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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평점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밀란 쿤데라의 사실상 데뷔작인 <농담>에서 청년 루트빅은 곧 넘어올 것 같은데 여간해 넘어오지 않는 여학생에게 아무 생각 없이 엽서에 이렇게 농담 한 마디를 적어 보내고,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황여정의 <알제리의 유령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연극계 일을 하고 서로 호형호제 하는 한지섭과 탁오수는 <알제리의 유령들>이란 일종의 부조리극을 만들어 놓고, 희곡을 당시 운동권 독서회인 ‘칠현회七絃會’에 건넨다. 한지섭-탁오수, 이 룸펜 인텔리겐치아들은 칠현회 회원들에게 <알제리의 유령들>이 카를 마르크스가 늑막염과 기타 병증 때문에 알제리에서 보낸 만년에 직접 쓴 극작이라고 시미치 뚝 떼고 크게 농담 한 판을 벌인다. 엉뚱한 극작을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독서회 회원들. 시절이 80년대 초반, 5공화국 때였다. 독서회가 반정부 서클(동아리)이었고 요시찰 감시중인 것도 알면서.
이들의 흔적을 좇고 있던 공안 당국은, 한지섭-탁오수가 자신들의 말이 농담임을 밝히기 전에 갑자기 들이닥쳐 이들을 덮쳤고, 표지에 카를 마르크스 지음, 이라고 쓴 극작을 발견했으니 첫 번째 난리가 난다. 두 번째 난리는 칠현회 명단에 한지섭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한의 딸 이름을 ‘은조’라고 지어준 박형민과 은조의 엄마 백소이가 들어 있었던 것. 이들은 경찰서 정보과에 이어 대공혐의를 수사하는 모처에 가서 무려 오십 일에 걸쳐 모진 고문을 받고, 이들의 배우자들인 한지섭과 (한의 친구 박형민의 아내) 장민선까지 취조를 당한다.
쉽게 얘기하자면, 농담 한 마디에 두 가족이 거덜이 난 거다. 물론 책에 나오지 않지만 나머지 다섯 명 회원들의 가정도 콩가루가 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언제나 이야기는 주인공 주변에만 머무는 법. 그들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 하는 일은 헛되리라.
조금이라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다른 장르도 아니고 부조리극작품을 썼을 수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터인데, 물론 칠현회 사람들도 나 정도의 배경은 갖고 있었겠지만, 마르크스가 극작도 썼다는 믿기지 않는 실물 증거, 표지에 카를 마르크스가 지었다고 쓰인 필사본의 복사본을 들고 단박에 인지부조화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듯하다.
이 작품이 황여정의 데뷔작이다. 황여정은 <알제리의 유령들>로 2017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에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함으로써 데뷔한다. 아버지 황석영과 어머니 홍희담. 홍희담, 하면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광주항쟁을 다룬 우리나라의 거의 첫 번째 작품집 <깃발>을 상재했던 이다. 이리 막강한 그쪽 빽을 갖고도 황여정은 십여 년에 걸친 습작기를 거쳐 힘들게 등단한 것이 보기 좋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하면 아버지 황석영은 제쳐두고, 엄마 홍희담의 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황여정의 데뷔작을 쿤데라의 데뷔작 <농담>에 비비겠는가. 쿤데라는 농담을 해서 크게 코가 깨진 루트빅 자신이 곤경을 다 끝내고 복귀하는 이야기고, 황여정은 농담을 해 가족이 해체될 정도로 큰 곤경을 당해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한 당사자들의 두 자식, 한지섭-백소이 부부의 딸 한은조(태명 율)과 박형민-장민선의 아들 박현가(태명 징)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랬을까? 율과 징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음울하다. 벽에 곰팡이가 세계지도처럼 퍼져있는 방. 처음엔 인쇄물과 책, 그러다가 나중엔 종이 기피증에 걸린 아버지 한지섭이 먼지가 풀풀 날리는 벽지를 다 뜯어내고 곰팡이 방지용 페인트를 칠해버리는 장면부터 책은 시작하는데 초지일관, 요즘 젊은 작가들이 많이 선택하는 분위기처럼 심각할 정도로 우울하다. 처음부터 끝나기 바로 전까지 거의 대부분 블루 톤. 마르크스가 쓴 극작이란 농담에 동참한 극작가 탁오수, 지금은 연극계에서 은퇴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알제리’라고 하는 옥호의 카페를 운영하는 당사자가 등장하는 씬 말고는 심히 우울하다.
거기다 독자가 마르크스가 부조리극을 썼다고 잠깐 믿게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무리수, 또는 인공적인 장치는, 작가에게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 황여정을 위하여 독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려면 더 노력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문학동네소설상이 요구하는 소설의 분량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이런 작품을 생산했다고 감안할 수 있지만, 독자는 그런 것에까지 아량을 베풀고 싶지 않다. 활자로 만든 책이 나왔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신 되돌릴 수 없으니.
작가는 자신이 한 과격한 농담을 만회하기 위하여, 또는 원래 자신의 생각을 밝히려고 탁오수의 입을 빌어,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중략)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었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고 웅변한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듣는 사람이 화자의 말을 오해했다면 그건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따라서 작가가 한 말을 독자가 작가의 뜻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안 된 이야기지만 작가 잘못이란 뜻.
어쨌거나 이 책을 마지막으로 올 한 해의 독서는 모두 마쳤다. 이것으로 2020년에 나는 내가 비운 소주병의 절반이 조금 넘는 180권을 읽었으니, 연초에 세운 2백 권 미만의 책만 읽겠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근 십여 년 동안 매년 2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더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던 것. 그래 올해 읽은 책의 권수가 앞에 2자가 붙지 않으니 좀 사람 같다. 그지?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