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딩 엣지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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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핀천의 작품 <브이.>를 읽은 여세를 몰아 선택했다. 블리딩 엣지. 책 제목만 본 느낌은 ‘피 흘리는 가장자리?’ 이게 뭘까? bleeding edge를 검색해봤다. ‘최첨단’이란 뜻이란다. 나중에야 대강 감을 잡긴 했다. 그래도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박인찬의 정의를 인용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유용성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성이 커서, 오직 얼리어댑터만이 편하게 느끼는 최첨단 과학기술로서 단기 고수익을 노리는 벤처자본가들이 고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IT 기술”

  책은 주인공은 ‘맥신 터노’라는 이름의 아들 둘 키우는 유대인 이혼녀이다. 맥신은 지기와 오티스, 아들만 둘 있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면서 또래인 피오나의 엄마,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에서 뉴욕의 실리콘 앨리로 이사 온 바이어바 매켈모와 친하게 된다. 여기에 바이어바의 남편 저스틴이 동업자 루커스와 함께 거대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딥 아처’를 개발해 대안공간으로의 가상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벌어진다.

  동시에, 맥신 터노는, 진짜 이런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공인사기조사관’이었다가 사소한 사건에 회계감사관과 세금관리자들의 영업비밀을 공유했다는 혐의를 받아 자격을 박탈당하고 현재 ‘테일 뎀 & 네일 뎀’, 우리말로 ‘미행하고 잡아들인다’는 뜻의 작은 사기 조사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소송을 통해 자격증을 되찾을 수는 있겠지만 변호사 비용도 없고, 그동안 존경했던 업계 동료들이 쫓아낸 것이라 정나미도 떨어져 그냥 탐정사무실을 차린 것. 그러다 보니 이젠 색바랜 도덕성의 후광 밖으로 나가 어둠의 숭배자를 통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나. 하여튼 책을 보면 업계 최고 수준의 타고난 천재 탐정이다.

  90년대 영화 불법복제로 첫발을 디딘 다큐 제작자로 레지 데스파드라는 후줄근한 남자가 하루는 탐정을 찾아와 헤시슬링어즈라는 컴퓨터 보안회사의 다큐를 찍고 있는데, 회사의 일반적 기록, 거래장, 출납부, 일지, 세금계산서 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내부고발을 한다. 해시슬링어즈는 기막히게 일을 잘 한다고 업계에 소문이 파다한 컴퓨터 보안회사로 주가수익률 신기록을 해마다 갈아치우고 있단다.

  맥신이 레지와 더불어 회사의 관계사와 대표 게이브리얼 아이스를 추적해보니, 아이스 대표가 거의 망해가는 닷컴 회사를 인수해놓고는 이 회사가 거액의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납품한 것처럼 하고 천문학적인 거금을 이젠 서류 위에서밖에 남지 않은 닷컴 회사를 통해 어디론가 보내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벌써 19년이 넘게 지났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 실제로 벌어졌고, 항공기 두 대가 뉴욕의 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는 생생한 모습이 위성을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되었으며, 심지어 쌍둥이 빌딩이 폭삭 무너져 미처 대피하지 못한 숱한 사람들과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히려 빌딩으로 들어갔던 소방대원 전원이 검은 먼지 폭풍 속에 사라졌던 것이.


  <블리딩 엣지>의 시작점은 2001년 늦봄이다. 늦어도 반년 후에는 이곳 뉴욕에서 참화가 생기리라는 것은 독자도 이미 알고 있어서 거액의 자금이 지하디스트나 적어도 아랍권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맥신의 추측 하나만 가지고도 독자들은 바싹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직접 또는 TV를 통해 무역센터가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보았다면.

  이렇게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흘러간다. 딥 아처라고 하는 가상, 또는 대안의 공간이 하나. 그리고 미국 정부, 특별히 정보와 세계각지에서 벌어지는 정보활동 업무 담당 부서와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는 컴퓨터 보안업체 해시슬링어즈, 특히 업체의 대표 게이브리얼 아이스와 우리의 주인공 맥신 터너 간의, 아이스라는 이름의 냉정한 빌리어네어와 일개 탐정사무실 대표와의 관계니까 ‘숨막히는’. ‘긴박한’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이들을 둘러싼 의혹과 일종의 대립이 둘이다.

  여기에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것이, 역시 2001년의 뉴욕을 무대로 했을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면, 911 테러와 관련된 일. 만일 지하디스트 단체가 있어서 비행기를 이용한 무역센터 빌딩 테러 당시 비행기 운전을 맡은 무슬림이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워 충돌을 회피했을 경우가 생겼다면 어떻게 했을까. 핀천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두 번째 팀이 뉴욕 외곽의 한 빌딩 옥상에서 소형 미사일로 계획된 여객기가 나타나면 요격을 할 예정이었다고 그림을 그린다. 즉 비행기에 타고 있는 지하디스트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임무를 성공시키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그런데 미사일을 발사할 전사가 무슨 이유로 인해 비행기를 향해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역시 바로 옆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용 소총의 망원경을 통해 이들을 겨누는 스나이퍼를 배치한다. 즉, 보험과 재보험까지 들어놓았다는 얘기.

  물론 독자들은 핀천의 이야기를 믿거나 믿어줄 의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되지 않은 음모들의 만찬이니까. 21세기는 막을 열자마자 신자본주의와 해체된 공산주의, 분열에 이은 폭발 단계로 접어든 이슬람 극단주의, 중국으로 대변하는 동아시아로부터의 경제적 잠식 등으로 특히 미합중국 내 불안요소가 과열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언제나처럼 숱한 음모설을 마련하게 한다. 세계사에서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놀라운 이야기꾼 핀천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작자였다가 기회를 제대로 잡아 세계최강 컴퓨터 보안회사 헤시슬링어즈의 대표로 등극하는 게이브리얼 아이스를 등장시켜, 그가 정말 지하디스트들에게 투쟁의 자금을 대주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하여튼 거액의 달러를 해외로 반출을 하게 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오른 아이스는 스스로 가상공간, 대안공간의 한 존재인 것처럼 인식하는 단계로 오른다. 무슨 이야기냐고? 하 참. 이걸 얘기해? 말아? 좋다. 한다. 스스로를 프로그램 자체로 인식하는 단계까지 업그레이드 된다는 말씀. 자세한 건 직접 읽어보시라.

  그러나 토머스 핀천이다. 쉽게 읽히면 핀천이 아니다. <브이.>를 읽고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블리딩 엣지>를 읽으려 했었다. 그러다 신문 서평인가에서 핀천 가운데 읽기가 수월하다는 내용이 몇 군데나 나오는 바람에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가 아직도 터진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 내 경우엔 <브이.>보다 읽기가 더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내가 아직 또는 이제는 블리딩 엣지,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성이 커서 이런 최첨단의 내용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얼리어댑터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없이 쏟아지는 프로그램 용어의 홍수 속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던 것. 그런데 그것뿐인가 어디.

  이 책도 그렇고 <브이.>도 그렇고, <바인랜드>, <느리게 배우는 사람>, <49호 품의 경매>도, 하긴 어떤 번역서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이 책의 경우에) 무려 1920년대부터 2000년까지 대중문화 즉, 영화, TV 드라마, 음악, 만화 등의 등장인물, 배우나 연주자, 가수, 노래 제목과 가사 기타 등등을 무제한으로 쏟아내니, 이건 미국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도 나이가 좀 지긋하지 않으면 도무지 읽는 즉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치인들과 그들의 주장 같은 것까지 몽땅. 물론 내용도 위에 간략하게 소개한 것들을 위해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고 숱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것들을 다 소개하기 위해서라면 독후감 읽는 데에만 일박이일이 소요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을 출간한 것이 2013년, 칠십 대 중반의 핀천이 최첨단 프로그램 언어까지 몽땅 연구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한 가지만 해도 사실 기적이고 그가 천재이긴 하다. 읽어볼 만하다.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책을 읽느라고 하도 고생을 해서. 오죽하면 그의 대표작이라고들 하는 <중력의 무지개>가 절판 상태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니 당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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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싶어요˝ 누르면서도 ˝ bleeding edge˝가 건물끝부분인가? 수준에서 넘어갔는데 뜻이 의외네요. falstaff님께서 워낙 생생하게 소개해주시니 벌써 10분의 1은 읽고 시작한 느낌... 그런데 70대 중반에 아주 새로울 프로그램 언어를 공부해서 쓰신 글이란 말인가요? 나이는 정말 핑계네요. 소설에 대한 소개뿐 아니라 인생 지혜도 새로 얻어갑니다

Falstaff 2021-10-09 22:50   좋아요 0 | URL
음. 이 책은 양심상 함부로 권하기가 쉽지 않네요. 토마스 핀천 작품이 다 그렇더라고요. 읽으면 나름대로 진지하고 좋은데, 읽는 일 자체가 참 힘이 들었습니다.
독자가 읽기도 이리 힘드는데, 그걸 쓴 작가는 어찌 쉽게 썼겠습니까. 그것도 일흔이 넘은 양반이. 어려운 직업이지요, 작가라는 것이. 물론 설렁설렁 쓰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