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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전작 <재즈>의 황금색 피부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 골든 그레이는 열여덟 살이 되고나서야 집안의 늙은 하인으로부터 실제 자신은 도도하고 미모에 눈부신 금발의 어머니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임을 듣고, 성인으로 독립하는 첫 출발을 아직도 살아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러 떠나는 것으로 설정했다. 마치 그러기만 한다면 자신이 순수한 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토니 모리슨이 여든네 살에 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의 첫 장면은 피부색이 연해 ‘높은 노란색’이라 할 수 있고, 머리카락 역시 뻣뻣한 곱슬머리 대신 부드러운 직모를 가진, 흑인이면 같은 흑인인가 어디,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진 흑인이라 자부한 여인 스위트니스가 한밤중 같은 검은색, 수단Sudan 사람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같은, 너무 검어 무서울 지경인 딸을 낳고 절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제 갓 낳은 아이 룰라 앤의 부계 역시 아주 옅은 색의 유색인이어서 남편 루이스는 아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단정을 하고는 가족을 떠나 매달 오십 달러의 우편환을 송금하는 것으로 연을 끊어버린다. 이때를 1980년대 후반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스위트니스의 절망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아예 백인으로 통했단다. 백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자녀와도 완전히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딸이 편지를 보내도 아예 편지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벽난로 속으로 집어 던졌을 정도. 한데 당시 반 혼혈 또는 사분의 일 혼혈들은 자신들이 ‘적어도 흑인은 아니다’는 것을 대내외로 증명하기 위해 흔히들 그렇게 했단다.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스위트니스의 엄마 룰라 메이 역시 쉽게 백인으로 통할 수준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흑인으로 살기를 선택해 ‘공공시설에서의 백인과 유색인종을 분리’하는 짐크로 법에 청춘시절의 대부분을 희생당하며 살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흰 피부를 향한 스위트니스의 갈망이 어떠했겠는가. 이이는 자신의 딸 룰라 앤을 양육하는데 있어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희다고 믿는 피부를 새까만 석탄 같은 딸의 피부와 될 수 있는 대로 접촉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룰라 앤이 좋지 않은 짓을 해 스위트니스가 따귀를 때리거나 엉덩이를 때릴 때 어머니의 손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더 좋았다는 추억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한다. 19세기 말에 자신이 백인인 줄 알았던 흑인 청년은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지만, 21세기의 룰라 앤은 소녀 시절에 자신의 까만 피부 때문에 백인 소년들의 짓궂은 장난을 몇 번 견뎌야 했으나 성인이 되고나서는, 채용될 때 마지막 순서고 해고될 때는 맨 처음인 사회 환경인 것만 빼고는 자신을 어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숯처럼 검은 피부를 돋보이게, 그것을 아름답다고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백인 남자 제리는, 16세까지는 룰라 앤이었다가 앤 브라이드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그냥 간단하게 ‘브라이드’로 고친 그녀에게 오로지 흰 색의 옷만을 추천했다. 신발도 흰색 위주지만 꼭 다른 색을 신겠다면 반드시 검정색으로 하고, 화장도 하지 말고, 보석이나 귀금속 일체도 못하게 했다. 작은 진주 귀고리 정도만. 그러자 흑단 같은 피부와 서아프리카 계 우량한 체질의 브라이드는 남의 이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게 사모하는 눈길인 동시에 굶주린 눈길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이후 브라이드는 1940년대 ‘실프 코르셋’으로 시작해 이제 화장품으로 영역을 넓힌 실비아 주식회사의 ‘젊은’ ‘흑인’ '여성' 임원으로 여섯 개의 화장품 라인 가운데 하나를 담당하며 회사의 지역 매니저까지 겸직하는 여피 비슷하게 성장하게 된다. 세상이 바뀌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니. 전혀 화장을 하지 않는 흑인 여자가 화장품 업체의 임원이 된 것. 토니 모리슨은 이런 세상을 쉽게 보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것보다 더 빨리 변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피 비슷한 처지가 돼도 어쩔 수 없이 가슴 속 한 구석에 숨어 있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쿡쿡 쑤시는 것. 결핍.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결코 따뜻해본 적이 없던 어머니 스위트니스의 손길에 대한 갈망.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브라이드의 곁엔 언제나 남자들이 넘쳤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과 돈만을 기다리는 미래의 배우, 래퍼, 프로 운동선수, 바람둥이이거나 아니면 이미 성공을 거둔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용맹을 조용히 증언해줄 존재로 그녀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브라이드의 앞에 등장한 부커 스타번. 황금빛 피부의 잘생긴 남자. 어깨에 흉한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한 마디도 브라이드에게 설명해주지 않는 상대. 심지어 낮에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동거인. 브라이드는 모른다, 자신의 유일한 절친인 브루클린이 부커를 유혹하기 위해 알몸으로 달려들어도 유혹할 수 없었다는 것은. 브라이드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 브라이드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다시피, 부커가 브라이드의 곁은 떠난 후에야 절절하게 알게 된다.
“너 내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야.”
오직 하나 남긴 메모를 두고 그는 떠났다.
왜 브라이드는 부커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해소하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는 브라이드와 부커의 내면에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상처를 먼저 발견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