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도서관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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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의 선>이 인상 깊어 읽는 도중에 이 책 <수영장 도서관>을 구입했다. 앨런 홀링허스트의 데뷔작. 1983년에 완성했으나 출판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지 못해 5년 후인 1988년에야 출간을 했는데 예상외로 좋은 평판을 받아 89년에 서머싯 몸 상을 수상했다. 서머싯 몸 상은 해당연도에 출판된 작품이 있는 서른 살 미만의 작가에게 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작품 세계를 풍부하게 해 준다는 취지로 1947년에 서머싯 몸이 제정한 상으로, 1989년에는 이미 35세가 된 앨런 홀링허스트가 루퍼드 그리스찬슨, 디어드르 매든과 함께 세 명이 공동으로 수상했다. 홀링허스트의 대략적인 바이오그래피는 <아름다움의 선> 독후감에서 훑어봤으니 생략한다. <수영장 도서관>이 <아름다움의 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작품이 1983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어린아이 팔 비틀 듯이 아르헨티나의 콧잔등을 후려갈기고 치룬 선거에서 압승을 차지해 본격적인 대처 시대로 접어든 것과 동시에 시작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절세의 하모니를 이루어 향후 전 지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런던을 무대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의 선>이 그랬듯이 <수영장 도서관>도 필연적으로 일종의 정치소설로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 ‘나’, 윌리엄 벡위스. 쇠똥을 머리통에 뒤집어 쓴 채 그래도 살겠다고 엄마 배 속에서 삐질삐질 기어 나올 때, 윌을 받은 산과 의사가 기겁을 해 뒤로 자빠진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니, 아직 빽빽거리고 울지도 못하는 핏덩이가 글쎄 큼지막한 은수저를 입에 물고 있더란 것. 그러나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아버지로부터는 한 푼도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처지의 백수다. 한심할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다가 영국식으로 숙청을 당해 자작의 작위를 수여받고 현직에서 물러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할아버지 데니스 벡위스가 숨넘어가기 전에 미리 유증한 재산이 하도 어마어마해 구차한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유혹에 굴복한 것. 두 해 동안 큐빗의 <건축사전> 프로젝트의 스태프로 참여한 직장에 더 이상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냥 때려치운 것뿐이다. 게다가 조각 같은 외모. 옥스퍼드를 나온 학벌. 어떤 스타일인지 아시겠지? 진짜 재수 없다. 지금은 아파트에 서인도제도 출신의 열일곱 살 먹은 예쁘게 생긴 유색인 아이 아서를 키우고 있으니 그저 세월 가는 게 아까운 청춘이다.
  이 백수로 말할 거 같으면, 외아들의 외아들이니까 나중에 할아버지의 자작 작위가 저절로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질 태생부터 귀족이지만 참 좋은 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도무지 골라 드실 줄 모른다. 그저 바지 입고 다니는 남자면 된다는 말씀. 책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렇다. 지금 사육하고 있는 서인도제도 출신의 소년 아서도 자기 기준으로 볼 때 형편없는 지역인 스트랫퍼드 이스트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 집에 부모와 직업이 마약 소매인 형 등과 전화도 없이 살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말이지. ‘나’ 윌리엄과 애인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애완이라고도 하긴 너무 모멸적인 아서의 계급 차이는 비록 ‘나’가 속내는 쥐뿔도 아는 것이 없음에도 리버럴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옥스퍼드 출신이지만 비천한 출신 아서에게 감상적이고 살짝 잔인하며 배려 없는 성적 탐닉에 몰두하고 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어디서 본 거 같지? 그렇다. ‘나’ 윌이 아서를 대하는 건 <아름다움의 선>에서 옥스퍼드 동창인 백만장자 미남자이자 HIV 감염환자인 와니가 애인이자 주인공인 닉을 대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주인공이 을에서 갑으로 바뀌었을 뿐.
  윌의 식성은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시내의 좀 큰 집을 게이 포르노 전용 상연 장소로 만든 지하의 브루터스 극장 안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불결한 객석 의자는 물론이고 역시 <아름다움의 선>에서 몇 번 소개한 바 있는 켄징턴가든스의 공중화장실에서도 가능하다. 문제의 그날에도 윌은 켄징턴파크에서 아랍 청년을 발견하고 모종의 사인을 보낸 후 욕정과 만족감을 기대하며 공중화장실로 들어섰다가 하필이면 때와 장소를 맞춰 여든세 살의 노인이 오줌을 누다 미끄러져 자빠져 숨을 멈춰버리고 만다. 옥스퍼드 시절부터 거의 유일한 친구 제임스에게 평소에 심폐소생술을 배운 ‘나’는 다들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원 안으로 들어가 심장을 마사지하고, 지금은 우리나라 119에서도 권하지 않는 마우스 투 마우스 방법으로 숨을 불어넣어 기어이 노인을 소생시키고, 아직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노인의 비뇨기를 추슬러준 다음에 사라져 버린다. 이 노인이 누구냐 하면, 작품 후반에 상당히 중요한 준주인공 격인 동성애자 찰스 낸트위치 경.

 

  ‘나’는 수영을 잘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랬다. ‘나’가 다닌 고등학교는 특이하게도 학생 간부들에게 ‘사서’라는 직책을 주었다. 기율 사서, 축구 사서, 교지 사서 등등. 그래 ‘나’는 엉겁결에 ‘수영장 사서’가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부모는 수영장에도 도서관이 있는 것으로 알았단다. 그래 ‘나’는 수영장을 이용하는 모든 남자들이 벌거벗어야 하는 샤워장을, 모든 형태의 생식기를 볼 수 있는 도서관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나’와 낸트위치 경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코린시언 클럽에서 수영을 즐긴다는 것. 약칭 코리. 코리의 도서관에서는 남자들의 별의 별, 진짜 이색적인 것들을 다 볼 수 있단다. 그 많은 것들 가운데 ‘나’의 눈에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나.
  주인공 말고,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나도 한 이십 년 전에 목욕탕 샤워 부스에서 신기한 작자 한 번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샤워를 하고 있는데 옆에 좀 마른 남자가 서서 샤워를 시작했고, 우연히 남자의 생식기를 보았더니, 이거 영 미친놈 아냐, 거기에 “우다”라고 문신을 해놓았던 거다. 저게 뭘까? 생각해보시라. 거기에 ‘우다’라고 한글로 문신을? 그렇다고 뚫어지게 내려다볼 수만은 없어 그냥 하던 샤워만 열라 하고 있었는데, 이 작자가 비누로 거길 벅벅 문질러 거품을 한없이 내니까, 글쎄, 아 글쎄, 아오, 그게 커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우다”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아오, 띄어쓰기까지 해가며, 키만 크고 비쩍 마른 남자의 생식기가 얼마나 커졌는지 말이지, 그 위에 아오, 먹물로 딱 한 줄의 문신한 문장이 완전히 보였는바 :
  (뿌리) “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 (대가리)
 
  하여튼 ‘나’ 윌리엄 벡위스와 찰스 낸트위치는 이렇게 다시 만나 관계를 이어나가고 낸트위치 경이 자신의 자서전을 대필해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일지 아닐지 결심을 하기 위해 낸트위치 경의 몇 십 년에 걸친 일기를 읽어나가게 되며 사건은 천천히, 너무 천천히, 그리고 장황한 여러 에피소드를 곁들여 결말을 향해 전진한다. 길고 긴 전개과정에 비해 어이없다시피 한 초라한 결말을 향해.
  나는 저 위에서 이 작품을 정치소설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책엔 정치에 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를테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대처시대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팔자 좋은 게이가 자기의 강점인 돈과 학력, 가문, 외모를 이용해 남성편력을 펼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해도 사실 큰 문제는 없지만, 낸트위치 경이 몇 십 년 전에 당했던 게이에 대한 함정수사가 20세기 말에 거의 유사하게 선량한 ‘나’의 의사 친구 제임스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영국사회에서 여전한 동성애 차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이 책을, 특히 한여름에 읽기 위해서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하리라. 먼저 읽은 자의 충고를 가비얍게 여기지 말기 바란다. 여차하면 서술의 장황함과 서사의 중심에서 벗어난 수다한 묘사에 나가떨어질 우려고 있고, 동성 섹스를 지독하게 세밀하게 묘사하는 바람에 역겨울 수도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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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30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계속 새로 고침 하고 있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근데 별 넷이다! ㅋㅋㅋ

다락방 2021-07-30 09: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 싶어졌다가 섹스를 지독하게 세밀하게 묘사... 에서 뒤돌아섭니다. 터벅터벅..

잠자냥 2021-07-30 09:42   좋아요 3 | URL
진짜 지독해요. 저 사실 이 책 읽고 며칠 동안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남자들 엉덩이만 보였다는 -_-; 게이들한텐 저 엉덩이가 저렇게 좋아보이나? 뭐 이런 생각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30 09:51   좋아요 2 | URL
그거 아니더라도 잘 돌아서신 겁니다. 정신 건강 더하기 삼복 중 신체 건강을 위해서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30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조각 같은 외모. 옥스퍼드를 나온 학벌. 어떤 스타일인지 아시겠지? 진짜 재수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앨런 홀리허스트의 로망인가 싶기도 ㅋㅋㅋ

˝지금은 우리나라 119에서도 권하지 않는 마우스 투 마우스 방법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건은 천천히, 너무 천천히, 그리고 장황한 여러 에피소드를 곁들여 결말을 향해 전진˝ ㅋㅋㅋㅋㅋㅋ 이 부분도 극공감 합니다. 한 100쪽만 쳐냈어도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에휴.

Falstaff 2021-07-30 09:56   좋아요 1 | URL
돈 많고, 명문 사립고등학교와 옥스퍼드 졸업하고 여기다가 생기기도 기막히게 잘 생겼고, 심지어 운동도 잘 하고, 하원의원의 아들도 <아름다움의 선>에서 나오잖아요. 그집 문간방에서 서생으로 지내긴 하지만요. 그거 틀림없이 작가의 로망일 겁니다. 아니면 스스로 조금은 그렇든지요. ㅋㅋㅋㅋ

작품이 너무 길어요. 심지어 없으면 더 좋을 부분도 눈에 많이 띄기도 하고요. 애초 헨리 제임스를 롤 모델로 했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오히려 더 심한 거 같더군요.

잠자냥 2021-07-30 09: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폴스타프 님 정말 그거 실화에요?? 우다?????? 정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 글자 혹시 0.005 크기로 쓴 거 아니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다 그 사람은 요즘 그 2030 남자들이 지랄발광하는 손가락 모양에 유독 크게 격분할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30 09:5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옆에 선 사람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글자 크기 아니었겠습니까. 사실 여부는 ㅋㅋㅋ 안 알려드림.

잠자냥 2021-07-30 09:54   좋아요 3 | URL
아 근데 전 좀 이 에피소드 실망이에요. 폴스타프 님의 꽃미모 소년 시절 어느 중년 남자가 공원에서 다가왔다... 뭐 이런 일화일 줄 알았는데. 쳇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30 10:00   좋아요 3 | URL
마흔 정도 됐을 때 한 열 살 정도 어린 남자가 접근했던 일이 있었습지요.
그때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 유혹받는 일이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다는 것을 (폴의 엉덩이가 예쁘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실 거고요). 마음에 들지 않는, 아니면 싫은 남자가 추접하게 자꾸 접근할 때 여성이 혹시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이건 ˝자각˝이라고 해야할 거 같은데요, 하여튼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여자들한테 흰소리 안 하는 습관이 생겼으니까요. 여기서만 주둥이 터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30 10:05   좋아요 3 | URL
어머 꽃중년 폴! ㅋㅋㅋ 그 경험으로 좋은 교훈을 얻으셨군요! ㅎㅎ
그래서 폴스타프 님이 서재에서도 (일상 생활에서도) 개저씨 소리 안 듣는 걸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31 08:09   좋아요 0 | URL
어머 폴스타프님, ㅋㅋ 당시 어떻게 대처를 하셨나요? ㅋㅋ

Falstaff 2021-07-31 10:1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전 직진 스타일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라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싫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그게 제일이지요 뭐.

2021-07-30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0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0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0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1-07-31 0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다가 우다에서 빵 터져서 숨고르기 하고 계속 읽어나갔습니다. 이 책 표지와 제목과 완전 다른 내용이네요. ㅎㅎ

Falstaff 2021-07-31 07:2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재미있으셨습니까!
올 여름 가뜩이나 더운데 수영장이 제목이라고 이 책 고르신 분들은 고생 깨나 하실 겁니다. ㅎㅎㅎㅎ

coolcat329 2021-07-31 0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영장도서관이 모든 형태의 생식기를 볼 수있는 도서관이군요 ㅎㅎ

우다! ㅋㅋㅋㅋㅋ 아휴 폴스타프님 덕분에 아침부터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Falstaff 2021-07-31 10:19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재미있으셨어요!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표류자들의 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68
기예르모 로살레스 지음, 최유정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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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르모 로살레스 Guillermo Rosales (1946~1993). 겨우 47년을 살다 간 쿠바 출신 작가다. 이 책 <표류자들의 집>의 주인공 ‘나’, 윌리엄 피게라스와 아주 비슷한 삶을 살았다.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위대한 마르셀 푸르스트와 헤르만 헤세, 제임스 조이스, 아서 밀러, 토마스 만을 탐독하고 20년 전에 그러니까 10대 시절에 쿠바에서 연애소설을 한 편 썼으나 출판은 하지 못한 경력이 있다. 부르주아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랑 이야기로 주인공들의 동반 자살로 결말을 맺는 내용인데 이게 쿠바 정부 문학 전문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평을 들어 이후 ‘나’는 미쳐버렸단다. 실제로 로살레스는 15세 무렵부터 잡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고 소설도 써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지만 전에는 정신착란증이라 불렸던 조현병 증세로 사회부적응자로 지내야 했다. 1979년에 카스트로의 전체주의 체제를 견디지 못해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이애미에 정착한 작중 주인공 윌리엄 피게라스와 같은 경로로 마이애미에 도착한 작가는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이후 1987년에 중편소설 <표류자들의 집 Boarding Home>을 발표해 미국 내에서 스페인 언어로 쓴 작품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황금 글씨 Golden Letter 상을 멕시코의 유명시인 옥타비아 파스로부터 건네받았다.
  기예르모 로살레스의 평생을 괴롭힌 부적응증과 조현병 증세는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자신이 쓴 원고를 난데없이 없애버리는 일을 멈추지 않아 1967년 작품 <비올라 게임 El Juego de la Viola>과 중편소설 <표류자들의 집> 두 편만 남아 있다고 하며, 20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엔 아직 번역된 작품이 없지만) 카를로스 몬테네그로, 레이날로 아레나스와 함께 쿠바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일컬어진다고 한다. 작품 두 개만 남아 있는데 한 시절을 대표하는 작가라니 좀 과장인 듯싶기도 하나 하여튼 그렇게 위키 백과에 쓰여 있다.

 

  책의 원래 제목인 Boarding Home이란 무엇인가. 각주에 이렇게 쓰여 있다.
  “미국에 있는 사설 요양소. 육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나 노인들이 입원해 지낸다.”
  주 정부에서 생활이 빈민계층의 장애인들을 다 돌볼 시설을 운영하기 힘이 드니 민간이 일정 시설을 하고 노인을 포함한 장애인들을 관리하는 제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작품에서는 시설에 들어 있는 장애인 한 사람 당 314달러를 지원했으며 용도불명의 보조금으로 3천 달러를 따로 지원해 모두 23명을 수용한 ‘보딩 홈’은 정부로부터 모두 10,222달러를 받는다고 했는데, 1년인지 1개월인지는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설마 1개월이겠지, 인당 314달러니까?
  일찍이 열다섯 살 때부터 잡지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나’가 스페인을 거쳐 마이애미에 도착한다. 먼저 헤엄을 치거나 보트를 타고 미국 땅에 잠입해 이젠 자리를 잡은 쿠바-아메리칸 친척들은 고국에서 성공한 천재가 도착했겠거니, 비행장에 환영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었는데 정작 공항 입국장에서 빠져나온 ‘나’는 나이 서른 좀 넘어서 벌써 이도 거의 없는 합죽이에 비쩍 마르고 잔뜩 겁먹은 온전치 못한 작자라 한 순간에 다들 차를 타고 내빼버리고, 고모 한 명만 남아 낡은 쉐보레에 ‘나’를 실어 집에 데려간다. 그리고 삼 개월. 고모도 없는 살림에 더 이상은 군식구를 보살필 수 없어서 다시 쉐보레에 태워 집 바깥에 <보딩 홈>이라 쓰여 있는 변두리의 한 보호소에 들여보낸다. 여기서 잘 지낼게야. 내가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너도 이해할 게야. 라는 말을 남기고.
  물론 ‘나’는 이해한다. 고모 혼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국 생활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럼 인간쓰레기들을 수집해 놓은 집합소 보딩 홈의 구성원을 한 번 보자.
  정신지체자 르네와 페페. 옷에 오줌을 지리는 쭈그렁 노파 힐다. 산송장의 귀부인 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지평선만 쳐다보는 반백의 피노. 동성애자이며 은퇴한 권투선수 타토. 유리 눈알에 끊임없이 누런 진물을 흘려대는 애꾸눈 늙은이 레예스. 난쟁이 나폴레옹. 미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올리브색 피부의 건장한 양키 루이. 세상의 온갖 악행을 조용히 목격해온 페루 사람으로 보이는 인디오 늙은이 페드로.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소리쳐댈 줄만 아는 아흔 살 노인네 카스타뇨. 여기에 보딩 홈의 주인으로 첫인상부터 상당히 역겨운 뚱뚱한 비곗덩어리 쿠르벨로. 쿠르벨로가 집을 비우면 자리를 대신하는 실제적 권력자로 겨우 주당 70달러밖에 받지 못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수용자들을 수탈해 늘 버드와이저에 취해있는 아르세니오. 식당에서 음식을 배급하는 물라토 아가씨 카리다드와 가정부 호세피나. 기타 등등.
  한 마디로 세상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수용해 놓은 곳. 그리하여 우리말 제목을 “표류자들의 집”이라 했을 터이다.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세상의 루저들.
  이곳에도 나름대로 계급이 있어 이것이 식당의 테이블에 나타나는데, ‘나’가 처음 앉아야 했던 식탁은 말 그대로 불가촉천민 식탁으로 구성원이 애꾸눈 늙은이 레예스, 노파 힐다, 나이 많은 정신지체자 페페, 그리고 ‘나’가 앉은 곳이다. 그림이 그려질 듯. 이들은 형편없는 처우에 분노할 줄도 모르고, 고발할 줄도 몰라, 보딩 홈의 주인 쿠르벨로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주고, 하수인 아르세니오에게 푼돈마저 뜯기며, 쉴 새 없이 요실금에 시달리는 노파 힐다는 수시로 고통스러운 체위로 아르세니오의 욕구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자유를 찾을 방법은 오직, 노숙인이 되는 것 하나만 남았는데, 그것보다는 여기가 편하다는 거 때문에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곳에도 사랑이 꽃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속에서 사랑은 이 작은 지옥에서 벗어나 새롭게 그나마 정상적인 삶과 일을 가질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표류자들에게 내일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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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29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거 어제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도서관에 있는 거 확인하고 다시 뺐는데! 찌찌뽕. ㅋㅋㅋㅋ

Falstaff 2021-07-29 09:42   좋아요 3 | URL
굳이 돈 들여 살 필요가 있을까...는. 도서관 이용이 갑 중의 갑입니다!! ㅋㅋㅋ

Falstaff 2021-07-29 10:04   좋아요 2 | URL
아, 드디어 내일 <수영장 도서관> 독후감이군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9 10:12   좋아요 2 | URL
월요일부터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걸작, 명작은 계속 배출되고 있다. 다만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새삼 이런 생각을 해봤다. 새로 쓰인 장편소설의 양적 팽창과 비례하여 좋은 작품도 늘어났지만 아직 세상의 다수 독자에게 발견되지 못해 걸작, 명작의 관을 쓰지 못한 것이 많을 거라는. 그런 의미에서 책 깨나 읽는 독자들이 자기들만 간직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롭게 널리 읽히는 작품들도 나타나고, 그것이 한 세대를 거친다면 드디어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작품이 평론가가 아닌 독자들의 손에 의하여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적 성과하고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재미있을 거 같다.
  읽으면서 이거 명작인데, 싶었던 책 열 편을 골라봤다. 순서는 무작위다.

 


다이허우잉, <시인의 죽음>

 

  다이허우잉의 첫 작품. 사실 이이 같은 경우엔 그의 다른 두 작품 <허공의 발자국 소리>, <사람아, 아 사람아>를 뭉쳐 하나로 얘기하고 싶다. 1938년생인 다이허우잉 본인이 문화혁명 당시 인텔리겐치아 출신이라서 반혁명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룬 경험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어려서부터 공산주의의 세뇌를 확실하게 받아 차세대 혁명의 꽃으로 피어갈 즈음이었으니 문화혁명의 집단적 몰개성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이 와중에도 일부는 세태의 파도를 타고 승승장구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했으나, 간혹 혁명과 전혀 관계없는 추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직접 목격한 작가는 문화혁명을 시대적 배경으로 자기와 같은 계급인 지식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당대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손실’과 허튼 정치적 파도 속으로 숨져간 이들을 세밀하게 그려놓았다. 현대 중국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큰 목소리와 집단주의가 당시에서 비롯한 상처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 비단 나 한 명에 국한된 것일까.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작가 안드리치가 19세기 말에 태어난 사람이라 모던 클래식이란 명칭이 어울리지 않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지만 보스니아 출신이라 그의 작품이 워낙 알려지지 않아 이 자리에 올렸다.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는 유럽과 터키를 가르는 드리나 강이 있는데 이 위에 4백 년 전에 터키 귀족이 다리를 놓아 어린 이보 안드리치가 날마다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고 한다. 이때 작가가 들은 다리에 관한 이야기들과 나이가 차 다리에 얽힌 각종 이야기를 수집하여 한 작품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책이다. 16세기 초반에 다리가 지어지기부터 1차 대전 발발 시까지 다리 주변 원주민의 삶의 모습, 착취와 죽임과 죽음, 이웃 간의 오해와 반목,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사람들에 관하여 뛰어난 문장으로 깎아 놓았다. 놀랍게도 특별한 주인공 없이, 만일 있다면 다리 자체를 주인공으로 해서 다리와 관련한 모든 귀하고 천한, 부유하고 가난한, 자랑스럽고 부끄러운 사람들의 파노라마. 그리고 삶의 냄새.

 


존 케네디 툴, <바보들의 결탁>


  내가 꼽은 단 하나의 희극. 자살로 생을 마친 존 케네디 툴의 유작이자 죽은 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품. 생전 처음 만나는 캐릭터 이그네이셔스는 이미 전설이 되어 사냥 모자를 쓴 뚱뚱한 그의 동상을 뉴올리언스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물론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는 코비드 19가 종식되어야 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엔 가장 독한 악당이 출현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천만의 말씀이란 걸 정확하게 보여준 작품. <바보들의 결탁>에 등장하는 가장 독한 악당은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자신이다. 기껏 대학원까지 졸업시켜주었더니 자기 밥벌이 하나도 못하고 여태 어머니 집에 얹혀살면서 위stomach 유문에 문제가 있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트림이나 꺽꺽 해대는 식충 인간이자 사회 부적응자. 존 케네디 툴은 자신을 이그네이셔스에 환치시켜 일상생활에 문제만 일으키는 비생산적 행위를 낱낱이 고백하면서, 결국 자신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지만 이그네이셔스에겐 살아야 해, 살아야 해, 끝까지 격려해마지 않는 모습을 보여 독자로 하여금 목이 컥컥 메게 만든다. 진정한 희극은 눈물을 수반한다는 진리.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대산세계문학총서 특유의 빽빽한 편집을 기준으로 해서 세 권, 1,450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 쉼표와 마침표를 제외한 어떠한 문장부호를 찾는 분께는 만 원 드림. 간혹 나오는 대화도 모두 간접화법으로 되어 있어 여차하면 읽은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 일쑤다. 번역한 한글이 원고지 6,700매. 이걸 읽는 동안 나는 여드레 동안 변비 증세로 고생했다. 이 책을 스토리 하나만 읽기 위해 선택할 수는 없다. 여태 읽어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수준의 미술비평, 예를 들어 <페르가몬 신전의 부조>나 <메두사 호의 뗏목> 같은 작품의 디테일한 설명을 읽으면 넋이 다 날아간다. 어떤 수련을 거치면 이런 심미안을 가질 수 있을까 싶은 철학적 깊이의 세부묘사. 또한 호기심을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공산주의 운동사까지. 이 작품은 대작이고 명작이다. 그러나 주의하시라. 재미는 없다. 하여,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저항의 미학>을 읽는 일은 고난의 행군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도 드디어 길고 긴 고난을 다 마쳤을 때의 놀라운 성취감은 다른 어떤 책의 경우보다 대단하리라는 것을 보장한다. 성취감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때로는 그렇다.

 


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장황하고 장려한 걸작. 코엔 같은 문장은 읽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쏠랄>, <망주끌루>, <용자들>과 함께 쏠랄 가문 4부작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나머지 세 작품도 하루빨리 번역 출간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진다. 주네브 리즈 호텔에서 처음 본 여인에게 반하여 불륜의 사랑을 하게 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국제연맹 사무총장 자리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프랑스 국적마저 몰수당해 스위스 유부녀 ‘아리안’과 함께 스스로 유폐당하는 이야기. 1930년대 파시즘의 암운이 몰려들고 전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갈수록 노골화되는 가운데 아무것에도 기댈 수 없고, 피할 수도 없고, 오직 사랑 하나로 모든 것과 모든 이들의 백안시를 견뎌야 하는 쏠랄의 장황하고 진정으로 숨 막히는 러브 스토리. 탈대로 다 탄 이들의 사랑, 이제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이런 내용보다 더 독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역시 문장이다. 코엔 스스로가 애초에 문학을 공부해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으며, 소설을 쓰면서 상의할 작가 친구도 없었다고 하니 그의 문체와 문장이 독특한 건 이해가 된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매혹적인 문장 아냐 이거?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작가 자신이 철학자이다. 철학자 출신의 작가는 많다. 그래도 철학박사 출신 가운데 피어시그 만큼 작품 속에 노골적으로 철학을 가져다 심은 작가는 별로 없다. 이 책의 화두는 질quality. 꾸미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성질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긴장하지 마시라. 철학이 소설이란 집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철학 본연의 자세, 즉 같은 말을 어떻게 하면 잘난 척하기 좋게 어렵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을까를 고민한 작가의 입장/자세에서 글을 썼으니까. 그리하여 질quality의 본질은 아레테, 탁월함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내가 피어시그의 말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철학적 논의에 끼어들어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정도를 얻을 수 있었다. 작품 속에 파이드로스는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열한 살 먹은 아들을 태우고 미국 중부를 출발해 서부까지 휴가여행을 감안하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을 철학적으로, 모터사이클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기계공학적으로 설명해나간다. 아쉽게도 작품의 화자 ‘나’, 파이드로스는 여행이 끝날 즈음해서야 아들 크리스가 여행 내내 볼 수 있었던 것은 미 대륙 서부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등짝 밖에 없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 아들 크리스는 잘 자라다가, 실제로, 10대 후반에 노상강도의 칼에 맞아 숨진다. 이이의 다음 책 <라일라>에 실려있다.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작가 알렉시 제니는 이 책을 쓰기 바로 전까지 리옹의 한 고등학교 생물교사였다. 내가 선정한 모던 클래식의 공통점이 대개 글씨가 빽빽하게 들어찬 작품이란 건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8백 쪽이다. 그러나 단 한 페이지도 함부로 넘기지 못할 만큼 전개가 진지하다. 백수 비슷한 주인공 화자 ‘나’가 공원에서 예전에 인도차이나에 참전한 적이 있던 노인 빅토리앵 살라뇽을 만나 그의 회고록을 대신 써주는 것이 바로 이 책 <프랑스식 전쟁술>이다. 처음부터 책은 비정하다. 현대전. 이라크를 폭격하는 미국 공군. 캄캄한 밤에 초록색 불빛이 한 건물에 반짝 비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방송되는 순간, 그 건물은 고성능 소이탄에 맞아 건물 속에 있던 모든 생물체와 함께 한 순간에 사라진다.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는 자국 군인 한 명에 현지인 열 명의 처형하겠다고 했으나 아마 백 명 이상의 목숨을 거두어 갔을 것이다. 살해당하는 사람은 몇 명이,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반면에, 살해한 측의 희생자는 이름과 나이와 죽은 장소까지 모두 알려지고 훈장을 수여하며, 남은 가족들에게 보훈의 혜택을 주는 현대전. 강대국이 설계하고 만든 기계가 제삼세계 사람을 차별없이 사망에 이르게 하고 국토를 황폐화 시키는 것이 진정한 현대전의 정체라고 주장하는 프랑스 사람 알렉시 제니. 세계사에 관한 깊이 있는 사색을 원하시는 분에게 추천하는 진정한 걸작.

 


헤르만 브로흐, <현혹>


  저 먼 옛날 인간보다 먼저 세상을 지배했던 거인이 살던 시절, 거인들은 하늘이 땅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돌을 가져다 산을 만들어 하늘과 땅을 떼어 놓았다. 이때 만들어진 산이 쿠프론 산. 산 속에 거대한 금광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 어느 날 평화로운 이 땅에 피곤한 몰골을 한 ‘마리우스 라티’라는 젊은이가 석탄을 운반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도착해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쿠프론 산 속의 금광, 예전에 난쟁이들이 채굴하던 전설의 금을 이제 다시 파낼 수 있다는, 고을 공통의 꿈, 비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희망,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그저 성취 가능한 목표가 되고, 이것이 주민들에게 허튼 희망을 주어 자신의 의도대로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마리우스 라티의 주민들에 대한 현혹임을 지적하는 일부 사람들과의 갈등이 벌어지는데, 누가 읽어도 1930년대 초반의 독일과 비교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적 축제를 이용한 피의 정화. 거대한 최면의식 상태에 휩쓸리는 일, 이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실체이며, 이와 똑같은 현혹은 언제 어디서도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엄정한 예언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지금 바로 돌아보라. 우리는 현혹되고 있는 건 아닌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다음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도 함께 이 자리에 놓았으면 좋겠다.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누가 읽어도 자연스럽게 카프카를 연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프가가 특정 인물, 측량사나 K, 또는 게오르기를 관찰했다고 하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집단, <저항의 멜랑콜리>에서는 한 도시의 시민 전체, <사탄탱고>에선 집단농장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 이 작품은 시작부터 서늘하다. 가을비의 첫 방울이 떨어질 무렵 호흐마이스의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던 날 밤,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집단농장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들의 도착 소식에 농장 사람들이 흥분하던 분위기 속에서 성당 종탑이 무너진 것이 언제인데 종소리가 들리다니,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부녀 슈미트 부인과 정을 통하던 절름발이 후터키는 그길로 침대에서 줄행랑을 놓는다. 이렇게 악마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하는 명편. 이리미아시가 오기만 하면 농장의 형편이 많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자연스럽게 부풀기 시작하고, 드디어 그가 도착한다. 어김없이 농장에선 갖가지 사연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도 과연 또다른 현혹에 불과한 것일까?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우리나라 출판계에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카탈루냐 직역. 거대한 시간을 관통하는 악의 연대기. 이 악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제자가 최전성기 시절에 만든 비알을 매개로 전개된다. 14세기 말의 종교재판관은 유대인 의사에게 이단의 죄를 물어 고문 끝에 사형에 처하고, 죄수의 혀를 잘라 증거를 없애라는 명을 내린다. 명령에 불복한 수사 미켈 데 수스케다는 종교재판관에게 강간당한 여인이 준 단풍나무와 솔방울을 주머니에 넣고 종교재판관으로부터 도망해 먼 수도원에 도착하지만 추격자의 손에 의하여 죽는다. 이때 그의 주머니에 들었던 씨앗이 수사의 시신을 양분으로, 나중에 거대한 단풍나무와 전나무가 되어 21세기까지 전혀 변하지 않는 음색을 자랑하는 문제의 바이올린 비알이 되는 것. 6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무와 바이올린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악의 파노라마. 여기에 마지막, 2차 세계대전을 장식하는 한 준천재와 이 준천재의 아들 진짜 언어천재에 이르러 이야기는 보다 더 생명력을 갖고 날것으로 뛰기 시작한다. 이렇게 악의 거대한 난장판 속에서도 한 지고한 사랑은 계속되고 누군가는 쓸쓸하게 죽어가는 거대 서사. 세 권에 달하는 길고 긴 작품이지만 좋은 책은 아무리 길어도 언제 읽었는지 모르게 이미 넘긴 책갈피가 아까운 법. 직접 경험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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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28 15: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드리나 강의 다리] 갖춰둔지 오만년 되었고 [사람아 아 사람아] 역시 마찬가지인데 와 이 페이퍼에 나오다니 너무 씐나요! 꼭 읽어야겠어요. 물론, 읽으려고 사둔것이지만요.. 흠흠.

Falstaff 2021-07-28 15:1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아무때나 읽으면 어때요! 암토랑도 안혀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1-07-28 15:20   좋아요 4 | URL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나왔을 때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막 읽고 관심받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저랑 아주 거리가 먼 책이라고 생각해 관심을 코딱지 만큼도 안줬거든요. 오늘 이 페이퍼 읽으면서 ‘뭐야, 소설이었어?!‘ 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거 보관함에 넣어야겠어요. 맙소사, 소설이라니.. 전 이과생들이 읽는 책인줄 알았네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Falstaff 2021-07-28 15:23   좋아요 3 | URL
아, 이것도 쓴다는 것이.... 말입니다. ㅋㅋㅋ
<선과 모터사이클..>, <저항의 미학>은 함부로 지르시면 아니 됩니다.
<선과...>는 그래도 조금 덜한데, <저항...>은 읽기 위해 코피 두 번 터지고 세 번째 성공했습니다. 본문에 얘기한 대로 재미는 없어요.

잠자냥 2021-07-28 15:2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일단 좋아요 누르고 읽어야지; 폴스타프 님 여름 방학(휴가) 맞이 알라딘 개미지옥 장바구니 폭탄 쇼 주최하셨군요! ㅋㅋㅋㅋㅋㅋㅋ 여러분 다들 담아요, 담아~ 땡스 투 잊지 말고~~

Falstaff 2021-07-28 15:24   좋아요 5 | URL
위 다락방님 댓글에 썼는데 또 써야겠습니다. 중요해서요. ㅋㅋㅋㅋ
<선과...>와 <저항의 미학>은 신중하게 생각하시라는.... 또 귀싸대기 맞을까 겁납니다. ㅋㅋㅋㅋㅋ

mini74 2021-07-28 15: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 여름 휴가 권장도서인가요 ㅎㅎㅎ 사람아 , 아 사람아 읽을 때 나는 20대얐는데. 지금은 ㅠㅠ ㅎㅎ

Falstaff 2021-07-28 15:25   좋아요 3 | URL
그게 80년대에 나왔을 텐데요. ㅋㅋㅋㅋ 저절로 연식 커밍아웃? ㅋㅋㅋㅋ

mini74 2021-07-28 15:37   좋아요 3 | URL
80년대에 나왔지만 90년대에 읽었어요 ㅎㅎㅎ 바보들의 결탁 읽고싶은데 품절이네요 ㅠㅠ

페넬로페 2021-07-28 15: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10개 드리고 싶어요.
좋은 작품 소개해주셔서도 감사하지만
작품 중 몇개는 저의 추억을 자극하네요
☆☆☆☆☆☆☆☆☆☆~~

Falstaff 2021-07-28 15:36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1-07-28 15:2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책 깨나 읽었다고 자부(?)하는 저조차도 읽지 않은(또는 사두고 미루기만 한) 책이 이 리스트에 많습니다. 그만큼 제게는 묵직하고 뭔가 버거워 보이는 작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일단 제가 중국 작품에도 좀 편견이 있어서 그간 멀리했던 다이허우잉 작품은 올해 꼭 읽어보겠습니다....

여름 휴가엔 <주군의 여인>을 읽어야겠어요. 폴스타프 님과 다부장님도 아주 재미나게 읽으신 것 같아서요. ㅎㅎ

<바보들의 결탁>은 제 기억이 맞다면 폴스타프 님 추천으로 쿨캣 님도 굉장히 재미나게 읽으셨던 것 같은데, 저놈의 책 표지가 참 비호감이라 이상하게 손이 안 가네요.... 하지만 극복해보겠습니다.

아무튼 폴스타프 님의 깊고 묵직하고 너른 독서 이력 존경합니다. 덧붙여 고백하옵자면, 제가 알라딘 서재 시작하고 젤 먼저 찜한 서재가 폴스타프 님 서재인데요, ㅎㅎㅎ 제가 좀 보는 눈이 높습니다. 뿌듯하군요(아니 왜 내가?ㅋㅋㅋㅋ).

다락방 2021-07-28 15:39   좋아요 4 | URL
아아 제일 먼저 찜한 서재가 다락방 서재가 아니라니, 아니라니, 아니라니...
아아...
왜 나일 순 없는거죠? 왜죠? 젠더 트러블 리뷰 못쓰는 사람이라 그런건가요? 네?
(엉엉 운다)

다락방 2021-07-28 15:40   좋아요 6 | URL
덧붙여,
잠자냥 님의 [주군의 여인] 리뷰 기다립니다. 잠자냥 님 정말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아요!!

Falstaff 2021-07-28 15:40   좋아요 6 | URL
그게, 암만해도 모던 ˝클래식˝이란 타이틀을 씌워놓으니까 재미보다는 작품 자체를 먼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다이허우잉과 <주군...> 좋습니다! 근데 여름 휴가 있으세요? 울 회산 아무때나 가라고 해서 여름휴가 일곱 개 가운데 하나는 썼고 하여튼 여름 지나고 선선해지면 떠나려고 합니다. 아이고, 여름엔 살 접히는 거 싫어서 아무데도 안 가요!

흠. 저도 서재 초기엔 그저 독후감 올리는 곳인줄만 알았지 이런 자리가 될 줄 몰랐습지요. 이 개미지옥으로 처음 초대하신 분이 잠자냥 님이라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8 15:41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시절에도 다부장님은 엄청난 인기 스타라 제겐 너무나 멀고먼~ 저 높은 별에 있던 분이라 감히 엄두가 안났습니다요!

Falstaff 2021-07-28 15:42   좋아요 4 | URL
맞아요, 맞아요!
어딜 신삥 비슷한 것들이 다락방님한테 함부로 우리 친구해요! 하고 말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거 진심입니다. ^^

다락방 2021-07-28 15:53   좋아요 4 | URL
무슨 말씀을 그렇게들 하십니까 ㅠㅠ

폴스타프님, 잠자냥 님 책 읽고 독후감 쓰시는 거 보면 저같은 쪼렙..들어본 적 없는 책 나올 때마다 이건 뭐시여.. 하고 있는걸요. 아무튼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모르는 책 막 쓸어담는 기!쁨!
그런데 정말 기쁜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통장에 잔고는 지로우.. 빵!

이만 총총.

coolcat329 2021-07-29 09:27   좋아요 3 | URL
ㅋ 잠자냥님 바보들의 결탁 저 표지, 밴드 어느 곳에서는 제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습니다 ㅋㅋ 그만큼 저 인간이 웃기거든요 ㅋ

잠자냥 2021-07-29 10:17   좋아요 2 | URL
쿨캣 님/ 프로필 사진! 대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바보들의 결탁> 표지 이미지........ ㅋㅋㅋ 왠지 폴스타프 님 서재 프로필 사진이랑 바슷하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9 12:35   좋아요 3 | URL
앗 그렇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저 폴스타프 그림이 갑자기 나와서 순간 헉! 했습니다. ㅋㅋ 웃기더라구요.

Falstaff 2021-07-29 12:36   좋아요 2 | URL
이그네이셔스는 폴스타프보다 훨씬 험상궂게 생겼어요.
그리고, 맘에 진짜 안 드는 건,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겁니다!!!!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7-28 21: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으악!! 조심해, 개미들~! 개미지옥이야!!!

Falstaff 2021-07-29 09:22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번엔 조심하세요. 지옥 같은 휴가가 될 수도 있을 듯하거든요. ㅋㅋㅋ

coolcat329 2021-07-29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는 정말 유익합니다.알려지지않은 명작 추천~
<사람아 아 사람아>는 저도 예전에 구해놓은 책인데 안 읽었습니다.
<사탄 탱고>도 폴스타프님 리뷰읽고 구입은 해뒀으나 또 대기 중이구요. 근데 <저항의 멜랑콜리> 표지가 또 너무 멋지니 또 구입해야겠습니다.
아휴! 나는 고백도..사야하고 진짜 지옥이여요!

<바보들의 결탁>은 😂
어디선가 제 프로필 사진으로 쓸 정도로 사랑합니다.

Falstaff 2021-07-29 09:43   좋아요 2 | URL
ㅋㅋㅋ 고백 부터 읽으셔요. 진짜 재미, 죽여줍니다.
결탁을 프로필로 쓰시면, 아이구, 그것도 재미나겠습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9 10:01   좋아요 2 | URL
네 고백을...사겠습니다. 아휴 지옥지옥지옥...

잠자냥 2021-07-29 10:22   좋아요 3 | URL
고백은 사야한다니까요!!! 전 햇볕에 책등 바래질까봐(제 방에 빛이 많이 들어와서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 책등 빛이 다 바랬거든요;) <나는 고백한다>만 책등 안보이게 해놓은 상태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9 12:34   좋아요 2 | URL
아 ㅋㅋㅋㅋ 😆 정말 아끼시는 책이네요.

바람돌이 2021-07-30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나는 고백한다를 읽고 있고-2권 시작했습니다.
한 20년도 전에 읽었던 사람아 아 사람아를 보니 또 반갑고요.
성취감 때문에 책을 읽기도 한다는 말씀 때문에 저항의 미학에 살짝 땡기기도 하고 그렇네요. ㅎㅎ

Falstaff 2021-07-30 09:21   좋아요 1 | URL
고백, 진짜 재미나지 않으세요? ㅋㅋㅋㅋ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도무지 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사람아, 아 사람아> 이것도 다들 좋다면서 머리에서 단박에 떠오르지는 않는 숨은 작품인 거 같더라고요. ㅎㅎ

초딩 2021-08-06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페이퍼 축하드리옵니다!

Falstaff 2021-08-06 19:33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Falstaff 2021-08-06 19:3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이하라 2021-08-06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1-08-06 19:3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독서괭 2021-08-06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1-08-06 19:3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3마넌 벌었습니다.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8-06 19:38   좋아요 1 | URL
책사러 가요!~ㅎㅎ

Falstaff 2021-08-06 19:4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조금만 사세요!

그레이스 2021-08-06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1
노먼 메일러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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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노먼 메일러. 조상이 만날 벨/노커를 두 번 울렸던/두드렸던 우편배달부였나 보다, 메일러라니. 일찍이 <밤의 군대들>을 읽고 또 메일러를 읽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지난번에 어떤 작품을 읽는 중에 등장인물이 <나자裸者와 사자死者 :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를 노상 입에 달고 다녀 두 권 1,200쪽에 달하는 긴 소설을 읽었다. <밤의 군대들>을 읽고 왜 실망했느냐 하면, 정권 혹은 공권력에 의한 반(베트남)전 학생운동의 탄압에 대한 항의, 그건 동의한다 해도, 지식인인 자신한테도 일반 시위 군중과 거의 동일하게 적용한 공권력의 대처에 대한 불만은,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국가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일부국가에선 뭐 별로 감흥이 와 닫지 않는 수준으로, 이 양키들 엄살이 보통이 아녀, 퓰리처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미국 시민에 있는 것과 같이 <밤의....>에서 보이는 메일러의 엄살에 감명 또는 동감을 얻을 수 있는 독자 역시 미국 시민에 국한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서유럽 국가에선 같거나 비슷한 질량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겠네. 소위 말하는 백인 선진국가들.
  <벌거벗은...>은 <밤의....>보단 좋았던 것이, 직립보행을 시작하고 씨족 사회를 벗어난 호모 사피엔스들이 수만 년 동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여왔던 전쟁/전장을 소설의 무대로 하며, 또 전쟁이 벌어졌다하면 언제나 발생하는 숱한 모순들, 공포, 분노, 허위, 희생, 동지애, 이기심, 살해, 죽음, 시신, 부패, 남근성男根性, 욕심, 공명, (인간이 인간과 인간의 목숨에 대하여 강요하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소모, 질투, 회상, 성병, 추악 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어 소설 속의 모든 상황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점령한 남태평양 가상의 섬 아노포페이에 상륙한 미 육군 커밍스 사단과 직할 수색소대가 벌이는 작전 이야기. 그래서 두 주인공은 커밍스 소장, 그리고 수색 소대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어이없음은 육군 장군이나 말단에서 박박 기는 이등병이나 차별 없이 벌어지지만 당연히 육체의 고단함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장군의 말 한마디에 소수의 사병들은 가차 없이 살해되거나 절단의 부상으로 고통을 받거나, 아무 필요 없이 육체와 정신의 끝까지 소모해야 한다. 장군은 오히려 그가 없을 때 생각하지도 않게, 열등한 참모의 정신없는 오판에 의한 결정 때문에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큰 전과를 거둘 수 있고, 온갖 회의와 경우의 수에 대한 곤고한 계산 끝의 훌륭한 판단 아래 내린 작전으로도 허벌나게 깨질 수도 있다. 그래서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병력 수와 무기와 식량이(었)다.
  문제는 이 작품을 읽고 이것을 반전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건데, 노먼 메일러,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인종주의의 정체를 내놓고 밝힐 수 없었겠지만 읽는 내내 유대인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아리송해서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고, 비록 적군이지만 왜소한 아시아인으로서의 일본인에 대한 태도 역시 애매모호한 것처럼, 그가 전쟁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인지, 전쟁이란 것이 원래부터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왜 그런가하면, 앞에서 얘기했듯 노먼 메일러 한 사건(태평양 전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그린 것이 아니라 저널리스트로서 현장에서 벌어진 장면을 보다 다큐멘터리를 보듯 객관적이고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하는데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소설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시 미국의 인종주의에 대해서라면, 전투병 가운데 흑인이 전혀 없었다는 건 다들 아실 것이다. 왜냐하면 흑인에겐 총을 줄 수 없었으니까. 지능이 백인의 60%밖에 진화하지 않은데다가 그동안 긴 노예생활로 백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지레 겁이 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어떻게 총을 지급하겠는가. 그래서 몇 명 있지도 않은 흑인 병사는 주로 유럽이 아닌 태평양 전쟁 지역에서 총 없이 할 수 있었던 전쟁물품의 수송, 후방지역에서 벌어지는 공병 등의 작업에만 투입시켰고, 이 책에서도 단 한 명의 흑인 병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울러 20세기 초반의 반유대주의는 비단 독일에만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독일 못지않은 유대인 청소작업이 있었던 건 다들 아실 것이고) 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도 수백 년 동안 유구한 전통처럼 이어지다가 갑자기 반짝 불꽃을 피웠던 건데, 노먼 메일러는 작중 수색소대에 두 명의 유대인 전입병을 등장시켜 각기 상반된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유대인도 우리와 같은 그냥 사람들이란 걸 얘기하는 것도 같고, 다른 소대원들이 그들을 더러운 유대인 어쩌고저쩌고 하는 걸 그대로 차용함으로써 그들의 의견에 일부 동의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메일러는 인종주의 같은 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거다. 오직 하나 그의 관점은 될 수 있는대로 세밀화를 그리려고 했던 것 외엔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려 한 거. 자신이 하버드를 졸업했으니 당연히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는데 오직 이 소설을 쓰기 위하여 자원해 사병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반골이니 사실적인 묘사에 그가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이해가 갔다.
  근데 사실적 묘사. 그게 얼마나 뜨거운 건지. 사실이란 거, 그거 실제로는 함부로 쓸 수도 없고, 써서도 안 되고, 정말로 쓰자면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부인 안나 카레니나의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가스와 건더기가 방출하면서 내는 맹랑하고 발칙한 소리. 그것도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들려오는 음향. 게다가 냄새까지 보탤까 말까. 이게 사실인데 그걸 누가 함부로 소설에다가 쓰겠느냐는 거. 총알이 귓바퀴 아래로 팽팽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허벅지에서 피가 콸콸 나는 듯 미끈거리는 느낌, 근데 알고 보니 나도 모르게 괄약근이 벌어지면서 새버린 분뇨라는 사실. 명치끝에 총알 한 방을 제대로 맞았으나 기대와 달리 장렬하게 죽지 못하고 모진 목숨 무슨 미련이 남아 삼박사일동안 더 이어나가느라 악을 쓰고 욕을 하다 까무러치는 사실. 사실은 뜨겁고 위험하고 무모하다. 근데 이 노먼 메일러, 뜨겁고 위험하고 무모한 짓을 기꺼이 그려내고 있다.

 

  아직도 난 할 말이 남았다.
  과연 이 작품을 평론가들이 얘기하는 대로 반전문학反戰文學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점. 나도 내가 느끼는 사실로 말하자면 (이거, 위험한데, 무모하고!) 만일 <벌거벗은....>이 반전소설이면 세상의 거의 모든 전쟁소설이 다 반전소설이게? 전쟁문학에서 전쟁의 비참함이 나오지 않는 것이 있나? 우리나라 전쟁소설에는 여군들의 비참한 행군도 나오는 걸 읽은 적 있다. 헤밍웨이의 전쟁소설이 반전소설인가, 하는 것도 문젠데, 헤밍웨이 역시 저널리스트로,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그 나라 군인으로 참전했으니 탈영만 했다하면 다시 조국 미국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 소설을 썼는바(무기여 잘 있거라), 주인공이 정말로 탈영을 해버리는 거 그게 반전소설인가.
  에이, 반전소설일 수 있겠지. 그러나 내 기준으론 아니다. 왜냐하면 난 하필이면 조지프 헬러의 <캐치-22>를 읽어봐서, 적어도 그 비슷한 수준의 것이 나와야 반전소설로 인정할 수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벌거벗은....>은 몇 년 후 저널리스트가 될 젊은 참전 작가가 쓴 그냥 전쟁소설이다. 재미있지만 재미 면에서도 <캐치-22>만큼은 아닌, 그냥 전쟁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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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7-2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날카로우시네요. [캐치-22] 정도는 되야하는 거군요. 기억하겠습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Falstaff 2021-07-28 10:1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만큼 저는 <캐치-22>가 쇼킹했었더랬지요. 아니, 이런 소설도 있구나, 할 정도로요. 탈영병을 일컬어 영웅으로 환호할 수 있는, ˝미국˝ 소설이라니 말입니다.
메일러는, 역시 기자 출신이었던 헤밍웨이처럼, 기본적으로 반전주의자가 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 명 다 (전쟁의 경우) 소설은 재미나게 쓰는데 그걸로 끝인 거 같아서요. 물론 제 생각이 그렇다 하는 겁니다만.
옙. 스텔라 님도 보양식 열심히 챙겨 드시고 튼튼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

새파랑 2021-07-28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전 소설은 아니지만 전쟁 소설이군요. 리뷰보니까 좀 잔인(?)한 느낌도 약간 드네요. 직접 참전해서 썼다고 하니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폴스타프님의 감상평을 보면 재미만 있을거 같고... 🤔

Falstaff 2021-07-28 12:23   좋아요 1 | URL
앗!
재미만 있는 책이 어때서요? ㅋㅋㅋㅋ 소설읽기의 가장 큰 미덕이 재미잖아요!!!

hnine 2021-07-28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반전문학’이라고까지 할만한가 싶네요. 누가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지만요. 지금 밤의 군대들 읽고있어요. 어렵네요ㅠㅠ

Falstaff 2021-07-28 12: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다 읽는 사람 생각하기 나름이겠습니다. 의견이야 달라야 제맛인 거고요.

coolcat329 2021-07-29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먼 메일러, 이 작가 아내를 칼로 찔러서 무섭고 싫어 제 개인 금지도서로 정해놓은 ㅋㅋ 얼마나 읽는다고 금지도서를 정했나싶어 웃기지만요 ㅋㅋ
그래도 이 책 재미는 있군요~
<캐치-22>참 궁금합니다.

Falstaff 2021-07-29 09:51   좋아요 1 | URL
앗, 메일러가 그런 인간이었어요?
열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찔러? 아우, 그건 안 되지요.
말로 하다가 안 되면 갈라서면 되지 참.....

<캐치-22>는 코미딥니다. 전쟁소설은 반드시 반전소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종이라서, 이 책을 위대한 헤밍웨이의 것들보다 위에 놓을 용의가 있답니다.
전쟁하고 싶어하지 않는 군인들이 모인 병영이 무대인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이 터지는 이상한 책입니다. ㅋㅋㅋㅋ 생각만 해도 비질비질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9 09:59   좋아요 1 | URL
네 좀 인성이 덜 됐더라구요. 바람피고 폭행에...ㅠㅠ

캐치22 전쟁소설인데 코미디군요. 아 저 이런 책 넘 좋아합니다. 아 전쟁하기싫은 군인들이라니 벌써부터 입에서 웃음이 터지려고하네요.

잠자냥 2021-07-29 10:07   좋아요 2 | URL
네, 노먼 메일러 그런 인간입니다.
저도 쿨캣 님과 같은 이유로 노먼 메일러 작품 안 읽고 있습니다. 너무 싫음...
그 인간에 대해선 제 이 페이퍼를 참조하세요. 진짜 쓰레기...

https://blog.aladin.co.kr/socker/11029081

<캐치-22>는 하원드 진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은 적이 있어서 그때부터 마음속으로 찜만 해놨던 책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9 10:22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 / ㅋㅋㅋㅋㅋ 아주 속 시원하게 쓰셨구먼요!
<캐치-22>는 여성주의에 가까우신 분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무지 웃겨요.
 
지하철의 연인들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3
장 타르디유 지음, 이선형 옮김 / 월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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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을 이루는 쥐라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화가 아버지 빅토르와 음악가 어머니 카롤린 사이의 외아들로 1903년에 태어난 장 타르디유는 일찌감치 영재의 기질을 발휘해 10대 초반부터 후기 인상주의의 취향에 젖어 있었다고 하는데, 10대 초반이라, 이건 못 믿겠다. 점점 자라 29년,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당시엔 프랑스도 의무복무가 있어서 그것도 때울 겸,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베트남에서 미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도 만날 겸해 인도차이나에 지원해 갔다가 현지의 젊은 혁명 시인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3주간 더위 속에서 감방 생활을 했단다. 그러나 그곳에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할 한 살 위의 생물학을 전공하는 여인 마리-로르 블로를 만나 프랑스에 돌아와서 결혼하기에 이르니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듯. 더구나 베트남까지 가서 어려운 시절에 만난 평생의 배필이 배우기도 잘 배우고 세상에나, 아름답기까지 하다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나 그래.
  193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이후 극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라디오 극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1950년대 이후 부조리극 계열의 작품을 발표한다. <지하철의 연인들>도 이 가운데 하나다. 이후 1990년까지 계속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95년, 92년간 한평생 잘 먹고 잘살다가, 63년 동안 해로한 93세의 아름다운 아내가 지켜보는 침상 위에서 숟가락 놓으니, 거 참, 세상에 이이처럼 팔자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지하철의 연인들>은 역시 부조리극. 부조리극이라면 1950년대부터 대략 10여 년 동안 유행했던 전위 연극을 말한다. 흔히 반연극反演劇, 아방가르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부조리, 라는 어원을 따지는 골치 아픈 이야기 대신 한마디로 하자면, 기존의 연극 문법을 타파하려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을 보면, 연인들이라고 했으니 일단 주인공 비슷한 연인들, 그녀와 그이가 나오고, 23명이나 되는 무명의 승객들이 출연하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은 마네킹이다. 물론 23명이 다 필요한 건 아니다. 최하 남자 셋, 여자 두 명이 분장과 목소리의 변화를 통해 대신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는 역할은, 첫 번째 평범한 남자, 두 번째 평범한 남자, 성격이 급한 부인, 다리를 저는 남자, 잘난 체하는 신사, 애교스런 여자친구, 책 읽는 사제, 책 읽는 비 신앙인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첫 번째 우아한 여자 외국인과 두 번째 우아한 여자 외국인, 그리고 성별이 분명하지 않지만 남자인 것처럼 보이는 통역사다.
  지하철. 대도시의 상징이다. 한때 세상의 수도였던 파리에서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인 지하철. 사람은 끓어 넘치게 많지만, 역사 이래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소외와 개별화, 파편화가 가속화되어 오히려 더 많은 인파 속에서 대화와 소통은 단절된다. 1막인 플랫폼에서 두 명의 우아한 여자 외국인이 등장해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을 조금만 인용해보자.

 

  첫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아마 마히, 파하 「파리」?
  두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파리」란 단어를 이해하고는) 오 파리, 구쉬, 구쉬, 파리!
  첫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우유 메-후이?
  두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이해하지 못한다) 파 콥, 파 코피, 포톡!

 

  여기에 통역사가 등장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여자의 언어를 통역하지만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이들의 국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플랫폼에 아무리 많이 몰려 있어도, 무수한 사람들의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는 장 타르디유가 듣기에 외국 여자 두 명의 대사와 같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모르겠고,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2막은 객차 안이다.
  객차 왼편과 오른편 끝에는 연인, 여자와 남자가 서 있고, 이들 사이에 다섯 명과 기둥서방 역을 하는 마네킹이 서 있다. 객차는 그나마 플랫폼과 달리 사람들 전체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는 물리력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출발, 정지, 가속, 회전에 따라 승객들의 몸이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기는 하니까.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외부 힘일 뿐으로, 같은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같은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탑승한 나와 당신의 어깨 위를 누르는 공기, 코끼리 다섯 마리 무게의 압력과도 같은 것이다. 즉, 2차 세계대전 같은 거대한 사고가 나지 않는 한 별로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없다는 말씀.
  다섯 명은 각각 신문을 즐겨 읽는 사람, 감정이 상한 도발적인 부인, 이해심이 많은 배관공, 스타를 꿈꾸는 공주병 아가씨,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인데, 남자와 여자는 전혀 의미 없는 대화를 남발하고, 연인끼리의 의사소통은 자기주장을 쪽지에 써서 사람들이 전해주는 형태다. 남자가 옆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자리를 바꿔가며 한 칸씩 연인 곁으로 가지만 결코 의미 있는 대화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결국 그녀와 그이가 상봉을 해 드라마는 해피엔드로 끝나긴 한다.
  여기에 프랑스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타르디유 표 말장난이 눈부시게 나온다는데, 불어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나는 조금도 알지 못하니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역자는 그런 크레센도, 데크레센도 같은 음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깝다고는 하지만 어쩌랴, 그게 왜 안타까운지도 모르는 독자 입장에서는 말이지. 번역서를 읽으며 완전히 다 만족할 수 있나.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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