니다.
영화 <여왕 마고>도 보았는데 당대 내로라하는 프랑스 배우들의 향연에 그만
뻑이 갔습니다.
젊은 날의 이자벨 아자니는 정말...

Falstaff 2021-01-04 14:18   좋아요 1 | URL
당시 이자벨 아자니의 나이가 서른아홉,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이었답니다. 그 나이에 스무 살 마르고 왕비 역을 했으니..... 와, 대단합지요.
근데 코코나하고 라 몰 백작이 실존 인물이라네요. 같이 참수 당한 것도 그렇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 허구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아요. ㅋㅋㅋㅋ
 

 

  올 한 해 동안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좋았던 책들을 선정했습니다. 이름하여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 그동안 최고의 한 권으로 선정한 책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2016년.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2017년.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늦여름>
  2018년.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2019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올해는 연초부터 명편들을 많이 읽는 바람에 애초에 2020년 Top 10 선정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짐작이 맞았습니다. 또한 처음으로 과연 열 권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궁리가 들기도 했습니다만, 아마추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우습더군요. 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부류가 아닌, 그저 취미의 일환으로 책을 읽는 우리 아마추어 독자들은 자유롭게 올해 읽은 최고의 책을 선정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우리의 목적은 문학적 가치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저는 앞으로도 매년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을 선정할 것입니다.
  책의 선정은 매 분기마다 포스트를 쓴 추천작품 모두 마흔 권 가운데 열 권과 최고의 한 권을 고르는 방식입니다. 올해 Top 10에 말 그대로 “아깝게” 들지 못한 책들로 말하자면 박재삼의 《박재삼 시집》,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단지 유령일 뿐》,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호르헤 셈프룬의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율리 체의 <새해>, 토머스 핀천의 <브이.>, 정말 아까운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아흐멧 함디 탄피나르의 <시간조정연구소> 등이 있습니다.
  순서는 제가 책을 읽은 날짜순입니다.

 


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이런 어처구니없는 책이 있을까. 이건 문학의 반란이다. 이렇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따로 영토를 탈취해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거나 율법의 개로부터 참형을 선고받아야 마땅하다.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제일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즐길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고생을 시킨 나보코프와 그의 역작 <창백한 불꽃>이 얼마나 짜릿하게 느껴졌는지는 이 책을 직접 읽은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야속한 오르가슴이리라. 장미 같은 책. 그러나 주의하시라, 하물며 대 시인조차도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을 수 있었으니.

 

 

2. 막스 프리슈, <슈틸러>

 

  프리슈를 읽으면서 재미를 기대하기는 애초 불가능하리라, 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물론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는 긴박하거나 즐거움을 바랄 수는 없겠지만 프리슈의 작품도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책. ‘나’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어떤 스위스 사람으로부터 내가 아나톨 슈틸러라는 이름의 스위스 조각가라고 지목을 받는다. 근데 내가 진정 나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내가 슈틸러일까. 원래 인생이 온전한 끝도 없고 온전한 의미도 없는 거잖아. ‘나’의 혼돈 속에 또 20세기 초중반의 현대사까지 가세해서 만들어낸 명편.

 

 

3.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작년에 이이의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를 ‘최고의 한 권’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올해 그 자리를 넘보지 않은 책. 처음 장면부터 어쩌면 이렇게 매혹적인지. 첫 번째 가을비 방울이 떨어지려는 무렵,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이곳 집단농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불길하게 전해지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하여 농장 구성원들은 횡령한 돈을 싸들고 도망칠 생각을 시작하기도 하고, 그들 덕에 집단농장이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싸이기도 한다. 농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카프카 적인 접근을 감행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게다가 무지하게 긴 문장의 신기한 긴장감까지. 그러나 주의하시라.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터.

 

4. 미셸 투르니에, <마왕>

 

  ‘최고의 한 권’ 후보작이었다. 왜소한 체격이었다가 1940년대 당시 190센티미터, 110킬로그램에 이르는 거인으로 성장한 아벨 티포주의 행적을 그렸다.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급성 근시와 성기왜소증을 피할 수 없는, 이를테면 일종의 괴물.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징집당한 티포주는 초기에 포로로 떨어져 동프로이센 지방의 수용소를 거쳐, 소년병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나폴라에서 거대한 검은 말을 타고 일대를 돌아다니며 소년들을 ‘수집’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마치 괴테의 시, 슈베르트의 리트 <마왕>과 비슷한 모양이라 제목을 이리 붙였던 것. 이런 단편적인 내용만 가지고는 왜 내가 이 책을 ‘명작’이라고 부르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을 터. 여기에 투르니에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다양한 의미를 혼합하기 주저하지 않았다.

 

5.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독후감을 쓰면서 제목을 “모든 비문맹인에게 권합니다.”라고 지었다. 저 광활한 열대우림, 인도차이나의 온대우림, 북아메리카의 한대우림을 떠올려보자. 지상 60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끝도 없이 펼쳐지는 녹색 지평선. 이게 오버스토리Overstory다. 삼림의 덮개를 형성하는 엽군. 숲과 잡목과 거목과 균류와 기타 미생물,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생명집단이 오직 털 없는 원숭이 한 종의 편리를 위하여 급속도로 제거되어 왔고 제거되고 있는 곳. 그곳의 가장 중추적인 생명체인 나무를 지키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진정으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장엄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널려 있지만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다. 인간은 숲과 지구에 미안해하며 불편한 것을 참고 겸손할 필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6. 채만식, <탁류>

  1938년 작품. 우리나라에서 30년대 소설이라면 근대문학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탁류>를 읽고 그동안 우리 근대문학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나의 오만과 무지를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다니. 에밀 졸라가 한반도에서 환생했으면 썼을 법한 작품이라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감칠맛 나고, 긴박하기도 하고, 이야기 진행에 따라 흥분도 하고 기뻐도 하고, 환장까지 할 한 바탕 사기극. 기본적으로 비극이긴 하지만 지뢰처럼 묻혀 있는 골계와 해학과 풍자와 능청이 기가 막힌 사투리와 버무려져 곳곳에서 펑펑 터져나간다. 30년대 당시 조선 최고의 물산 집합지 군산과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 살던 모든 그저 그런 인간들의 난장판. 아무리 난장판이라도 엄연한 향연을 어찌 이리 늦게야 읽게 되었을까.

 

7. 토마스 만, <요셉과 그 형제들>

  이거 토마스 만 아니면 못 썼다. 창세기에 겨우 몇 페이지 나오는 텍스트 가지고 무려 3천 페이지가 넘는 구라, 그것도 읽는 즉시, 즉각, 읽자마자, 거 그럴 듯해,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장광설로 만드는 신공.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래 토마스 만, 하면 길기만 길지 재미는 하나도 없는 소설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도 하니 아마 대표작 <마의 산>에 하도 덴 사람이 많아 그럴 거다. 그러니 내가 토마스 만만 나오면 앞 뒤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서평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 읽는 건 그와 내가 연분이 맞아서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이 책은 이사악, 에서와 야곱, (르우벤과) 요셉 이야기를 알고 있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3천 페이지를 독파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결국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도 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의 결론이, 진짠데, 심금을 울린다.

 

8.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하나만 가지고도 이 리스트에 오를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 작품이 1934년, 갑술 해에 쓴 것인데, 이상의 <날개> 2년 전에도 이런 모더니스트가 있었다니, 와, 놀랄 놋자字여. 한 지식인 청년의 삶에 천착을 해 종로, 광교, 남대문, 경성역 일대 까지 일상적인 생활, 그리고 생활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심리 또는 주인공의 내면세계가 절묘하게 절충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 디덜러스다. 오전 열한 시 경에 어머니의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 다음날 새벽 두시까지 온갖 곳을 다니며 여러 명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스쳐 지나가고, 모른 척하고, 괜히 아는 척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술도 마시고, 예전에 선 본 아가씨를 회상하는 룸펜 인텔리겐치아의 삶을, 입에 착 달라붙는 맛으로 버무려놓았다.

 

 

9. 오르한 파묵, <눈>

  터키의 북동쪽 국경도시 카르스. 프랑크푸르트에 망명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귀국한 카는 장례식이 끝나고 이스탄불의 신문사 임시기자로 유행하는 소녀들의 연쇄자살과 지방선거 취재차 카르스로 떠난다. 이때 습기를 머금고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저기압과 함께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할 눈의 도시에 파묻혀버린다. 여기까진 낭만적이지? 그러나 이제야 시작. 하필이면, 원래부터 주인공의 숙명이긴 하지만, 카가 도착한 날 밤, 도시의 유일한 공연장에서 군사 쿠데타가 터지고, 절세의 미인이자 카의 대학동창인 이혼녀와의 연애사업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도 의문에 싸이고, 터키의 거의 모든 부조화가 이곳 국경도시에서 터지느니, 종교와 정치의 갈등, 빈부 격차, 부패한 정부와 군부, 도농 간 의식 차이 같은 모든 모순 속에 어느덧 눈이 그치며 대단원이 까마득하게 보이게 되는데, 가히 파묵의 대표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터.

 

 

10.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마카닌, <아산>

  체첸 내전을 주제로 한 작품은 처음 읽었다. 그런데 무지 재미있다. 얼핏 보면 전쟁 소설이라 할 만한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주인공 알렉산드르 세르게이치 질린 소령의 보직은 전투대대가 아니라 보급대대. 특히 휘발유, 경유, 등유, 항공유, 윤활유 등의 병참 3종에 관한 한 체첸 일대에서 러시아군은 물론이고 체첸 반군 쪽에서도 절대 무시하지 못할 실력자다. 휘발유와 경유야말로 현대전의 피blood이니까. 아산이란 체첸 산山사람들의 영혼에 간직된 불분명한 신으로 두 팔이 달린 거대하고 웅장한 새의 모습을 갖추고 오직 파괴만을 위한 절대적인 힘을 상징한단다. 체첸 산사람들은 질린 소령을 아산 질린으로 호칭할 정도. 질린은 어느 의미에서 부패한 관리다. 그러나 휘발유를 악착같이 지키려 하면 죽고, 대신 판다고 하면 돈을 받고 팔 수 있을 때 당연히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팔지 않겠는가. 이런 딜레마에 빠진 질린 소령. 그를 통해 마카닌은 체첸 내전을 그야말로 처절하게 비꼬고 있다. 어차피 역사상 정의로운 전쟁은 한 번도 없었으니.

 

 

 


2020년 최고의 한 권
헤르만 브로흐, <현혹>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유대인 작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나치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던 브로흐는 자신의 시대를 걸쳐 철저하게 전체주의를 경멸하게 되었을 것이다. 브로흐는 1951년에 죽었는데 <현혹>은 1953년에 발표가 됐고 1976년에 영문판이 출간됐다. 정확하게 몇 년 작품인지 모르지만 30년대 중반에 썼으리라 추측하고 있단다.
  이 우화적 소설은 저 까마득한 쿠프론 산자락에 있는 두 마을,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에서 한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다. 관찰자이기도 하고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한 중년의 의사의 시점으로 쓴 작품인데, 이 두메에 피곤한 몰골의 마리우스 라티라는 인물이 들어와 전설 속의 한 장면, 쿠프론 산에 무한정으로 묻힌 황금을 채굴하겠다는 환상을 갖게 만든다. 고을이 생긴 이래 꿈이라고는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 황금덩이에 찬란한 빛을 비추어주는 마리우스의 약속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이들의 (현혹된)꿈에 대항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금을 그어, 내 편과 네 편으로 이분화 시켜버린다.
  브로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전체주의는 언제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것. 진실과 관계없이 다중의 뜻이라는 현혹에 빠질 때, 2020년, 2021년의 한반도에도 언제든지 내 편만이 옳다는 최면상태로 돌입할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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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31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선택한 열권은 어떤것일까 아주 기대하며 읽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제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을까요? 하하하핫. 전 지금 성경의 창세기를 읽는 중인데, 그래서인지 토마스 만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볼까 싶습니다.

폴스타프님, 내년에도 열심히 읽어주시고 열심히 써주세요. 폴스타프님 덕에 존재를 모르던 많은 책들에 대해 알게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Falstaff 2020-12-31 09: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다락방님 라이브러리 보면 생소한 것들 엄청 많아요. 늘 참고 하기만 하고 정작 책 고를 때는 살짝 기억에서 빗겨나는 모양입니다. ㅋㅋㅋㅋ
다락방님도 내년엔 행복 가득하세요. 제가 말하는 행복이란 당연히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건강을 뜻합니다. ^^

단발머리 2020-12-3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클릭해서 들어오는 그 순간에 너무 떨리는 거 있죠. 역시나 처음 보는 작가에, 처음 보는 작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양식 같은 독서리스트 감사합니다.
올해 폴스타프님 <요셉과 그 형제들> 연재 페이퍼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책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0-12-31 10:08   좋아요 1 | URL
아이고, 과찬을 해주시네요. ㅋㅋㅋ (기분은 째집니다만)
요셉이 재미있으셨어요? ㅎㅎㅎ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내년에도 즐거운 나날들.... 말고 그냥 연초에 로또나 한 번 맞으세요!

coolcat329 2020-12-31 1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책 기다리고 있었어요. <슈틸러>, <오버 스토리>는 폴스타프님 리뷰읽고 사놨는데 역시 ‘탑10‘에 들었네요. 탁류와 구보씨도 꼭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라슬로라는 작가는 2년 연속 순위에 들었네요.
최고의 한 권인 <현혹>, 전 또 폴님에게 현혹당하네요.😅

Falstaff 2020-12-31 10:14   좋아요 3 | URL
ㅎㅎㅎ 좋은 작품들 고르신 겁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성이 크러스너호르커이고요, 이름이 라슬로인 이 양반, 내년에도 읽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 올 12월에 출간예정인 책이 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아주 매력적인 작가더군요. 아니면 저하고 찰떡 궁합일 수도 있고요. ^^

scott 2020-12-31 1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팔라프님
현혹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내년에도 좋은책 이야기 많이 많이 해주세요
2021년 새해 행복과 건강으로 가득차시길 바랍니다.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Falstaff 2020-12-31 10:22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 고맙습니다.
근데 현혹, 취향이 아니라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0-12-31 1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최고의 한 권이 <현혹>입니까?!
오르한 파묵의 <눈>이 최고의 열 권에 들어가 있는 게 의외군요. ㅎㅎ 파묵의 대표작이라고 하시니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겠습니다. 비록 파묵이더라도........

여러분 그런데 <현혹>에 현혹되시면 코피 줄줄 흘려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2-31 11: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그래도 현혹은 몽유병자한테 비하면 새발의 피, 조족지혈입니다!
생각보다 곤란하지 않았으니 코피까지는 그저 ㅋㅋㅋ 사람에 따라 뭐.... ㅋㅋㅋㅋ
옙. <눈> 괜찮더군요. 아마 연간 리스트에 올라온 첫 파묵일 거에요.
사실, 현혹이냐 불꽃이냐, 좀 고민했습지요. 뭐 인생이니까요. ^^

비연 2020-12-31 11: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못본 책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펼쳐지다니. 몇 권 푱푱 보관함에 넣으며 아 내년 초 살 책들 리스트는 폴스타프님의 책들인가 합니다. 새해 복!

Falstaff 2020-12-31 11:24   좋아요 4 | URL
비연님도 새해 복 왕창! ㅋㅋㅋㅋ
좀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알라딘엔 워낙 고수분들이 많아서 사실 이런 추천 비슷한 거 쓰기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답니다. ^^

겨울호랑이 2020-12-31 1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Falstaff 2020-12-31 11:24   좋아요 4 | URL
겨울호랑이 님도 내년에 건강하시고 돈 많이 버세요! 그게 제일입니다!!

막시무스 2020-12-31 1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항상 좋은 문학작품의 소개와 리뷰에 감사드립니다! 감히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차곡차곡 잘 쟁여두고 있습니다!ㅎ 2021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책읽기의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Falstaff 2020-12-31 12:45   좋아요 3 | URL
무슨 말씀을요. 막시무스 님의 내공이면.... 아이고.... ㅋㅋㅋ 그래도 말씀은 고맙습니다.
2021년, 무조건 건강하시고, 무엇보다, 주머니가 두둑해지시기 바랍니다.

초딩 2020-12-31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

Falstaff 2021-01-01 08:4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초딩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 다른 건 몰라도 현금 대박 하나만이라도요. ㅋㅋㅋ

문수봉우리 2021-02-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 작품과 작가들을 저 아래로 깜보다가,탁류를 겁나게 재밌게 읽고 아 그게 아니구나했었습니다,저는 채만식의 ˝논 이야기˝를 읽지는 않았지만 이 대사 하나가 채만식을 대변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독립됐다고 했을제,내 만세 안부르기 잘했지˝ .

Falstaff 2021-02-08 12:22   좋아요 0 | URL
아, 그 대사가 <논 이야기>에서 나오는군요.
채만식, 참 재미있는 작가입니다. 의미심장하기도 하고요.
 
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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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밀란 쿤데라의 사실상 데뷔작인 <농담>에서 청년 루트빅은 곧 넘어올 것 같은데 여간해 넘어오지 않는 여학생에게 아무 생각 없이 엽서에 이렇게 농담 한 마디를 적어 보내고,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황여정의 <알제리의 유령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연극계 일을 하고 서로 호형호제 하는 한지섭과 탁오수는 <알제리의 유령들>이란 일종의 부조리극을 만들어 놓고, 희곡을 당시 운동권 독서회인 ‘칠현회七絃會’에 건넨다. 한지섭-탁오수, 이 룸펜 인텔리겐치아들은 칠현회 회원들에게 <알제리의 유령들>이 카를 마르크스가 늑막염과 기타 병증 때문에 알제리에서 보낸 만년에 직접 쓴 극작이라고 시미치 뚝 떼고 크게 농담 한 판을 벌인다. 엉뚱한 극작을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독서회 회원들. 시절이 80년대 초반, 5공화국 때였다. 독서회가 반정부 서클(동아리)이었고 요시찰 감시중인 것도 알면서.
  이들의 흔적을 좇고 있던 공안 당국은, 한지섭-탁오수가 자신들의 말이 농담임을 밝히기 전에 갑자기 들이닥쳐 이들을 덮쳤고, 표지에 카를 마르크스 지음, 이라고 쓴 극작을 발견했으니 첫 번째 난리가 난다. 두 번째 난리는 칠현회 명단에 한지섭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한의 딸 이름을 ‘은조’라고 지어준 박형민과 은조의 엄마 백소이가 들어 있었던 것. 이들은 경찰서 정보과에 이어 대공혐의를 수사하는 모처에 가서 무려 오십 일에 걸쳐 모진 고문을 받고, 이들의 배우자들인 한지섭과 (한의 친구 박형민의 아내) 장민선까지 취조를 당한다.
  쉽게 얘기하자면, 농담 한 마디에 두 가족이 거덜이 난 거다. 물론 책에 나오지 않지만 나머지 다섯 명 회원들의 가정도 콩가루가 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언제나 이야기는 주인공 주변에만 머무는 법. 그들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 하는 일은 헛되리라.
  조금이라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다른 장르도 아니고 부조리극작품을 썼을 수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터인데, 물론 칠현회 사람들도 나 정도의 배경은 갖고 있었겠지만, 마르크스가 극작도 썼다는 믿기지 않는 실물 증거, 표지에 카를 마르크스가 지었다고 쓰인 필사본의 복사본을 들고 단박에 인지부조화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듯하다.
  이 작품이 황여정의 데뷔작이다. 황여정은 <알제리의 유령들>로 2017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에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함으로써 데뷔한다. 아버지 황석영과 어머니 홍희담. 홍희담, 하면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광주항쟁을 다룬 우리나라의 거의 첫 번째 작품집 <깃발>을 상재했던 이다. 이리 막강한 그쪽 빽을 갖고도 황여정은 십여 년에 걸친 습작기를 거쳐 힘들게 등단한 것이 보기 좋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하면 아버지 황석영은 제쳐두고, 엄마 홍희담의 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황여정의 데뷔작을 쿤데라의 데뷔작 <농담>에 비비겠는가. 쿤데라는 농담을 해서 크게 코가 깨진 루트빅 자신이 곤경을 다 끝내고 복귀하는 이야기고, 황여정은 농담을 해 가족이 해체될 정도로 큰 곤경을 당해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한 당사자들의 두 자식, 한지섭-백소이 부부의 딸 한은조(태명 율)과 박형민-장민선의 아들 박현가(태명 징)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랬을까? 율과 징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음울하다. 벽에 곰팡이가 세계지도처럼 퍼져있는 방. 처음엔 인쇄물과 책, 그러다가 나중엔 종이 기피증에 걸린 아버지 한지섭이 먼지가 풀풀 날리는 벽지를 다 뜯어내고 곰팡이 방지용 페인트를 칠해버리는 장면부터 책은 시작하는데 초지일관, 요즘 젊은 작가들이 많이 선택하는 분위기처럼 심각할 정도로 우울하다. 처음부터 끝나기 바로 전까지 거의 대부분 블루 톤. 마르크스가 쓴 극작이란 농담에 동참한 극작가 탁오수, 지금은 연극계에서 은퇴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알제리’라고 하는 옥호의 카페를 운영하는 당사자가 등장하는 씬 말고는 심히 우울하다.
  거기다 독자가 마르크스가 부조리극을 썼다고 잠깐 믿게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무리수, 또는 인공적인 장치는, 작가에게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 황여정을 위하여 독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려면 더 노력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문학동네소설상이 요구하는 소설의 분량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이런 작품을 생산했다고 감안할 수 있지만, 독자는 그런 것에까지 아량을 베풀고 싶지 않다. 활자로 만든 책이 나왔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신 되돌릴 수 없으니.
  작가는 자신이 한 과격한 농담을 만회하기 위하여, 또는 원래 자신의 생각을 밝히려고 탁오수의 입을 빌어,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중략)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었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고 웅변한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듣는 사람이 화자의 말을 오해했다면 그건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따라서 작가가 한 말을 독자가 작가의 뜻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안 된 이야기지만 작가 잘못이란 뜻.


  어쨌거나 이 책을 마지막으로 올 한 해의 독서는 모두 마쳤다. 이것으로 2020년에 나는 내가 비운 소주병의 절반이 조금 넘는 180권을 읽었으니, 연초에 세운 2백 권 미만의 책만 읽겠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근 십여 년 동안 매년 2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더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던 것. 그래 올해 읽은 책의 권수가 앞에 2자가 붙지 않으니 좀 사람 같다. 그지?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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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2-30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모의 그림자 없이 실력으로만 받은 상일까 좀 궁금했는데.... 폴스타프 님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연초에 2백권 미만으로 책을 읽자고 계획하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납니다.
대부분은 2백권 이상으로 읽자, 뭐 이렇게 계획하잖아요? ㅎㅎㅎ
소주병 360병... 그 병 다 모으셨어요? 100x360=36,000 와, 책 두 권은 살 돈이네요! ㅎㅎ

Falstaff 2020-12-30 10:12   좋아요 3 | URL
문학동네소설상은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걸로 아는데 원래 분량 기준이 있는 건가요? 유난히 그 출판사가 분량에 까다로운 거 같더라고요. 다른 곳도 비슷하지만. ㅋㅋ

소주병은 처음엔 그냥 분리수거 내놓았었거든요. 그러다가 당근에 무료나눔, 이젠 무료나눔도 안 가져가서 마트에 전화해보니까, ˝아, 아저씨세요? 얼른 가져오세요. 한 번에 30개 씩. 우리 마트에서 판 술병만 받는데 아저씨는 얼마든지 가져오셔도 되요.˝ ㅋㅋㅋㅋ 쪽팔리기도 해서 거짓말 하기를, 우리 집에 유난히 손님이 많이 와서 말이죠. ^^;;

잠자냥 2020-12-30 10:23   좋아요 1 | URL
출판사 장편/경장편/단편 공모전은 모두 자기들이 정한 분량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coolcat329 2020-12-30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은 체력이 남다르신거같아요. 책도 체력이 있어야 읽는데, 거기다 음주생활까지 정열적으로 하시니 정말 부럽네요. 저도 주말엔 술을 마시는데 소주는 이제 힘들더라구요. 술서평에서 월급날에만 드신다는 한살* 고급소주 폴님 믿고 사먹었는데 좋더라구요. 저도 한 달에 한번 그거 마십니다ㅎㅎ

올해도 폴스타프님의 글 잘 읽었고 건강하시길요~

Falstaff 2020-12-30 12: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늘 골골합니다. 대개 책, 음악 좋아하는 분들이 몸 움직이기를 즐기지 않지요. 저도 마찬가지라 영 꽝입니다. ㅋㅋㅋㅋ
저도 쿨캣 님 덕택에 한 해 동안 즐겁게 책 읽었습니다. ^^

mini74 2020-12-30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재미있게 쓰세요 *^^* 올 한해 마무리도 이슬? 과 함께신지 ㅎㅎ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도 책과 이슬이 충만한 한 해가 되시길!

Falstaff 2020-12-30 13:43   좋아요 2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종은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내년 첫 잔은 진로소주 빨갱이 25도 짜리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미니님께서도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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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재즈>의 황금색 피부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 골든 그레이는 열여덟 살이 되고나서야 집안의 늙은 하인으로부터 실제 자신은 도도하고 미모에 눈부신 금발의 어머니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임을 듣고, 성인으로 독립하는 첫 출발을 아직도 살아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러 떠나는 것으로 설정했다. 마치 그러기만 한다면 자신이 순수한 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토니 모리슨이 여든네 살에 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의 첫 장면은 피부색이 연해 ‘높은 노란색’이라 할 수 있고, 머리카락 역시 뻣뻣한 곱슬머리 대신 부드러운 직모를 가진, 흑인이면 같은 흑인인가 어디,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진 흑인이라 자부한 여인 스위트니스가 한밤중 같은 검은색, 수단Sudan 사람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같은, 너무 검어 무서울 지경인 딸을 낳고 절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제 갓 낳은 아이 룰라 앤의 부계 역시 아주 옅은 색의 유색인이어서 남편 루이스는 아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단정을 하고는 가족을 떠나 매달 오십 달러의 우편환을 송금하는 것으로 연을 끊어버린다. 이때를 1980년대 후반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스위트니스의 절망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아예 백인으로 통했단다. 백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자녀와도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딸이 편지를 보내도 아예 편지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벽난로 속으로 집어 던졌을 정도. 한데 당시 반 혼혈 또는 사분의 일 혼혈들은 자신들이 ‘적어도 흑인은 아니다’는 것을 대내외로 증명하기 위해 흔히들 그렇게 했단다.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스위트니스의 엄마 룰라 메이 역시 쉽게 백인으로 통할 수준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흑인으로 살기를 선택해 ‘공공시설에서의 백인과 유색인종을 분리’하는 짐크로 법에 청춘시절의 대부분을 희생당하며 살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흰 피부를 향한 스위트니스의 갈망이 어떠했겠는가. 이이는 자신의 딸 룰라 앤을 양육하는데 있어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희다고 믿는 피부를 새까만 석탄 같은 딸의 피부와 될 수 있는 대로 접촉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룰라 앤이 좋지 않은 짓을 해 스위트니스가 따귀를 때리거나 엉덩이를 때릴 때 어머니의 손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더 좋았다는 추억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한다. 19세기 말에 자신이 백인인 줄 알았던 흑인 청년은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지만, 21세기의 룰라 앤은 소녀 시절에 자신의 까만 피부 때문에 백인 소년들의 짓궂은 장난을 몇 번 견뎌야 했으나 성인이 되고나서는, 채용될 때 마지막 순서고 해고될 때는 맨 처음인 사회 환경인 것만 빼고는 자신을 어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숯처럼 검은 피부를 돋보이게, 그것을 아름답다고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백인 남자 제리는, 16세까지는 룰라 앤이었다가 앤 브라이드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그냥 간단하게 ‘브라이드’로 고친 그녀에게 오로지 흰 색의 옷만을 추천했다. 신발도 흰색 위주지만 꼭 다른 색을 신겠다면 반드시 검정색으로 하고, 화장도 하지 말고, 보석이나 귀금속 일체도 못하게 했다. 작은 진주 귀고리 정도만. 그러자 흑단 같은 피부와 서아프리카 계 우량한 체질의 브라이드는 남의 이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게 사모하는 눈길인 동시에 굶주린 눈길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이후 브라이드는 1940년대 ‘실프 코르셋’으로 시작해 이제 화장품으로 영역을 넓힌 실비아 주식회사의 ‘젊은’ ‘흑인’ '여성' 임원으로 여섯 개의 화장품 라인 가운데 하나를 담당하며 회사의 지역 매니저까지 겸직하는 여피 비슷하게 성장하게 된다. 세상이 바뀌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니. 전혀 화장을 하지 않는 흑인 여자가 화장품 업체의 임원이 된 것. 토니 모리슨은 이런 세상을 쉽게 보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변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피 비슷한 처지가 돼도 어쩔 수 없이 가슴 속 한 구석에 숨어 있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쿡쿡 쑤시는 것. 결핍.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결코 따뜻해본 적이 없던 어머니 스위트니스의 손길에 대한 갈망.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브라이드의 곁엔 언제나 남자들이 넘쳤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과 돈만을 기다리는 미래의 배우, 래퍼, 프로 운동선수, 바람둥이이거나 아니면 이미 성공을 거둔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용맹을 조용히 증언해줄 존재로 그녀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브라이드의 앞에 등장한 부커 스타번. 황금빛 피부의 잘생긴 남자. 어깨에 흉한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한 마디도 브라이드에게 설명해주지 않는 상대. 심지어 낮에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동거인. 브라이드는 모른다, 자신의 유일한 절친인 브루클린이 부커를 유혹하기 위해 알몸으로 달려들어도 유혹할 수 없었다는 것은. 브라이드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 브라이드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다시피, 부커가 브라이드의 곁은 떠난 후에야 절절하게 알게 된다.
  “너 내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야.”
  오직 하나 남긴 메모를 두고 그는 떠났다.
  왜 브라이드는 부커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해소하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는 브라이드와 부커의 내면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상처를 먼저 발견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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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딩 엣지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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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핀천의 작품 <브이.>를 읽은 여세를 몰아 선택했다. 블리딩 엣지. 책 제목만 본 느낌은 ‘피 흘리는 가장자리?’ 이게 뭘까? bleeding edge를 검색해봤다. ‘최첨단’이란 뜻이란다. 나중에야 대강 감을 잡긴 했다. 그래도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박인찬의 정의를 인용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유용성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성이 커서, 오직 얼리어댑터만이 편하게 느끼는 최첨단 과학기술로서 단기 고수익을 노리는 벤처자본가들이 고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IT 기술”

  책은 주인공은 ‘맥신 터노’라는 이름의 아들 둘 키우는 유대인 이혼녀이다. 맥신은 지기와 오티스, 아들만 둘 있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면서 또래인 피오나의 엄마,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에서 뉴욕의 실리콘 앨리로 이사 온 바이어바 매켈모와 친하게 된다. 여기에 바이어바의 남편 저스틴이 동업자 루커스와 함께 거대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딥 아처’를 개발해 대안공간으로의 가상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벌어진다.

  동시에, 맥신 터노는, 진짜 이런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공인사기조사관’이었다가 사소한 사건에 회계감사관과 세금관리자들의 영업비밀을 공유했다는 혐의를 받아 자격을 박탈당하고 현재 ‘테일 뎀 & 네일 뎀’, 우리말로 ‘미행하고 잡아들인다’는 뜻의 작은 사기 조사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소송을 통해 자격증을 되찾을 수는 있겠지만 변호사 비용도 없고, 그동안 존경했던 업계 동료들이 쫓아낸 것이라 정나미도 떨어져 그냥 탐정사무실을 차린 것. 그러다 보니 이젠 색바랜 도덕성의 후광 밖으로 나가 어둠의 숭배자를 통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나. 하여튼 책을 보면 업계 최고 수준의 타고난 천재 탐정이다.

  90년대 영화 불법복제로 첫발을 디딘 다큐 제작자로 레지 데스파드라는 후줄근한 남자가 하루는 탐정을 찾아와 헤시슬링어즈라는 컴퓨터 보안회사의 다큐를 찍고 있는데, 회사의 일반적 기록, 거래장, 출납부, 일지, 세금계산서 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내부고발을 한다. 해시슬링어즈는 기막히게 일을 잘 한다고 업계에 소문이 파다한 컴퓨터 보안회사로 주가수익률 신기록을 해마다 갈아치우고 있단다.

  맥신이 레지와 더불어 회사의 관계사와 대표 게이브리얼 아이스를 추적해보니, 아이스 대표가 거의 망해가는 닷컴 회사를 인수해놓고는 이 회사가 거액의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납품한 것처럼 하고 천문학적인 거금을 이젠 서류 위에서밖에 남지 않은 닷컴 회사를 통해 어디론가 보내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벌써 19년이 넘게 지났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 실제로 벌어졌고, 항공기 두 대가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는 생생한 모습이 위성을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되었으며, 심지어 쌍둥이 빌딩이 폭삭 무너져 미처 대피하지 못한 숱한 사람들과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히려 빌딩으로 들어갔던 소방대원 전원이 검은 먼지 폭풍 속에 사라졌던 것이.


  <블리딩 엣지>의 시작점은 2001년 늦봄이다. 늦어도 반년 후에는 이곳 뉴욕에서 참화가 생기리라는 것은 독자도 이미 알고 있어서 거액의 자금이 지하디스트나 적어도 아랍권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맥신의 추측 하나만 가지고도 독자들은 바싹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직접 또는 TV를 통해 무역센터가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보았다면.

  이렇게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흘러간다. 딥 아처라고 하는 가상, 또는 대안의 공간이 하나. 그리고 미국 정부, 특별히 정보와 세계각지에서 벌어지는 정보활동 업무 담당 부서와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는 컴퓨터 보안업체 해시슬링어즈, 특히 업체의 대표 게이브리얼 아이스와 우리의 주인공 맥신 터너 간의, 아이스라는 이름의 냉정한 빌리어네어와 일개 탐정사무실 대표와의 관계니까 ‘숨막히는’. ‘긴박한’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이들을 둘러싼 의혹과 일종의 대립이 둘이다.

  여기에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것이, 역시 2001년의 뉴욕을 무대로 했을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면, 911 테러와 관련된 일. 만일 지하디스트 단체가 있어서 비행기를 이용한 무역센터 빌딩 테러 당시 비행기 운전을 맡은 무슬림이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워 충돌을 회피했을 경우가 생겼다면 어떻게 했을까. 핀천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두 번째 팀이 뉴욕 외곽의 한 빌딩 옥상에서 소형 미사일로 계획된 여객기가 나타나면 요격을 할 예정이었다고 그림을 그린다. 즉 비행기에 타고 있는 지하디스트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임무를 성공시키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그런데 미사일을 발사할 전사가 무슨 이유로 인해 비행기를 향해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역시 바로 옆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용 소총의 망원경을 통해 이들을 겨누는 스나이퍼를 배치한다. 즉, 보험과 재보험까지 들어놓았다는 얘기.

  물론 독자들은 핀천의 이야기를 믿거나 믿어줄 의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되지 않은 음모들의 만찬이니까. 21세기는 막을 열자마자 신자본주의와 해체된 공산주의, 분열에 이은 폭발 단계로 접어든 이슬람 극단주의, 중국으로 대변하는 동아시아로부터의 경제적 잠식 등으로 특히 미합중국 내 불안요소가 과열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언제나처럼 숱한 음모설을 마련하게 한다. 세계사에서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놀라운 이야기꾼 핀천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작자였다가 기회를 제대로 잡아 세계최강 컴퓨터 보안회사 헤시슬링어즈의 대표로 등극하는 게이브리얼 아이스를 등장시켜, 그가 정말 지하디스트들에게 투쟁의 자금을 대주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하여튼 거액의 달러를 해외로 반출을 하게 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오른 아이스는 스스로 가상공간, 대안공간의 한 존재인 것처럼 인식하는 단계로 오른다. 무슨 이야기냐고? 하 참. 이걸 얘기해? 말아? 좋다. 한다. 스스로를 프로그램 자체로 인식하는 단계까지 업그레이드 된다는 말씀. 자세한 건 직접 읽어보시라.

  그러나 토머스 핀천이다. 쉽게 읽히면 핀천이 아니다. <브이.>를 읽고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블리딩 엣지>를 읽으려 했었다. 그러다 신문 서평인가에서 핀천 가운데 읽기가 수월하다는 내용이 몇 군데나 나오는 바람에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가 아직도 터진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 내 경우엔 <브이.>보다 읽기가 더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내가 아직 또는 이제는 블리딩 엣지,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성이 커서 이런 최첨단의 내용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얼리어댑터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없이 쏟아지는 프로그램 용어의 홍수 속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던 것. 그런데 그것뿐인가 어디.

  이 책도 그렇고 <브이.>도 그렇고, <바인랜드>, <느리게 배우는 사람>, <49호 품의 경매>도, 하긴 어떤 번역서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이 책의 경우에) 무려 1920년대부터 2000년까지 대중문화 즉, 영화, TV 드라마, 음악, 만화 등의 등장인물, 배우나 연주자, 가수, 노래 제목과 가사 기타 등등을 무제한으로 쏟아내니, 이건 미국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도 나이가 좀 지긋하지 않으면 도무지 읽는 즉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치인들과 그들의 주장 같은 것까지 몽땅. 물론 내용도 위에 간략하게 소개한 것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고 숱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것들을 다 소개하기 위해서라면 독후감 읽는 데에만 일박이일이 소요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을 출간한 것이 2013년, 칠십 대 중반의 핀천이 최첨단 프로그램 언어까지 몽땅 연구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한 가지만 해도 사실 기적이고 그가 천재이긴 하다. 읽어볼 만하다.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책을 읽느라고 하도 고생을 해서. 오죽하면 그의 대표작이라고들 하는 <중력의 무지개>가 절판 상태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니 당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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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싶어요˝ 누르면서도 ˝ bleeding edge˝가 건물끝부분인가? 수준에서 넘어갔는데 뜻이 의외네요. falstaff님께서 워낙 생생하게 소개해주시니 벌써 10분의 1은 읽고 시작한 느낌... 그런데 70대 중반에 아주 새로울 프로그램 언어를 공부해서 쓰신 글이란 말인가요? 나이는 정말 핑계네요. 소설에 대한 소개뿐 아니라 인생 지혜도 새로 얻어갑니다

Falstaff 2021-10-09 22:50   좋아요 0 | URL
음. 이 책은 양심상 함부로 권하기가 쉽지 않네요. 토마스 핀천 작품이 다 그렇더라고요. 읽으면 나름대로 진지하고 좋은데, 읽는 일 자체가 참 힘이 들었습니다.
독자가 읽기도 이리 힘드는데, 그걸 쓴 작가는 어찌 쉽게 썼겠습니까. 그것도 일흔이 넘은 양반이. 어려운 직업이지요, 작가라는 것이. 물론 설렁설렁 쓰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